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마 이주노동자가 한국에서 시민운동하는 이유

[활동가와 차한잔 ⑩] 고국의 민주화운동 벌이는 '난민' 마웅저

등록 2006.08.06 16:10수정 2007.02.01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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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시민행동 사무실서 전화를 받는 마웅저.
함께하는시민행동 사무실서 전화를 받는 마웅저.함께하는시민행동

내가 그를 처음 만나게 된 계기나 시점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느 날인가 한국의 시민운동에 관심이 있다는 버마 친구가 '함께하는시민행동'(이하 시민행동) 사무실에 찾아왔다. 진작부터 교류가 있던 사무실의 동료 한 사람을 통해 시민행동을 찾아 온 친구가 마웅저(38·Maung Zaw)였다.

처음엔 한국의 시민운동에 대한 궁금증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고 보니 한국의 시민운동의 왜 이렇게 영향력이 강할까라는 의문을 넘어서, 언젠가 고국에 돌아가면 버마에서도 이렇게 운동을 하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그를 한국의 시민운동으로 이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자신에게 '기회'가 주어지길 강력하게 희망하는 그를 두고 사무실 동료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시작했다. 그간 시민단체 내에서 외국인이 근무한 경험이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웅저 자신의 강력한 의지는 우리들의 이런 고민을 훌쩍 넘는 것이었다.

한국의 시민운동을 배우러 온 버마 친구

우선 시민행동 사무실에 일주일에 한번씩 나오면서 한국말을 배우고 성공회대에서 청강생으로 사회운동에 대한 공부도 하면서 버마민주화를 위한 여러 활동에 참여하기로 했다. 한편으로는 버마를 알리기 위한 강연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런 저런 초청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다니면서 서로 적응하는 기간을 갖기로 한 것이다.

석달이 지나서인가? 마웅저는 진지하게 향후 자신의 진로를 의논해 왔다.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이런 저런 논의 끝에 시민행동에 아예 상근자로 일하는 문제를 고민하기로 했다.


마웅저의 '욕심'은 끝이 없어 보였다. 공부도 더 하고 싶고, 버마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일도 계속하고 싶어했다. 결국 일주일에 이틀 정도 나오기로 했다.

그러나 문제는 생활이었다. 이주노동자로 살 때는 그나마 소득이 있었지만, 일을 그만둔다면 소득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와 가깝게 지내던 지인들이 십시일반으로 매월 조금씩 모아서 교통비 정도는 후원할 수 있게 됐다.

그런 와중에도 마웅저는 포기하지 않고 한국어 과정을 마치고 성공회대의 청강 과정도 다녔다.


마웅저의 끝없는 '욕심', 그리고 버마 사랑

그는 '평화'의 문제를 화두로 버마와 태국 국경에 위치한 버마에서 탈출한 난민들이 모여 있는 메솟을 방문하는 학생들의 프로그램에 도움을 주고 있다. 또 그가 진지하게 고민하는 일 중의 하나는 버마아이들의 교육문제다. 지금 현재도 준비 중이지만 고국으로 돌아가면 특히 그가 신경 써서 하고 싶은 일들 중의 하나다.

이런 활동들을 거쳐 가며 그는 지금 '평화학교'를 스스로 기획 중이다. 아직 그가 기획한 평화학교의 모습이 어떨지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메솟을 찾아가는 학생들을 돕다가 그때 그때 요청하는 일을 돕는 것이 아니라 아예 지속적인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보자고 생각한 것이다.

그가 한국 시민운동에서 어떤 모습으로 성장해 갈지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조금씩 진화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한국의 시민운동가 마웅저를 만나게 될지 모른다. 그가 지금 기획하고 있는 평화학교 일이든 혹 다른 일이 되었든 말이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합법적인 신분을 획득하는 일이다. 한국정부에 난민지위 인정을 요구하고 있지만 한국정부는 이를 거절했다. 언제 잡혀서 갇히거나 혹은 죽을지도 모르는 버마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출입국관리소의 거만한 태도가 그의 자존심을 짓밟고 상처를 주었다. 독재정권에 대항해 민주화를 성취한 국가라는 것 때문에 버마에 대한 이해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됐다. 그는 지금 자신의 정체성을 놓고 한국정부와 싸우고 있다.

그의 싸움은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됐다

마웅저
마웅저함께하는시민행동
그의 싸움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작됐다. 그는 독재정권에 대항해 영국 식민지로 있던 시기인 1948년 조직된 적이 있는 버마전국학생연합(All Burma Student Federation Union, ABSFU)을 재건하려는 움직임에 가담했다.

그는 이 조직을 탄압하는 버마정부의 추적을 피해 많은 선배와 동료들이 붙잡혀 가는 와중에 버마를 탈출했다. 들리는 소리로는 그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거나 버마의 감옥에 갇혀 있다고 한다.

그는 1994년 없는 돈에 브로커에게 돈을 주고 한국에 취업비자 형식으로 들어올 수 있었으니까 그가 이제 한국에 온 지도 10년이 넘은 셈이다.

이주노동자로 몇 년을 살아가던 그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한국에 들어온 동료들과 1998년에는 NLD(버마민족민주동맹)의 한국지부를 만들어 고국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03년에는 NLD 내부의 갈등으로 심신이 피곤해 진 그가 NLD를 탈퇴했지만, 그조차 그에게는 마음의 짐으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고국의 민주화와 미래를 위한 그의 싸움이 끝난 것이 아니라 더욱 더 확장되고 있다. 한국의 아이들에게 버마에 관심을 갖게 하고 분쟁지역의 모습을 소개함으로써 평화를 성찰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또, 버마의 미래를 위해 가장 시급한 일은 교육문제. 그는 지금부터 무언가 이에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버마 아이들의 교육을 지원하는 모임'을 스스로 만들어 움직이고 있고, 한국의 시민운동을 배우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활동을 생각하고 기획하고 있다.

아름답고 선한 사람, 이 땅에서 떠돌지 않기를

그를 만나 본 사람들은 누구나 그가 얼마나 선한 사람인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선하게 웃는 그의 웃음이며 그의 눈을 보고 있으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간혹 얻어먹게 되는 버마 음식의 맛도 그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이 선한 사람이 고국을 떠나와 자신을 그리 환영해 주지도 않는 나라 한 구석에서 묵묵히 고국의 미래를 위해 헌신하며 자신을 갈고 닦는 모습은, 때론 처연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때론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가 언젠가 고국에 남아있는 형제들의 품으로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지만 이 땅에 있는 동안만큼은 다시 떠돌아야 한다는 불안감은 없었으면 좋겠다.

한국정부가 이제라도 그를 난민으로 인정해주었으면 한다. 그가 합법적인 신분을 획득해 버마 민주화운동의 전사로, 한국 시민운동에서도 의미있는 활동가로 성장해 가기를 기대해 본다. 그가 성장하는 만큼 우리도 역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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