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벌에도 '시어머니 몫'이 있다

[섬이야기43]서둘러 일해야 산다는 '서둘이 마을', 고군산군도의 무녀도

등록 2006.08.16 15:08수정 2006.08.16 15:43
0
원고료로 응원
길을 지나다 마을입구에 마을 표지석을 보고 가끔 차에서 내려 이름 한번 쳐다보고 마을을 바라보는 때가 있다. 그리고 '거 참 이름 한번 잘 지었네'라며 중얼거리기도 한다. 그렇다고 지명이나 그 유래에 탁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흔히 보는 이름이지만 정겨운 마을 이름들도 있다. 산골에는 노루가 지나다닌다 해서 '노루목', 싸리나무가 많다하여 '싸리재'. 그 외에도 '장터', '절골' 등이 있는가 하면, 섬에는 소나무가 많다고 해서 '솔섬', 밤나무가 많아 '밤섬', 깊이 만입되어 생긴 포구마을 '깊은금(기프그미)', 섬이 누워있다 하여 '눈섬'도 있다.


a 무녀도의 모개미 마을.

무녀도의 모개미 마을. ⓒ 김준

a 무녀도 서둘이 마을.

무녀도 서둘이 마을. ⓒ 김준

이런 아름다운 이름들이 일제강점기에 한자 지명으로 바뀌면서 어처구니없는 이름으로 변하기도 했다. 고군산군도의 어느 섬은 '밤(栗)섬'이 변해서 '야(夜)미도'로, 영광의 어느 섬은 '누운섬'이 '눈섬'으로 불리자, 전혀 의미가 다른 '설(雪, 눈설)도'가 되었다. 조상 대대로 불러온 이름들은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환경과 생태 등 다양한 특징들 속에서 정해졌다.

고군산군도의 아름다운 섬 '무녀도(巫女島)'의 이름에도 의미 있는 내력이 있다. 무녀도라는 지명이 주산인 무녀봉 앞에 장구모양의 장구섬과 옆에 술잔 모양의 섬이 있어 무당이 굿을 할 때 너울너울 춤을 추는 모습과 같아서 지어진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무녀가 아니라 '흥에 겨워 춤을 추는 모습'이 앞섬의 모습에 가장 잘 어울린다며 오히려 춤출무(舞)를 써야 어울린다고 주장하는 주민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보다는 더 흥미를 끄는 것은 무녀도의 본래 이름이 '서둘이'였다는 것이다. 지금도 무녀도는 '서둘이(1구)'와 '모개미(2구)' 두 개의 마을이 있다. 이중 '서둘이'가 무녀도 본래의 명칭이라고 한다. 그 의미는 '열심히 서둘러 일해야 살 수 있다'는 뜻이라는 의미를 알게 되면 무릎을 칠만하다.

a 무녀도로 들어가는 다리에서 만나 콜택시, 이곳의 이동수단이다.

무녀도로 들어가는 다리에서 만나 콜택시, 이곳의 이동수단이다. ⓒ 김준

a

ⓒ 김준

갯벌에도 시어머니 몫이 있다

고군산군도에서 갯벌이 가장 발달한 곳이 무녀도다. 특히 이곳 갯벌에는 바지락과 굴이 많아 지금처럼 김 양식을 대규모로 하기 전에 집집마다 조개젓을 담아 팔았다. 장자도가 멸치액젓으로 유명하다면 무녀도는 조개젓이었다. 당시에는 바지락이 많아 특별한 규제를 하지 않고 맘대로 캘 수 있었지만 10여 년 전부터 마을에서 규제를 하고 있다.


바지락의 양과 상인들의 채취요구량에 맞춰 가구당 20여Kg 동이(그릇) 2∼3개로 제한하고 있다. 가구마다 작업에 참여하는 인원은 제한하지 않지만 채취량만은 엄격하게 제한한다. 한정된 바다자원을 지속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조치인 셈이다.

특히 이러한 규칙이 새만금사업 시작을 전후해서 마련된 점을 생각하면 그 의미가 더욱 커진다. 규칙도 예외가 있다. 만약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다면 한 동을 더 캘 수 있다. 이것이 시어머니 몫의 '효자동이'인 것이다. 평생을 갯일을 해온 시어머니 몫을 인정함으로서 갯살림하는 여성으로서 정체성을 갖는 것이다. 그렇지만 시아버지 몫은 없다. 그러고 보면 무녀도에서는 갯벌이 '곳간'과 다름없다. 집안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 곳간 열쇠를 꼭 쥐고 있는 시어머니를 연상할 수 있다.


