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에선 '푸른색'은 안 봐도 돼

벗과 함께 살핀 인도네시아 풍정

등록 2006.08.08 17:31수정 2006.08.08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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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朋自遠方來(유붕자원방래) 不亦樂乎(불역락호)!"


벗이 방문했다. 고국으로부터 내가 살고 있는 인도네시아에 왔다. 벗은 머무르는 동안 많은 것을 보고 듣고자 했다. 기내(機內)에서 흘러나온 말대로 고대와 현대가 숨쉬는 모습을 보고자 했다.

벗은 같은 모양을 불허하는 즐비한 도심의 고층 건물들, 도심 한 가운데서 골프장과 어우러진 궁궐 같은 주택가들을 둘러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국 화폐 가치로는 한 달에 5∼6만 원 정도의 수입으로도 행복도가 높은 서민들의 삶의 풍경을 접하고는 짠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집스럽게 벗은 인도네시아의 지진과 쓰나미, 화산 폭발 피해지역을 둘러보더니 안타까움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바다와 산으로 가서 천혜의 자연과 풍토, 인정이 빚어낸 갖가지 모습들을 함께 체험하면서 벗은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서울에서는 좀 체로 접하기 힘든 푸짐한 시푸드 요리와 맛깔스런 토속 음식, 다양한 과일이 벗을 행복에 취하게 했다. 반면 식탁 한 세트 가격이 1만불이 넘으며, 피아노 한 대 가격이 10만불이 넘고, 고가의 보석들이 즐비한 독립 브랜드 쇼핑몰의 경우 벗을 혼란에 빠뜨리기도 했다.

방문자의 느낌과 나의 경험을 섞어 재외 동족들의 정서도 살펴보았다. 그는 참 많은 것을 처음 보았고, 나는 보았던 것이나 알고 있었던 것을 살피면서 참 느낌이 많았다. 벗과 나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첫 질문은 "작가의 타국살이"였다. 작가의 타국살이 참 특별한 것이 많다. 그러나 난 아직 길을 가고 있는 중이니 일상적인 것이 답일 수밖에 없다.


"가정부와 기사에게 절반의 성공과 행복이 달려 있다는 말이 사실이더군."

참 희화적이고 얼토당토않은 말로 벗에게 들렸던가 보다. 도대체 누가 왜 그들에게 성공과 행복을 의지하고 맡기는가. 왜 그들에게 성공과 행복의 절반이 달린단 말인가 의문스러웠을 것이다.


"가정부와 기사를 부리지 않으면 되지?"

벗이 간단하고 틀림없는 답을 찾아냈다. 그런데 그건 해결책이 아니다. 현실은 그들을 반드시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서예가가 붓을 버리고 작품을 이룰 수는 없다. 붓쟁이가 붓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 예술의 본질도 이해하지 못하면 좋은 작품을 할 수가 없다. 붓을 쥐면 내가 곧 붓이 되어야 하는 것은 정한 이치다. 초학자에게나 수십 년의 경험자에게도 붓은 넘어야 할 산이요 숙제다. 타국의 풍토는 타국살이에게 반드시 넘어야할 산인 것이다.

인도네시아에는 크게 두 부류의 두 가지 정서가 존재한다. 한 부류가 바로 서민층이다. 그들은 좋게 평가하면 나눔과 무욕으로 모든 것을 흡수하는 정서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나쁘게 보면 무자각이고 방관이다.

또 한 부류는 상류층이다. 이들은 대게 전통적으로 귀족층인데, 그들의 정서는 좋게 보면 대국인다운 기질이다. 대대로 부러울 것 없이 누리고 사는 사람들로서 모든 것을 너그럽게 흡수한다.

그러나 자기 나라에 와서 사는 외국인들이래야 뛰어봐야 벼룩이라는 식의 안하무인도 측면에 도사리고 있다. 어쨌든 이들의 생활모습과 언어능력 몸에 밴 매너, 부의 정도 등은 타국살이들을 기죽이기에 충분하다.

흔히 "인도네시아에는 없다"라고 말하는 중산층의 경우 최근 들어 신생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문화로써 이야기되기보다는 경제수준으로만 평가되는 것이기에 열외로 해도 될 것이다.

서민이나 상류층이나 거기서 드러나는 정서를 그냥 그 자체로 바라봐야 한다. 이들의 시간은 매우 느리다. 아예 시간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한국인들이 늘 시간을 헤아리면서 바쁘게 사는 것과는 영 다르다.

그래서 하나하나를 오래 바라봐야 한다. '후진국 사람들' 운운하며 편견을 가지면, 양쪽에서 달갑지 않은 결과가 부메랑이 된다. 흔히 회자되는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나라'라는 말을 잘 새겨야 한다. 게으른 초록빛의 작은 변화 속에 모든 것을 삭여내면서 오직 기다림을 배우는 나라가 인도네시아인 것이다.

세계 각국에 지사를 두고 있는 한 회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서울 본사에서 각국 주재원 부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인도네시아가 가장 살기 좋은 곳'이란 자랑이 나왔다고 한다. 또 모처럼 고국인 한국에 다니러간 사람이 다시 자카르타행 비행기를 타고나니 비로소 긴장이 풀리더라는 말은 무슨 의미로 해석해야 할까.

