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1935', 혁명가 이재유를 기억하라

[소슬바람의 평화로운 책읽기①] 안재성의 소설 <경성 트로이카>

등록 2006.08.12 09:14수정 2006.08.16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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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독서일기'의 첫 작품은 안재성의 소설 <경성 트로이카>(2004, 사회평론)다.

이 책은 1930년대 젊은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고난에 찬 삶과 죽음을 담담하고 차분한 필체로 전하고 있다. 격동하던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실존인물 이재유와 그를 중심으로 모인 수많은 경성 트로이카 활동가들이 명멸하고 있었다.


<경성 트로이카>의 표지
<경성 트로이카>의 표지사회평론
나는 요즘 KBS에서 방영하는 주말 드라마 <서울 1945>를 열렬하게 시청하고 있다. 주말엔 이 드라마가 시작되는 밤 9시 30분을 중심으로 시곗바늘이 돌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헌영·김삼룡·여운형 등 실존했던 혁명가들을 탤런트들이 버젓이 연기하고 있으니, 시대가 정말 많이 달라졌다. 해방공간의 '왼쪽' 사람들을 그린 드라마가 한국방송공사에서 만들어지리라고 꿈에라도 기대했겠는가.

극중 인물 최운혁은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 사무국장이었던 이강국을 모델로 했다고 알려졌다.

그는 일본강점기에 독일 유학까지 다녀온 출중한 이론가였는데, 남한에서는 혁명가 이강국보다는 '여간첩' 김수임의 연인 이강국으로 더 잘 알려졌다. 김수임은 이강국을 숨겨주고 월북을 도왔다는 이유로 간첩으로 몰려 이승만 정권 때 사형당했다. 원로 수필가 전숙희는 이들의 안타까운 사랑을 소설로 그리기도 했다(<사랑이 그녀를 쏘았다>, 2002, 정우사).

이강국과 김수임처럼 조국의 해방을 꿈꾸며 1930년대 식민지 서울 거리를 활보하던 젊은이들이 있다. 이들만큼이나 열정적인 삶을 살았고, 이들만큼이나 비극적인 운명을 맞았던 그들, 바로 이재유와 경성 트로이카.

이재유. 이름은 아주 오래전에 들어봤다. 대학 2학년 때니까 1993년이던가. 학술서 형식의 <이재유 연구>(김경일, 창비, 1993)가 단행본으로 출간됐을 때, 학생조직에 있던 나의 동기가 그 책을 읽는 걸 보았다. 나도 읽어 봐야지 하면서 읽지 못했다. 그 후 책이 절판돼 이재유를 만날 기회가 영영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운 좋게도 소설 <경성 트로이카>로 이재유를 만날 수 있었다.


소설 <경성트로이카>는 어떻게 나왔나

나는 짧지 않은 서문을 읽고 '열정'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나보다 먼저 '열정'에 꽁꽁 묶인 건 작가 안재성씨였고 난 그 열정에 감염됐다는 게 정확한 말일 게다.


작가의 이력도 눈에 띈다. 그는 80년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구속과 동시에 대학에서 제적당한 후 20년간 노동운동을 하다가, 지금은 낙향하여 경기도에서 농사지으며 살고 있다. 농한기엔 굴착기 운전을 하며 가계를 꾸리는 가난한 소설가다.

그를 '열정'의 바다로 이끈 것은 인사동 작은 화랑의 조각 작품이었다.

사실적이면서도 애끓는 비통함을 주는,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것 같은 여인상을 보면서 그는 알 수 없는 강렬한 감정에 휩싸인다. 작가는 그 조각상의 주인공을 만나면서 잊힌 역사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1930년대 경성 거리를 활보하던' 경성 트로이카를 건져내게 된다.