이렇게 채취한 바지락은 동이마다 정해진 금액(1000원)을 떼어내 마을자금으로 모으고 있다. 가구당 허락된 바지락을 캐지 못하면 그만큼 가구수입이 줄어든다. 같은 날 작업을 해 판매하지만 공동작업 공동분배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녀도는 바지락 작업으로 한 사리(15일)에 50∼60여만 원, 한 달에 100여만 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무녀도에서 바지락 작업은 김 양식 다음으로 중요한 생업이다.

이곳 갯벌에는 바지락 외에도 굴이 많기 때문에 겨울철에 김 양식을 하지 않거나 일손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굴작업을 하기도 한다. 굴 채취는 특별하게 제한을 하지 않기 때문에 선유도의 다른 마을에서도 캐가고 있다.

a 바지락을 캐는 주민.

바지락을 캐는 주민. ⓒ 김준

군산의 유일한 염전 '무녀(舞女)염전'

무녀도는 서둘이 마을과 모개이 마을, 그리고 무녀봉 등 3개의 섬이 연결되어 형성된 섬이다. 무녀1구와 무녀2구를 연결하는 방조제사업이 1943년 시작해 1962년 완공되어 16만평이 간척되었다. 간척 이전 이곳은 작은 만을 이루어 좌측에 모래더미가 쌓여있고, 오른쪽에 저습지가 자리했다. 지금은 논과 저수지 그리고 습지와 염전으로 변하였다.

당시 군산에서 은행 다음으로 부자였다는 최현칠옹(작고, 아들 무녀도에 거주)이 500여 미터의 방조제를 7800만환(정부는 긴급통화조치를 통해 1962년 화폐단위를 '환'에서 '원'으로 바꾸면서 교환비율을 10:1로 교환비율로 결정했다)을 가지고 제방을 막았다.

초기에 15정, 즉 무녀도 1구에서 교회를 지나 큰 무녀봉으로 가는 갯벌을 막아 작은 규모의 염전을 만들 계획이었지만, 사업을 시작하면서 욕심을 부리고 말았다. 무녀 1구의 '언밭밑'에서 무녀2구로 들어가는 '장승백이'까지, 물살이 빠르고 펄도 깊이 빠지는 곳으로 규모를 변경했다.

이렇게 막힐 경우 만들어지는 땅은 모두 53정보로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많아진다. 대신에 애초의 계획했던 곳의 물길보다 막기가 더 어려워 많은 인력과 비용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방조제를 막다 3번 터지면서 자금 압박에 시달리게 됐고, 사채와 군장비를 지원 받아야 했다. 그래도 완공 못하고 레일을 깔고 인력을 동원한 끝에 3년만에 완공했다. 이 과정에서 최옹은 염전을 경영하지 못하고 사채업자에게 넘겨야 했고, 극히 일부만 운영할 수 있었다.

1960년대 초반에 서남해역의 염전업자들은 소금 생산이 수월치 않았다. 국가에서 수매하던 것을 중단하고, 공공연하게 정부에 판매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 특히 당시 이승만의 정권에서 전남·북 지역의 소금 자금이 야당의 정치자금으로 들어간다며 탄압을 심하게 했다. 결국 최옹은 염전 일부 지분을 30만원의 보상금을 받고 다른 염전과 함께 정부에 넘겨야 했다. 이후 염전은 방치되다가 일부는 주민들이 벼농사를 짓고, 일부는 다시 염전으로 살아났다. 그리고 농사를 짓겠다는 주민과 염전을 해야 한다는 주민 사이에서 어렵게 정부로부터 염전을 분양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a 무녀염전의 해넘이(염전을 운영하던 2004년 가을) .

무녀염전의 해넘이(염전을 운영하던 2004년 가을) . ⓒ 김준

a 소금생산이 중단된 무녀염전.

소금생산이 중단된 무녀염전. ⓒ 김준

1960년대 군산지역(옥구군 소재)의 염전은 옥구면 조선제염공사(김상근), 오식도염업사(김수창), 회현면에 동화염업사(조흥원)와 삼화염업사(최영훈), 신시도리에 고군산염업사(서재홍) 등이 있었다. 1964년의 옥구군지에는 지금의 무녀도 염전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1980년대 옥구군지에 옥구군에서 가장 큰 한국염전(고판남)을 비롯해 금홍염전, 옥구염전, 고군산염전, 무녀도염전과 함께 현재의 무녀염전의 전신으로 단양염전이 기록되어 있다.