사는 곳에서 느끼는 행복이야 다 각자에게 달린 것이니 그냥 밀쳐두기로 했다.

"참 무심한 푸른색을 보겠네!"
"거긴 시간이 흐르지 않아. 그래서 인도네시아에선 푸른색은 안 봐도 돼."

벗은 꽃들과 새의 깃털, 동물들의 몸짓에서 무심하지 못한, 무심할 수 없는 화려한 색들을 찾아냈다.

5분 거리 슈퍼를 가더라도 차를 탈수밖에 없는 곳인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 개인 주택 생활에도 가정부와 기사. 더러는 하우스 보이, 정원사, 경비원 등 고용인을 두는 사회 환경. 집안에서 차를 타고 나가고, 집안에 들어와서 내리는 것이 상식인 나라.

거의 모든 건물에는 카콜 장소가 있어서 기사 이름과 사는 동네 등을 알려 주고, 잡담 몇 마디 나누고 있노라면 곧 차가 출입구 앞에 대령을 하는 곳. 이것은 모두 후진국에서 산다는 이유로 누리는 혜택이 아니다. 공생일 뿐이다.

남성은 물론 여성들까지 골프를 즐기기에 최고의 환경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는 나라. 외국인이나 이질 문화를 큰 충돌 없이 쉽게 받아들이는 현지인들의 정서. 알게 모르게 인종차별을 받고 사는 서구의 여러 나라들과 달리,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호감의 대상이 되는 곳 인도네시아.

한국인들은 인도네시아 생활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외적으로 신분이 상승된 생활을 한다. 앞 뒤 정원이 수려하고 수영장이 달린 큰집에 산다면 특히 그렇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넓은 집에 살기를 간절히 원하는 대다수 한국인의 정서로 볼 때, 어쨌든 소원 하나는 이룬 셈이다. 집이 크고 방이 많으며, 정원이 넓고 수영장이 갖추어져 있는데다가, 이를 관리할 수 있는 고용인까지 두었다면, 어찌 부지불식간에라도 신분상승을 느끼지 않으랴.

뇨냐(부인, 여사, 안주인)이나 뚜안(주인, 소유자, 폐하)이란 단어가 파생하는 뉘앙스도 그렇다. 이 말은 그냥 호칭에 불과한 것이지만 함께 생활하는 고용인들에게 늘 듣는 단어다. 그러니 마치 조선시대 고용인들이 상전을 부르는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는 것이 사실이다.

주인네 나라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고용인, 적당히 능동적이지 못하는 고용인, 자신들의 현재 처지가 신에 의해서 결정되었다고 굳게 믿는 신세타령을 할 줄 모르는 고용인, 만약 현세에서 어려운 처지로 산다면 반드시 다음 세상에서는 보상을 받는다는 것을 철저하게 믿는 고용인, 높은 수치의 삶의 행복도로 밝고 태평하게 사는 고용인들.

“건축물들이 독자성이 강하고 섬세하던데….”
“인도네시아가 자랑하는 바틱이나, 전통 공예, 회화 등도 대부분 섬세하지.”

현지의 인정은 현지의 땅과 닮아 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대게 현재의 처지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비관하거나 방만하게 미래를 설계하지 않는다. 맑게 웃고 좀처럼 화를 내지 않지만, 쉬이 정을 주지도 않고 상대방에게 특별한 기대를 하지도 않는다. 무심한 심상의 소유자들이다.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상대방이 듣기 싫어할 말이나 강요하는 말은 몹시 꺼린다. 말없음으로 남기도 하지만, 그냥 떠나는 것으로 말을 대신하기도 한다.

그래서 아침에 취직한 일터를 저녁에 그만 두는 경우가 잦다. 자존심의 모양이 참 다면체다. 나누어 줄줄 모르는 가진 자의 것은 훔친다는 개념도 없이 가져가기도 한다. 아주 작은 돈에 눈이 멀어 주인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일도 벌어진다.

기도는 엄숙하게 열심히 하면서도 순간 모면을 위한 거짓말과 무책임의 대가들이다. 강대국에 400여 년을 지배당하면서 온갖 착취와 노예적인 생활을 견디는 것으로도 모자라 해방이후 자국의 야비한 독재자들에게 오랜 기간 억눌려 살아온 사람들이다. 되는 것도 안 되는 것도 모두 알라의 뜻이라고 한 번 씩 웃어버리면 끝이다. 태평스럽기 그지없다.

"장자가 꿈꾸던 삶을 사는 사람들 아닌가?"

벗의 평가요 질문이다.

"이들이? '도(道)와의 조화 속에서 거리낌없이 사는 것'은 아니잖아? '사생을 초월하여 절대 무한의 경지에서 소요(逍遙)함'은 더욱 아니고…. 문명에 휘둘리며 사는 선진국 사람들보다는 '인간은 만물유전의 법칙에 거스를 수 없다'는 장자철학에 조금 더 가까울까?"

"타국살이 작가 작품에 변화가 오겠군."

벗이 물었다.

"내 시간도 느려졌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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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가. 2015년 5월 인사동에서 산을 주재로 개인전을 열고 17번째 책 <山情無限> 발간. 2016, 대한민국서예대전 심사위원장 역임. 현재 자카르타 남쪽 보고르 산마을에 작은 서원을 일구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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