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님의 수라를 목숨 걸고 지켜라

[이야기가 있는 문화기행 41] 정조대왕 화성행행반차도 ②

등록 2006.08.15 15:55수정 2006.08.16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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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우의정 채재공이 임시직 총리대신 신분으로 앞장서 가고 있다

우의정 채재공이 임시직 총리대신 신분으로 앞장서 가고 있다 ⓒ 이정근

화성(華城). 곧 수원은 경기감사 관할 지역이다. 임금이 자기 지역에 행차하시니 지방관으로서 마땅히 앞장 서야 할 터. 당시 경기감사 서유방이 앞장서고 행사를 총괄하는 우의정 채제공이 임시직 총리대신이 되어 녹사와 장교의 호위를 받으며 말을 타고 가고 있다. 그 뒤에 활을 멘 84명의 마병(馬兵)과 총을 멘 보군들이 북소리에 발맞추어 뒤따르고 있다.

행렬 맨 앞에 경기감사 서유방이 앞장서고 그 뒤에 우의정 채제공이


이어 훈련도감 책임자인 이경무가 칼을 멘 군뢰를 앞세우고 임금의 옥쇄와 도장을 실은 인마(印馬)와 임금의 갑옷을 실은 갑마(甲馬)를 호위하며 뒤따르고 있다.

임금의 갑옷은 훈련도감에서 특별히 선발한 무예청 군인들로 하여금 삼엄하게 호위하게 하고 있다. 또한 갑옷은 호랑이 가죽으로 싼 것이 인상적이다.

a 인마와 갑마를 앞세우고 경기감사가 뒤따르고 있다.

인마와 갑마를 앞세우고 경기감사가 뒤따르고 있다. ⓒ 이정근

그 뒤에 금군별장이 29명의 금군을 거느리고 뒤따르고 또 그 뒤로 기수단이 보무도 당당하게 깃발을 휘날리며 행진하고 있다. 요즈음 군대행진에도 기수단이 앞장서지만 그 당시도 그랬다.

이어 임금의 어보를 실은 어보마와 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선전관과 유서자비, 그리고 임금 옆에서 칼을 차고 호위하는 별운검이 50명의 별초군인들을 이끌고 있으며 수어사인 심이지가 뒤따른다.

a 금군별장

금군별장 ⓒ 이정근

이제 정조대왕이 타는 가마 정가교(正駕轎)가 나온다. 그러나 이날 행사에서 정조대왕은 가마를 타지 않고 혜경궁 홍씨 가마 뒤에서 말을 타고 간다. 정가교 뒤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독기와 용기(龍旗)가 뒤따른다.


앞 기수단 행렬에도 악대가 있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타악기 현악기 관악기로 편성된 악대가 나온다. 51명의 악대가 말을 타고 가면서 대각, 나팔, 북, 점자, 자바라, 해금, 피리, 관, 장고, 나각, 정 등을 연주하며 용기의 뒤를 따른다.

a 수라간 장금이와 내의원 의녀들이 얼굴을 가린 채 말을 타고 가고 있다.

수라간 장금이와 내의원 의녀들이 얼굴을 가린 채 말을 타고 가고 있다. ⓒ 이정근

사대부들의 행차에 여자들도 끼어 있다. 수라간 장금이와 내의원 내관으로 참여한 의녀들이다. 또한 혜경궁홍씨와 두 군주님을 모실 나인들이다. 남자 마부가 끄는 말을 타고 당당하게 가고 있다.


사대부들의 행차에 여자들도 말 타고 당당히 참여

여성총리와 여자 대통령이 탄생하는 현대에는 대수롭지 않지만 그 당시로는 충격적인 일이다. 하지만 장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부녀자들의 정치참여와 사회활동을 철저히 봉쇄했던 조선시대 유교사회에서 아주 파격적인 모습이다.

악대 뒤에 수많은 행렬과 깃대에 이어 수라가자가 따른다. 수라가자(水刺架子). 현대인들에게는 낯선 낱말이다. 한마디로 설명하면 음식물을 실은 수레다.

이틀 걸리는 행차길 점심과 휴식시간에 임금님이 먹을 간식거리를 실은 수레다. 현대적으로 표현하면 이동 뷔페 식당차랄까. 여기에서 우리는 수라가자에 주목해야 한다.

a 수라가자. 행차도중 임금이 먹을 음식을 실은 수레다. 

수라가자. 행차도중 임금이 먹을 음식을 실은 수레다.  ⓒ 이정근

무슨 첩보가 들어와서일까? 수라가자를 홍수영이 호위하고 있다. 장안에 쫙 퍼진 노량진 나루터 배다리 수장설에 이어 독살설을 구중궁궐이라고 모를 리 없다.

"수구세력이 임금이 먹는 음식에 독을 타 왕을 독살하려 한다"는 소문이 백성들의 입을 통하여 도성에 소리 없이 퍼졌다. 궁녀로부터 소문을 전해들은 혜경궁 홍씨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뜬소문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혜경궁 홍씨로 하여금 대책을 마련하게 했다.