새만금사업을 비롯한 정부의 소금시장 개방 대책의 일환으로 염전 감단 정책이 추진되면서 군산지역의 염전은 무녀염전만을 제외하고 모두 중단되거나 사라졌다. 무녀염전은 군산에서 유일한 염전이다. 이곳 20여 정의 염전에서는 5년 전까지 생산했다. 정부의 감단 정책으로 15정은 생산을 중단하고, 최근까지 5정 중 2정(6000평)만 소금을 생산했다.

하지만 이것도 인력과 운영자금의 어려움에 의해 중단하고 말았다. 다행스러운 것은 폐전이 아니라 언제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점이다. 이 염전은 지금도 수차를 돌려서 간수를 결정지로 운반하고 있다. 단지 무녀염전은 소금의 경제성만이 아니라 고군산군도의 소중한 문화와 관광자원으로서 가치가 있어 아쉬울 뿐이다.

a 꽃게를 비롯해 숭어 등을 잡는 자망은 손질하는 어민들.

꽃게를 비롯해 숭어 등을 잡는 자망은 손질하는 어민들. ⓒ 김준

새만금 사업으로 어장 잃어... 대체어장이 필요하다

무녀도는 양식과 어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다. 과거에 고군산군도의 일대에서 도미, 삼치, 갈치, 조기, 병치 등이 봄철에 많이 잡혔지만 지금은 주꾸미, 멸치, 우럭, 놀래미, 농어, 숭어, 아나고, 새우 등이 대신하고 있다. 가을철에 멸치와 꽃게, 겨울철에 해태양식을 하고 있다. 이외에도 무녀도는 갯벌이 발달해 바지락과 굴, 낙지잡이 등이 이루어진다. 특히 칠산바다의 중심으로 1960년대까지 인근 바다에서 많이 잡힌 조기와 갈치가 고갈되면서 큰 어장이 사라졌다.

이 무렵에 고군산군도에 새로운 생업 방식으로 '김 양식'이 들어왔다. 고군산군도에 김 양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나무를 쪼개서 만들었던 죽홍 등 전통적인 지주식 김 양식이 있었으며, 특히 무녀도에서 활발했다. 이런 탓에 다른 지역은 1990년대 인구가 정체 혹은 감소하는 경향을 보였지만 무녀도는 증가하는 현상을 보이기도 했다.

서둘이 마을의 경우 1970년대에만 해도 1가구당 10책(1책은 김발 2*4미터 10개를 말한다)으로 시작해 20∼30책으로 규모가 확대되었지만 더 이상 확대는 어장조건상 어려웠다. 이후 부류식 김 양식이 선보였고, 1980년대 후반 본격적으로 확산됐다. 여기에 '세트양식'이라는 새로운 대규모 김 양식이 결합되면서 500여 책에서 1500여 책의 대규모 양식이 이루어지고 있다.

김 양식이 시작되는 8∼9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 상시고용 인력을 채용하는데, 이들을 무녀도에서는 '선원'이라고 부른다. 김 양식이 바다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배를 타고 작업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과거 중선배 시절의 용어를 그대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a 김발을 설치하고 있는 무녀도 어민들.(2004. 가을)

김발을 설치하고 있는 무녀도 어민들.(2004. 가을) ⓒ 김준

a 모개미 마을 앞에 쌓여 있는 김 발 어구들.

모개미 마을 앞에 쌓여 있는 김 발 어구들. ⓒ 김준

선원은 직업소개소를 통해서 데려오며, 월급으로 100여만 원에 술과 담배, 숙식을 제공한다. 경험이 많은 책임자급은 30여만 원 정도 더 월급을 준다. 300책 정도는 선원 2명, 500여 책은 4명 정도가 필요하며, 1000여 책이 넘어가면 선원만 해도 7∼10여 명이 필요하다. 무녀도에는 호당 평균 3명 정도의 선원들이 있고, 김 양식 철에 유동인구만 해도 200여 명에 이른다.

무녀도의 바지락과 김 양식 어장은 새만금사업의 간접피해 지역에 포함되어 몇 천만원씩 보상을 받았다. 어촌계면허가 아닌 개인면허를 가지고 있는 어민들은 1∼2억의 보상금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도 예외 없이 보상금이 전업을 하거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밑천이 된 경우는 찾기 어렵다.

새만금사업으로 어장을 잃는 무녀도 사람들,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어 다시 어장에 나가지만 불안하다. 하루빨리 한정면허를 내주거나 대체어장을 마련해주길 원한다. 무녀도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바다와 갯벌에 기대어 서둘러 살아야 하는 모양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2. 2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3. 3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4. 4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5. 5 쿠데타 막다 옥살이, 63년 만에 무죄 받아든 아들의 한탄 쿠데타 막다 옥살이, 63년 만에 무죄 받아든 아들의 한탄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