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성으로 찾는 고구려 안시성과 백암성

위성으로 찾는 고구려강역시리즈8

등록 2006.08.06 10:24수정 2006.08.06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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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안시성은 당태종의 30만 대군을 물리친 고구려 대성이며 성주는 양만춘이었다.

안시성을 찾기 위해 <신당서>를 보면 대요수와 소요수, 그리고 또 압록강이 서남으로 흘러 바다로 나가는 곳이 역시 안시성이다(<新唐書> 高麗...水有 大遼、少遼:大遼出靺鞨西南山,南歷安市城...有馬訾水出靺鞨之白山,色若鴨頭,號鴨淥水...又西南 至安市). 대요수는 대릉하와 합쳐서 바다로 나가므로 안시성의 위치는 지금의 랴오허강(遼河) 서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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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강물 ⓒ 구자일

위성으로 찾은 안시성은 의무려산 동쪽의 북진시(北鎭市) 동북방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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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성 주변도 ⓒ 구자일

북진시는 발해 동평부 북주(北州)였다, <연행일기(燕行日記) 제9권>에 의하면 북진시 성 서쪽 이도구(二到溝)에 가면 성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에 고구려왕의 무덤과 석비가 있었다고 하였다.

북진시 서남에도 고구려 성터가 아직 남아 있다. 오늘날 북진시 서쪽 의무려산 홍보사이트 중에서 영산풍경구(醫巫閭山靈山風景區) 안내를 보면 구백 년 전 고구려성 유적지와 당대 우물이 있다고 하였다. <요사지리지>에 의하면 발해 북주 영봉현(靈峰縣)이 있었다가 요나라 때 영산현이 되었다(http://www.lvshan.com/fengjing_info.asp?id=219).

북진시 북쪽 십리에는 고성산(古城山)이 있다고, 명나라 때 지은 <요동지(遼東志)> 등에 전해 온다. 위성으로 찾은 그 고성산 안쪽의 양가점(楊家店)이 바로 안시성주 양만춘(楊萬春)의 후예가 살아온 안시성이다.

안시성 주변지도를 보면 안시성 동남쪽으로 서대(誓臺)라는 곳이 있었다. 당태종이 맹세하던 곳이라는데 당태종은 안시성을 함락하면 안시성의 모든 남자를 죽이겠다고 맹세한 바가 있다.

역시 동남으로 멀지 않은 곳에 고려판성(高麗板城)의 고구려 성터는 본래 당태종이 머물렀던 당루(唐樓)라고 했는데, 그 위에서 행관영루(行觀營樓)하였다고 전해진다. 당태종이 그곳에 올라서 진영을 살펴보던 곳이라는 뜻이다. <자치통감>에서는 당태종이 높은 곳에 올라 산천형세를 살펴보았다고 하였다(<자치통감> 乃與無忌等從數百騎乘高望之,觀山川形勢,可以伏兵及出入之所). 고려판성이라는 이름은 당태종의 철군후에 고구려가 성을 세운 것이 된다.

안시성 전투에서 당태종은 고구려 장수 고혜진 등과 전투하여 초반에는 고구려군에게 밀리다가 후반에 주필산에서 설인귀의 맹활약으로 이겼다. 이후 고구려 군대를 포위하여 고혜진 등의 항복을 받았다. 당시 당태종이 주필산 전투를 각석기공(刻石紀功)한 주필산은 지도에서 보면 정안보진(正安堡鎭) 서쪽 기둔(紀屯)으로 고려된다. 정남보진 북쪽 건둔(蹇屯)은 주필산에서 패한 고구려군이 도주했다가 항복한 곳으로 고려된다. 이후 당태종은 안시성 동남쪽에 3개월간 진을 치고 토산을 쌓다가 물러났다.

양만춘의 후예는 발해 때에 설치한 북주성의 주인이었던지 오늘날 북진성을 관통하는 물이름도 양랑하(楊朗河)라고 하였고, 성내 서북산은 만취산, 또는 만세산, 만자산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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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성성곽도 ⓒ 구자일

북진시 북쪽 고성산 속안의 양가점이 안시성주 양만춘의 내성이고, 고성안의 사방대(四方臺)라는 곳은 동북 정문의 북루(北樓)로서 양만춘이 전장을 내려보던 곳이다. 양만춘이 강궁을 쏘아 당태종의 눈을 화살로 뚫은 곳일 수도 있다. 그 서남에는 남루(南樓)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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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성 동북문전장도 ⓒ 구자일

안시성의 성루 방어에 대응하여 당태종이 60일간 연인원 50만명을 동원하여 쌓은 토산이 남루에 이어져서 보인다. 고구려는 당나라 장수가 방심한 틈에 습격하여 이 토산을 빼았고 점령하여 참호를 파서 수비하였으니, 당태종은 그만 철군하게 되었다. 안시성은 동남벽이 3.2km, 동북벽이 2.5km다.

당태종의 대군이 안시성으로 오기 위해서 대시(大市)를 지난 것을 알 수 있고, 이는 전에 밝힌 고구려 요동성에서 곧장 동쪽으로 나아가서 협곡을 지나 의무려산 북쪽을 넘은 것이었다(위성으로 찾은 험독성과 요동성편 참조).

요동성으로부터 당태종이 공격나갔다가 항복을 받고 돌아온 백암성은 산에 의지하고 물이 험한 곳인데 <요사지리지>에서 암주 설명은 발해 백암성을 요나라 태종이 뽑아다가 심양에 옮겼다고 하였고, 따라서 현재의 요동 땅에 있던 것이 아니다. 요나라가 옮기기 이전의 백암성은 1117년 요나라 연왕순의 여진족 토벌군과 여진족 전투중에 그 기록이 출현하는데, 휘주(徽州;부신시 서북 사가자 고성)에서 요나라군이 대패하고 후퇴하여 다시 전열을 정비한 팔영(八營) 중의 하나로 암주영(岩州營)이 있었다(<거란국지> 1117年. 初, 怨軍有八營, 共二萬八千餘人, 自宜州募者謂之前宜營, 再募者謂後宜營, 前錦、後錦者亦然, 有乾營、顯營, 又有乾顯大營、岩州營).

해석하면 대릉하의 의주시 앞뒤로 2개, 소릉하의 금주시 앞뒤로 두개, 안시성이 있던 북진시 앞뒤로 3개, 그리고 암주성이었다. 즉 안시성의 방어 위치이면서, 또한 당태종의 요동성-백암성-요동성-안시성의 행로를 보면 요동성과 안시성의 협곡 길에서 살짝 비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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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성성곽도 ⓒ 구자일

부신시(埠新市) 남쪽 한가점(韓家店) 동쪽에 상왕영자(上王營子)라는 곳이 있다. 당태종이 백암성 공격 때에 주둔했던 백암성 서북 진으로 고려된다. 그 동남쪽에 물길로 둘러싸이고 높은 산자락에 기댄 성터가 백암성이 된다. 이세적이 주둔한 서남쪽은 외성 입구였을 것이다.

이제 고구려 안시성 양만춘 장군이, 안으로는 정권을 찬탈한 반역도 연개소문을 꾸짖고, 밖으로는 외적 당태종의 침략을 강궁으로 응징하던 기백을 되살릴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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