작가는 경성 트로이카의 마지막 생존자이자 조각상의 주인공인 이효정 할머니를 만나면서 그 때의 진실을 복원하기로 마음먹는다. 마산에 살고 있는 이효정 할머니를 인터뷰하고, <이재유 연구>를 쓴 김경일 교수를 찾아가고, 서울대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일본강점기 사상범들의 재판 기록을 샅샅이 뒤지며, 퍼즐을 맞추듯 경성 트로이카 조직의 그림을 완성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사회주의 사상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하다 이름도 명예도 사라져버린 '유령'들과의 약속을 지키게 된다. 그 '유령'들과의 약속의 소산이 바로 이 소설, <경성 트로이카>다.

이야기는 개마고원 화전민의 아들로 태어난 이재유가 집을 떠나 삼수갑산의 고산준령을 넘고 넘어 경성으로 오는 긴 여정으로 시작된다. 이재유는 당시 사람들보다 키가 크고, 갸름한 얼굴형에 미소가 환한 미남이었다고 한다. 사진을 보니 가수 비와 조금 닮은 것도 같다.

이재유가 서울에 와 정착한 곳은 농촌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빈민가가 형성된 토막촌이다. 토막은 건축 자재가 없어 땅을 파서 벽을 대신하고 지붕은 거적이나 짚으로 대충 덮은 집을 말한다. 어린 이재유는 그 토막에서 혼자 살면서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입학하지만, 학비를 조달할 수 없어 끝까지 마칠 수 없었다.

일본에 건너간 그는 70번이나 경찰에 체포되는 기록을 세운다. 일제는 그를 관부연락선에 태워 조선으로 압송한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이재유는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함께 할 운명적 동지를 만난다. 훗날 그와 함께 경성 트로이카의 지도력이 된 이현상과 김삼룡이 그들이다.

식자층 위주로 구성되었다가 하릴없이 무너진 조선공산당을 이재유는 노동자를 기반으로 탄탄하게 재건하려는 꿈을 품는다. 그리하여 그 전위조직으로 1933년 경성 트로이카를 결성한다.

1933년 경성에서 만난 젊은 혁명가들

1937년 12월 이재유가 체포되자, 각 신문사들은 호외를 발간했다.
1937년 12월 이재유가 체포되자, 각 신문사들은 호외를 발간했다.
이재유는 낭만과 인간미를 지닌 혁명가이면서 뛰어난 이론가이기도 했고, 천부적인 조직가였다. 무엇보다 그는 노동자였다. 그래서 공장노동이든 막노동이든 농사든 거뜬히 해내며 활동한다.

경성 트로이카가 흥미로운 것은 '트로이카'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권력이 1인에게 집중되지 않고 조직원들이 민주적으로 조직을 운영했다는 점이다. 그와 더불어 쟁쟁한 여성 운동가를 많이 키워냈다는 점이다.

경성 트로이카에는 남성과 비슷한 수의 여성 운동가들이 활동했다. 그동안 나는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 중에 여성이 없었을까 늘 궁금했다. 1996년 창비에서 나온 <사회주의 인명사전>을 보면, 가뭄에 콩나듯 여성 운동가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경성 트로이카>에서는 많은 여성 활동가들의 이름뿐 아니라 출신과 성격과 활동상이 자세하게 나와 있다.

작가에게 이재유와 경성 트로이카에 대한 소중한 이야기를 해주었을 이효정을 비롯하여, 김월옥·박진홍·심계월·유순희·이병희·이순금·이종희·이인행·초영·허마리아 등의 여성운동가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활동상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활발했다.

일본강점기 노동운동의 중심지였던 원산과 함흥은 중공업 지역이라 남성 노동자들이 많았던 반면에, 경성과 인천 등 경인지역의 공장은 경공업 위주였으므로 여성 노동자들이 많았다. 값싼 임금에 퇴사마저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던 어린 여공들을 조직하려면 비슷한 나이의 여성 활동가들이 필요했다.

광주학생봉기를 겪으며 동맹휴학을 하고 일제에 항거하던 여학생들은 여학교 졸업 후 바로 공장으로 위장 취업해 들어갔다. 이들은 이재유의 지도를 받으며 여성 노동자들을 조직해나갔고, 파업을 이끌었다.

