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만? 나도 독서일기를 쓰련다

'소슬바람의 평화로운 책읽기'를 시작하며

등록 2006.08.09 18:24수정 2006.08.10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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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도무지 정리가 안되는 책장. 정서적 암흑기에 나의 책들은 쓸쓸한 과부처럼 외면받는 신세였다.

도무지 정리가 안되는 책장. 정서적 암흑기에 나의 책들은 쓸쓸한 과부처럼 외면받는 신세였다. ⓒ 박현주

20대 중반 백수 시절, 나는 해가 중천에 떠올라 있는데도 이부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비스듬히 누워 흐릿한 눈으로 책을 읽는 날이 허다했다. 1997년 겨울, '준비된 대통령'이 40여 년의 오랜 야당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지방 대도시에 사는 '준비된 노동자'는 정경유착의 국가독점자본주의가 불러온 시대적 위기 즉, IMF 사태에 힘없이 날개가 꺾여 방바닥을 뒹굴며 일기장에 낙서를 끼적거리거나 책 속의 비현실 공간에서 위안을 찾는 불쌍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력감이 분노가 되어 솟구칠 때마다 사회일꾼으로 '준비된 청년백수'였던 나는 계룡산 천황봉쯤에 올라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귓구멍 뚫린 자는 들을지어다. 젊은이의 꿈을 빼앗는 상황이 세상에서 가장 사악하도다!"


그 시절 나의 무력감에 한층 더 불을 지른 것은 <장정일의 독서일기>와 <장정일의 비디오일기>였다. 독서일기나 비디오 감상문 따위가 책으로 나올 수 있다니 얼마나 놀랍고 환상적인 일인가. 매일 집에서 책 읽고 비디오 보는데 그런 행위가 돈이 된다는 것.

천 원 한 장이 아쉬웠던 그 시절, 나는 작가 장정일이 해고와 실직과 부도와 파산으로 아수라장이던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품위를 유지하고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무 걱정 없이 하루 종일 책 실컷 읽고, 영화 만땅 보는 삶이 부럽다 못해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나는 언제쯤이면 취직 걱정하지 않고 독서일기나 비디오 일기 따위를 쓰며 살 수 있을까? 내 생에 그런 봄날이 올까? 나는 늘 끼고 사는 일기장에 작가 장정일에 대한 부러움과 내 초라한 젊음에 대한 슬픈 심정을 토로했었다.

그러나 꿈은 이루어진다. 붉은 악마의 주문처럼 말이다. 딱 10년의 세월이 흐르자, 나의 꿈이 바야흐로 이루어지려 한다. 나는 장정일 같은 유명한 작가가 아니기에 나의 독서일기나 비디오 일기가 책으로 묶이고 그것이 팔려 인세 수입을 벌어오지는 않겠지만, 독서일기나 비디오 일기를 쓰는 행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은가. 그 사실이 바로 '꿈은 이루어진다'고 장담하는 근거이다.

못할 일이 뭐냐. 하면 하는 거지. 집에 안 읽은 책이 수두룩하겠다, 나의 전용 서재처럼 애용하고 있는 대덕구 안산도서관이 바로 집 옆에 있겠다, 길을 건너지 않고, 차를 타지 않고, 도서관을 맘껏 이용할 수 있다는 것도 얼마나 큰 행운인가.


7년간 환경단체 상근자로 활동하다 망가진 몸

무엇보다도 내가 독서일기를 쓸 수 있는 까닭은 내게 책 읽을 시간이 많기 때문이다. 나는 2006년 8월 현재, 1997년 겨울 장정일의 독서일기를 읽으며 질투하던 때처럼 일없이 놀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10년 전 20대 백수 시절과는 질적으로 다른 30대의 '중후'한 시간을 만끽하고 있다. 그것은 내가 굳이 구직활동을 하지 않아도 굶어죽지 않을 정도의 '비빌 언덕'이 생겼다는 뜻이다. 그 '비빌 언덕'은 바로 사랑하고 사랑하는 나의 신랑이다.


서른 넘어 결혼하고 나서 나는 7년간 유지하던 환경운동단체 상근자 노릇을 잠시 쉴 작정을 하였다. 작년 여름, 휴직계를 낼 당시 나는 몸과 마음이 너무나 지쳐서 걸어 다니는 송장과도 같았다. 스트레스와 화가 차곡차곡 쌓여 오후 2시만 되면 어지러웠고, 지긋지긋한 속쓰림이 무릎 통증으로도 나타나 10분 이상 걷기도 힘들었다(위장과 무릎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이때 처음 알았다).

세상을 녹색으로 바꾸겠다고 뛰어다닌 지난 7년 동안 자연환경은 얼마큼 살아났는지 모르겠으나 '나'라는 개체 환경은 망가진 것이 확실했다. '자기 몸과 마음을 녹색으로 만들지 못하고 녹색운동을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야. 이쯤에서 멈추는 게 어때? 응?' 하늘의 경고였다.

