▲카메라를 외면하는 말리와 '개 할머니' 팻한나영
소설가 김형경이 쓴 심리, 여행 에세이 <사람 풍경>의 '분리' 편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사람들의 내면에는 저마다 자의적인 기준이 있다. 그리고 그 기준으로 세상을 두 편으로 나누는 이분법을 가지고 있다. 동년배의 한 평론가가 "나의 이분법은 인간을 댄서와 화가로 나눈다"고 쓴 글을 본 일이 있다. 그의 친구 한 사람은 인간을 육식동물과 초식동물로 나눈다고 했다. 나의 친구 한 사람은 에세이에 이렇게 썼다. "세상 사람들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어둠이 밀려오는 밤바다를 지켜보면서 울어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이렇듯 자의적인 기준의 이분법으로 미국 사람을 나눠본다면 미국은 '개 있는 사람'과 '개 없는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미국에서 개의 위치는 사람을 분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매일 아침 우리집 앞에서 나는 '개 할머니'를 만난다. 할머니의 이름은 팻. 패션모델같이 곱게 단장한 할머니는 오전 7시경이면 그의 친구 '말리'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다.
팻의 산책은 아침 뿐만이 아니다. 저녁 해질 무렵에도 팻과 말리의 아름다운 동행은 계속된다. 언젠가 팻을 만나 '개 산책'에 대해 물어보니 특별한 일이 없으면 보통 아침, 점심, 저녁, 하루에 세 차례씩 말리를 데리고 나온다고 했다.
이렇게 날마다 지극 정성으로 개 산책을 하는 팻에 대해 나는 언젠가 때가 되면 팻과 말리의 산책 이야기를 써보려고 했다. 그래서 팻을 만나면 말리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는데 팻은 자신과 말리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는 나를 좋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산책중인 팻을 만나 사진을 찍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말리였다. 카메라를 내밀고 '원, 투, 쓰리'를 외쳐 보았지만 말리는 내 카메라를 완전히 외면했다. 팻의 이야기로는 말리가 너무 수줍어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고개를 돌리고 딴전을 피우는 말리. 그의 얼굴을 카메라쪽으로 돌리기 위해 나는 말리 발 앞에 앉아 말리의 등을 부드럽게 만져 주었다. 하지만 말리는 여전히 나를 외면했다. 그러자 팻이 말리에게 사정하듯 이렇게 말했다.
"말리, 네가 예쁘다고 지금 쓰다듬어 주는 거야. 아줌마 얼굴을 한 번 봐. 고개를 돌려보라고."
남이 들으면 마치 자식에게 말하는 듯한 다정한 목소리였다. 사실 나는 개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좋아하기는 커녕 오히려 겁을 내고 무서워하는 편이다. 그러니 말리의 등을 쓰다듬어준 건 나로서는 큰맘 먹고 선심을 쓴 것이었다. 하지만 매정한(?) 말리는 끝내 내 카메라를 외면했다.
이렇게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은 팻만이 아니었다. 우리 동네에는 몸집이 호랑이만한 개를 데리고 다니는 아저씨도 있고, 인형같이 생긴 작은 개와 걸음을 맞춰 나란히 걷는 아가씨도 있다.
이렇듯 미국에서는 개가 동물이기보다는 살가운 가족으로 대접받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사실 미국인들이 개를 얼마나 끔찍히 여기는지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보면 알 수 있다. 가족 나들이에 어김없이 따라온 또 다른 가족. 이들이 바로 대접받는 견공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