이재유와 경성 트로이카는 8시간 노동, 국민연금과 의료보험 실시, 아동 노동금지 등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강령을 선택했다. 이같은 의제들이 현재 모두 실현된 것을 볼 때 놀라운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다.

이재유의 연인, 혁명가 '박진홍'

여성 활동가 중에 '박진홍'이란 여자가 있다. 경성 트로이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1940년대 전쟁의 광풍 속에 한반도 전체가 일본의 병참기지가 되어 모든 운동세력이 힘을 잃고 와해하고 잠적할 무렵에도 경성 트로이카의 부활을 꾀했던, 경성 트로이카 계열의 마지막 지도자였던 박진홍 말이다.

이효정의 증언에 따르면, 박진홍은 좌우익을 통틀어 가장 똑똑한 여성이었다고 한다. 수재보다는 천재에 가까웠다고 사람들은 평가했다. 성격이 외향적이라 무척 쾌활하였다고 한다.

박진홍은 장차 평화시대가 오면 소설가가 되려고 하던 문학처녀였다. 일본경찰에 쫓길 때에도 문학작품의 한 장면에 빗대어 말하길 좋아했다. 그런 박진홍과 이재유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최운혁과 김해경처럼, 이강국과 김수임처럼 그들도 시대의 아픔을 함께하며 고단한 청춘을 서로에게 기댔다.

경성 트로이카의 동지들은 1940년대 운동의 암흑기 속에서도 살아남아 1945년 드디어 해방을 맞이한다. 일제 경찰에 쫓기며 투옥과 출옥을 반복하고, 고문과 가난을 견디던 사회주의자들에게 해방공간은 비로소 꿈을 펼칠 수 있는 무대였다.

해방된 조국에서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는 일, 얼마나 가슴 벅찼겠는가. 그들은 건국준비로 밤낮없이 일했다. 박진홍도 이순금도, 이관술·이현상·김삼룡·김태준도 집에 자주 못 들어갈 정도로 바쁘게 일했다고 한다. 오랜 기간 지하 활동가였던 그들은 이제 자유롭게 경성 거리를 활보하며 공식적인 단체의 사무실에 출근하면서 일할 수 있었다.

큰 사진 이재유. 맨위부터 박진홍, 이순금, 이효정, 아래 왼쪽부터 이현상, 김삼룡, 이관술.
큰 사진 이재유. 맨위부터 박진홍, 이순금, 이효정, 아래 왼쪽부터 이현상, 김삼룡, 이관술.
그러나 평화로운 세월은 길지 않았다. 자유의 공기를 마신 것은 채 1년도 안 되었다. 1945년 9월부터 1946년 6월 정판사 사건으로 줄줄이 구속되기 전까지 꼭 10개월이었다. 남한에 진주한 미군정은 조선 공산당 활동을 불법으로 간주하고 당원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일본강점기보다 더 참혹한 현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방은 왔지만...

일본은 사상범들에게 3~5년 정도의 징역형을 선고한 데 비해,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무기징역 혹은 사형을 선고했다. 독립운동으로 젊음을 바친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교수대였던 것이다.

이관술·이주하·김삼룡·김태준이 남한의 이승만에게 죽임을 당했고, 박헌영·이승엽·이강국은 북조선의 김일성에게 죽임을 당한다. 마음씨좋은 아저씨 같았던 김삼룡이 친일경찰의 고문 틀에 묶여 심정을 토로하는 장면은 참으로 슬프다

"일정 때 우리가 놈들의 힘을 빼앗으려고 싸우는 동안 당신들은 자신들의 힘을 키웠소. 우리가 학업과 생업을 포기하고 공장과 감옥을 떠도는 동안 당신들은 국가를 운영할 기술을 배우고 사람 고용할 돈을 모았소. 일제가 물러나고 보니 우리 같은 사람은 쓸모가 없고, 당신같은 사람 사람들이 이 나라를 지배하는구려. 참 허무한 일이오."