진단컨대 운동한답시고 뛰어다닌 나의 지난 7년 세월은 정서적 암흑기였다. 사놓기만 했지, 끝까지 읽지 못한 책이 수십 권이다. 감동을 느끼며 제대로 읽은 책이 한 권도 없을 지경이었다. 정서의 암흑기는 건강의 암흑기를 끌어왔고, 마침내 인생 피폐기를 도래시킨 것이다.

나는 자리에 몸져누웠다. 나의 남편은 나를 간호하느라 문지방이 닳도록 왔다 갔다 하며 수발을 들었다. 식은 찜질팩을 다시 데우러 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퀭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넓은 등짝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뇌리를 스치는 영특한 생각 하나.

'당분간 네게 신세 좀 지면 안 되겠니? 네 등에 기대어 일 안하고 쉬어볼 테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가 웃고 있음을 알았는지, 남편이 뒤돌아보며 이상한 듯 물었다.
"왜 웃어?"
"으응, 아냐 그냥, 뭐……."
대충 얼버무린 후에도 나의 입가엔 회심의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남편도 사회단체 활동가라 가정경제가 그리 안정된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나마도 '비빌 언덕'이 있다는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소슬바람의 평화로운 책읽기'를 준비하며

휴직계를 낸 후, 나는 신체의 건강과 함께 상처입고 무뎌지고 오염된 나의 감성을 치료하기에 골몰했다. 그것은 일종의 '구도(求道)'였다. 약 1년간의 구도 행각 끝에 나는 외부로부터 받는 어떤 치유 프로그램보다 홀로 글 읽고 글 쓰는 행위가 죽은 감성을 되살리는데 훨씬 효과적임을 깨달았다. 외부적 조건, 내부적 조건, 안팎이 딱딱 맞아떨어졌다. 세상이 이렇듯 내게 독서일기를 써보라고 부추기는데 내가 못쓸 게 뭐냐. 이름난 작가가 아니라도 어때?

그리하여 나는 10년 전에 부러움만 삼키고 물러났던 독서일기를 쓰기로 결심하였다. 그 까닭을 정리하면 첫째는, 장정일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신선 같은 인생을 살아보자는 꿈의 이룸이고, 둘째는 '정서의 암흑기' 동안 다친 감성의 치유를 위해서이고, 셋째는 (앞서 설명하진 않았지만) 주의 산만한 독서습관을 고치기 위함이다(나는 여러 권의 책을 한꺼번에 읽는 버릇이 있는데, 결국엔 단 한 권도 다 읽지 못하고 흐지부지되는 대단히 나쁜 독서 습관을 가지고 있다).

굳이 <오마이뉴스>에 연재하려는 이유는 약간의 독자라도 확보하기 위함이다. 독자가 있어야 쓰는 신명도 나고, 게으름에 꿈을 좌초당하지 않을 거라는 계산에서다. 독서 일기라고 해서 매일 쓰는 것은 아니다. 책을 매일 한 권씩 뗄 수 없는 노릇이고, (장정일도 매일 쓰지는 않았다) 쓰는 시간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독서일기는 정기적이고 꾸준할 것이다. 책은 무한정 쌓여있기에 그리고 시간도 많기에…. 제목을 '독서일기' 대신 '소슬바람의 평화로운 책읽기'라고 붙인 이유는 매일 올리는 짤막한 독서평의 형식이 아닌 일주일에 1회씩 올리는 개인적인 독서 감상문의 형식을 띨 것이기에 '일기'란 말이 적합하지 않아 '책읽기'라는 말을 넣었다. '소슬바람'은 내가 컴퓨터 통신을 시작하던 시절부터 쓰던 닉네임인데 온라인상의 정체성이 담겨있다.

'평화로운'을 붙인 까닭은 최근 도법스님의 생명평화탁발순례단과 함께 하며 평화를 듣는 귀가 열린 것을 기념하기 위함이다. 그동안 '평화'란 단어를 수없이 읽고 말하고 보고 듣고 썼지만, 진정 평화가 무엇인지 알지는 못했다. 이제 조금씩 손에 잡히는 '평화'에 대한 감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평화로운 책읽기'는 '평화롭게 책을 읽는다'는 뜻도 되겠고, '평화가 담긴 책을 읽는다'는 뜻도 되겠다.

'소슬바람의 평화로운 책읽기'는 한반도의 평화가 금이 가기 시작했던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흘 밤낮을 가슴 아파하며 읽은 책이 있다. 지친 활동가에게 한줄기 청량한 바람과도 같았던 이 책, 궁금하면 내일 접속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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