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악사와 관객들은 하나

안양 예술공원의 악사 한상섭씨

등록 2006.08.16 17:04수정 2006.08.16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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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빠빠 빱."
"짜라짜라짜짜 잘 가요, 안녕 내 사랑."

a 공연중인 한상섭(좌)씨와 홍종명(우)씨.

공연중인 한상섭(좌)씨와 홍종명(우)씨. ⓒ 우리안양

고향집 빨래줄에 앉아 노래하는 제비처럼, 안양 예술공원 공영 주차장 화단은 길게 앉은 관객들로 술렁거린다. 왕복 차선을 가운데 두고 혼신의 힘을 쏟아 내는 한상섭씨와 자원봉사에 나선 홍종명씨의 색소폰과 트럼펫 연주가 눈길을 끄는 일요일이다.


아름다운 선율에 취한 관객들은 연신 "조오타!"를 외치며 한 곡이 끝날 때마다 휘파람과 박수로 화답한다. 하산하는 등반 객의 발길이 끈임 없이 이어지고, 갑자기 관중석에서 늙수레한 남성이 벌떡 일어났다.

부채를 활짝 펴며 엉겨붙는 춤으로 합류를 유인하기 시작했다. 익살스런 행동에 더러는 틈새를 비집고 앉기도 하고, 미소로 슬쩍 피하기도 했다. 건너편에는 중절모를 쓴 중년 남성이 악단 앞에서 온몸을 비틀더니 연탄불에 오징어 굽는 시늉을 한다. 유머 가득한 개다리춤이다.

관객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분위기에 취해서 더덩실 춤을 추거나 힘차게 노래를 따라 부른다. 어깨를 들썩이며 손으로 무릎을 치고 발을 굴러 박자를 맞추기도 한다. 인파가 몰리는 틈새에는 반짝 과일 행상까지 등장, 관객들은 자두며 참외로 입맛을 다시기도 하고 삶은 옥수수를 반도막 뚝 분질러 옆 사람과 정을 나눈다.

광명에서 온 60대 할머니는 "어이, 기자 양반! 지금은 거리 음악이 좋아서 친구들과 매주일 오지만, 옛날 유원지였을 때는 여기가 야바위꾼들이 물방개 가지고 놀던 장소요"라며 추억을 부른다.

붕어빵처럼 닮은 안양1동의 최현규, 오정순 50대 부부는 "우리가 신명나게 호응 해 줘야 연주하시는 분도 힘이 나잖아요"라며 '해변의 여인'을 소리 높여 열창한다.


비산동의 정선택(53세)씨는 "여긴 서울의 명산 못지 않게 휴일에는 등산 인파가 많아요. 이 공연이 외국처럼 거리문화로 자리 잡도록, 비오는 날이나 강한 햇볕을 피할 수 있게 차양막이 있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한다.

a 관중석에서는 익살스런 묘기가 펼쳐지고...

관중석에서는 익살스런 묘기가 펼쳐지고... ⓒ 김재경

6시가 넘어 공연이 끝났지만, 관중들은 큰 소리로 제각기 "사장님! 아저씨! 오빠! 앵콜!"을 외친다.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다시 이어지는 연주는 잠시 쉴 틈조차 없었다.


한상섭(42세)씨를 만나기 위해 그가 운영하는 '에베레스트8850' 등산의류 전문점을 찾았다. 허름한 15평 가게 안은 각종 스포츠 의류와 가방 모자 등이 오밀조밀하게 진열되어 있다. 연주를 끝내고 가게에서 만난 한씨는 "비포장 도로였던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즐겨 찾던 명소가 지금의 예술공원"이라고 했다.

음악에 관심이 많던 그는 고교 때부터 밴드부, 대학은 보컬, 군대에서는 군악대로 꾸준히 악기를 다루게 되었다고. 그 결과, 지금은 안산의 오케스트라 단원이다.

유원지에서 탈바꿈한 예술공원을 공연으로 활성화시키고 싶어 가슴이 설레었기에,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그의 연주는 멈출 줄을 몰랐다.

가게 인테리어 비용으로 앰프와 스피커, 반주기를 구입 매주 일요일이나 공휴일이면 어김없이 가게 앞에서 색소폰을 불어 온지 4년째다. 혹한에 악기가 얼어서 음질이 떨어져도 공연을 쉬지 못하는 것은 관객과의 무언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근동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알려지며 오후 4시쯤이면 300여명의 인파가 모이기도 한다.

관객들의 다수는 등반하고 하산 길에 합류하는 부류로서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 주변에서는 먹을거리 골목인 이곳에 옷가게가 가당키나 하냐고 도리질을 했고, 매장을 아르바이트 직원에게 맡기고 공연하는 한씨를 적잖이 걱정했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여들며 매상이 오르자, 이제는 "참 좋은 구상이었다"고 격려까지 한다. 이렇게 시작한 사업이 안양에 이어 부산, 대구, 산본까지 매장이 늘어나며 이곳에도 속속 의류가게가 생기는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한씨는 체력을 다지기 위해 틈틈이 등산을 즐긴다. 몸도 풀 겸 매일 2시간씩 악기를 다루는 것이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다. 집이나 가게에서 늘 그림자처럼 함께 하는 악기는 부인보다 더 가까운 애인이다.

지난 현충일에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가신 님들을 생각하며 경쾌한 신청곡은 지양해 달라"며 분위기를 유도했다고. 이제는 더 이상 나 홀로 공연이 아니다.

더불어 공연에 합류하겠다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신림동에서 온 정상운(70세)씨와 장현종(55세)씨는 "등반 길에 공연을 지켜만 보다가 기타와 하모니카로 처음 합류하게 되었다"고 한다.

정씨는 "음악을 좋아해서 연주 팀에 합류했는데 화음 맞추기가 어려워요"라며 건강이 허락하는 한 연주 팀에 합류하고 싶다고 말한다. 관객 중에는 노래를 하겠다며 신청하는 사람이 많을 때는 50여 명이나 된다. 누군 시키고 누군 안 시키면 형평성을 잃게 될까봐 거절하기에 때로는 진땀을 빼기도 했다고.

음악이 좋아서 공연을 했을 뿐인데 관객들은 음료수에 더러 팁을 주기도 한다. 극구 사양해 보았지만, "적어서 그러냐"며 역정을 낼 때는 속수무책이다. 노인들의 쌈지 돈부터 지폐까지 20여 만원이 될 때도 있었다. 공연이 끝나면 종종 자원봉사자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도 한씨의 몫이다.

지금은 중단했지만, 부산에서도 2년 동안 공연을 했었다고. 석수시장의 '한 여름밤의 음악회'나 아파트단지 행사 때도 무료 공연을 했다는 한씨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 초청이 있으면 기꺼이 응하겠다"며 자원봉사의 끈을 꼭 부여잡았다.

덧붙이는 글 | "연합교육신문"에도 송부합니다.

덧붙이는 글 "연합교육신문"에도 송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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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 인간 냄새나는 진솔한 삶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현재,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원이며 (사) 한국편지가족 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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