마지막까지 경성 트로이카를 지켰던 '경성콤그룹'의 이관술은 정판사 사건으로 무기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 갇혀 있다가 6·25 직후 처형당했다. 아마도 대전의 산내학살 사건 때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닐까 한다. 박진홍은 이효정에게 북으로 가겠다는 말을 남긴 것을 마지막으로 행방을 알 수 없는 인물이 됐다. 북한의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은 듯하다. 전쟁 때 죽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체포, 고문, 사형... 이름없이 스러지다

이 책의 주인공 이재유의 투옥으로 박진홍과의 행복했던 결혼 생활은 산산이 깨어지게 된다. 그리고 신출귀몰하게 유치장을 탈출한다. 그는 박진홍이 그리워 서울을 벗어나지 못하고 근교에서 농사지으며 2년간 숨어 살았다. 박진홍이 옥중에서 아들을 출산했지만 만나러 가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신문에서 오린 흐릿한 아들의 사진을 오래오래 바라보던 이재유.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우울한 얼굴로 술을 마시던 이재유. 경성콤그룹을 만들고 조직을 다시 규합하다가 투옥된 뒤 재판정에서 당당하고 기지 넘치는 항변을 하던 이재유.

그 이재유는 1937년 다시 체포되어 8년 동안 독방에 갇혀 있었다. 가족 이외에는 면회도 허락되지 않았다. 32세의 젊은 혁명가는 고문 후유증으로 서서히 죽어갔다. 빛나는 지성과 따뜻한 감성, 환한 미소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던 부지런한 손발이 쇠사슬에 묶여 쇠약해져 갔다.

그리고 40세 되던 해인 1944년에 숨을 거두었다. 폐병과 각기병,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의 육신은 병감에 옮겨진 지 얼마 안 되어 지켜보는 이도 없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이재유는 해방 1년 전에 죽었다. 해방 1년 후엔 그의 동지들이 죽어가기 시작했다. 6·25때 보도연맹 가입자 학살로 사회주의 사상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모조리 죽었다.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은 그렇게 씨가 말랐다. 완전 궤멸이었다.

순수한 열정과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지닌 젊은 그들, 1930년대와 해방공간의 사회주의자들은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고 폄하되고 고난을 당하며 기억해 주는 이 없이 사라졌다. 해방공간에서 조국이 분단될지도 모른다는 고뇌로 밤을 지새우던 그들의 어깨 위에 얼마나 무거운 짐이 지워져 있었던가.

60여년 만의 명예회복, 이재유 훈장의 의미

지난 8일 국가보훈처는 올해 광복 61주년을 맞아 일제하 좌익계열 독립운동가를 포함한 313명의 애국지사를 포상한다고 발표했다. 놀랍게도 그 명단에 이재유와 이효정의 이름이 있었다. 이재유는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이효정은 건국포장 포상이다.

정말 기쁜 일이다. 60년 후에야 회복되는 그들의 명예. 감개무량하다. 이제야 대한민국이 서서히 양쪽 다리로 땅을 딛고서는 것일까.

해방공간에서 좌익 활동을 했던 사람들까지도 명예회복되려면, 골 깊은 좌우갈등이 해소되는 시대까지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 한다. 좌우 갈등의 해소. 이것은 모든 사람의 소원처럼 평화롭게 통일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효정 할머니가 여든을 넘어 쓴 시를 읽어본다. 젊은 시절의 뜨거운 마음이 그대로 녹아있다. 참 고결하다.

내 영혼 떠나버린 빈 껍질
활활 불태워
한 점 재라도 남기기 싫은 심정이지만
이 세상 어디에라도
쓰일 데가 있다면
꼭 쓰일 데가 있다면
주저없이 바치리라
먼 젊음이 이미 다짐해둔
마음의 약속이었느니

- 이효정 '약속'

경성 트로이카 - 1930년대 경성 거리를 누비던 그들이 되살아온다

안재성 지음,
사회평론,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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