임금님의 수라를 목숨 걸고 지켜라

홍수영이 누구인가? 혜경궁 홍씨의 친정식구다. 어려울 때 믿을 수 있는 건 친정식구밖에 없나보다. 28살 세자빈으로 정쟁의 회오리 속에 지아비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어가는 것을 목격해야 했던 혜경궁 홍씨는 권력의 속성과 냉엄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때문에 정리낭정으로 있던 친정식구 홍수영으로 하여금 수라가자를 목숨 걸고 호위하게 했던 것이다.

a 자궁가교.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홍씨가 탄 가마.

자궁가교.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홍씨가 탄 가마. ⓒ 이정근

뒤이어 이날 행차의 중심인물 혜경궁 홍씨가 타고 가는 자궁가교(慈宮駕轎)와 정조대왕이 타고 가는 말 좌마(座馬)가 뒤따른다. 좌마 앞뒤에는 무장하지 않은 무예청 별감과 위내사령이 빈틈없이 에워싸고 있다.

불길한 첩보도 정보이니만큼 빈틈없는 호위다. 어머니의 가마를 앞세우고 뒤 따라 가는 모습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극진히 모시는 정조대왕의 효심이 엿보인다.

임금이 말에서 내려 안부를 물어

창덕궁을 떠나 첫날밤을 시흥행궁에서 묵은 정조 일행은 이튿날(2월10일) 아침 일찍 화성을 향하여 출발했다. 해가 지기 전 현륭원에 당도해야 했기 때문이다. 사근행군에서 점심 수라를 먹고 화성으로 향할 무렵 비가 많이 내렸다.

혜경궁 홍씨의 가마를 담당한 군졸들이 진창에 미끄러지며 비틀거렸다. 이에 깜짝 놀란 정조는 미끄럽고 험한 길이 나올 때 마다 말에서 내려 혜경궁 홍씨가 탄 가마로 나아가 안부를 물었다. 지극한 효심이다.

a 좌마. 정조대왕이 탄 말이다. 하지만 얼굴이 없다. 

좌마. 정조대왕이 탄 말이다. 하지만 얼굴이 없다.  ⓒ 이정근

정조는 군졸이 양산을 떠받치고 있는 좌마위에 올라 혜경궁 홍씨를 뒤따르고 있다. 하지만 좌마위에 앉아 있어야 할 대왕의 얼굴이 없다. 만백성의 어버이인 임금님의 얼굴은 함부로 그릴 수 없는 게 당시의 풍속이었다.

어진을 그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리지 못했다. 똑바로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불경죄로 다스리는 것이 그 당시의 법도였다. 때문에 교의만 그려져 있을 뿐 대왕의 얼굴이 없다.

a 군주쌍교. 정조의 두 누이동생 청연군주와 청선군주가 탄 가마. 

군주쌍교. 정조의 두 누이동생 청연군주와 청선군주가 탄 가마.  ⓒ 이정근

대왕의 뒤에는 정조의 두 누이이며 혜경궁 홍씨의 두 딸 청연군주(淸衍君主)와 청선군주(淸璿君主) 가마가 뒤따른다. 이 행차에 정조대왕비(妃) 효의왕후 김씨는 참가하지 않았다. 뒤이어 96인의 장용영 마작대(壯勇營 馬作隊)가 뒤따른다. 여기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장용영 마작대다.

장용영(壯勇營)은 정조가 장용위를 확대 개편하여 새로 만든 친위부대다. 조선 팔도에서 가장 날쌘 젊은이를 선발하여 일당백의 무예를 연마한 특수 부대다. 정조를 음해하려는 세력을 최전방에서 분쇄하라는 특명을 부여받은 부대다.

a 장용원 마작대 군졸들

장용원 마작대 군졸들 ⓒ 이정근

이 부대가 피맛골 저잣거리에 깔아놓은 안테나에 정조를 음해하려는 수구세력의 음모가 포착되었다. 피맛골이 어디인가? 지금의 광화문 교보문고 뒤에서 종로 3가에 이르는 뒷골목이다. 피맛골이라 함은 보기 싫은 관료들의 말을 피하여 다니는 골목길을 이르는 말이다.

수구세력에 빌붙어 관직에 나아갔던 퇴출 선비들이 불평불만을 털어놓으며 한 잔 술로 세상을 푸념하는 주막거리다.

사전에 박살내느냐? 사후에 일망타진 하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젊은것들이 뭘 안다고 설쳐대는지? 나, 원 참.그 꼴 보기 싫어 피맛골로 다니누마."
"임금은 자기하고 생각이 같은 사람만 쓰려고 해서 탈이야."
"세상이 뒤집히든지 해야지… 세상 돌아가는 꼴이라고는…."

당쟁 없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려는 정조대왕의 탕평책을 평가절하하고 육조거리를 바쁘게 왕래하는 신진세력에게 아니꼬운 조소를 보내고 화려했던 옛 영화를 회상하며 옛날이 다시 오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아지트요 배설구였다.

여기에서 건져낸 첩보가 짝퉁은 아니렷다. 특급 정보를 손에 쥔 장용원 마작대는 음모의 무리를 사전에 박살내느냐? 덫을 놓아 사후에 일망타진하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덧붙이는 글 | 마지막 1회가 남아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마지막 1회가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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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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