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임 FBI 부국장이 폭로하는 백악관의 추악한 실상

마르크 뒤갱 <대통령을 갈아치우는 남자>

등록 2006.08.17 15:46수정 2006.08.18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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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유시민과 전여옥이(그 당시 아직 국회의원이 아니었다) 토론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탄핵 직후에 벌어졌던 SBS <이것이 여론이다>. 당시 아직 유명인사가 아니었던 노회찬도 참여하여 불꽃 튀는 설전을 벌였다.

일이 유난히 많았던 날이라 지쳐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끝날 때까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 시청했다. 이른 새벽, 프로그램이 끝났을 때 한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토론이, 특히 정치토론이 웬만한 개그 프로그램보다 훨씬 재미있다는 것.


어린 시절에는 정치 이야기가 나오면 텔레비전을 꺼버렸다. 어른들은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두 눈을 반짝이면서 열혈토론에 들어갔지만 어린 나는 도대체 뭐가 재밌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언제나 정치란 '어른'들의 상징 정도로만 여겨졌다. 그렇다면 정치토론을 개그콘서트보다 재미있게 보는 나는 이제 비로소 어른이 된 것일까.

성인에게 정치가 흥미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정치'라는 게임을 벌이는 그들 내면의 욕망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돈과 권력과 명성에 대한 욕망에 그럴듯한 사회적 명제를 입혀 열정적으로 게임에 임한다. 물론 사람에 따라 자신의 신념과 양심을 다소 첨가하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뉴스나 시사프로그램, 혹은 토론회를 통해 이들이 내세우는 말과 실제 속마음 사이의 간극을 적나라하게 지켜보면서 인간내면에 자리한 미로를 슬며시 엿보게 된다. 정치인이 아닌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의 입장이 되어 대리체험을 하면서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뛰어난 언변을 자랑하는 그들의 논리를 들으며 '말하는 법', '설득하는 법'의 전범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가장 재미있는 것은 정치인들끼리 관계를 형성하고 그 관계 안에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헤게모니의 흐름'을 보는 것이다.

<대통령을 갈아치우는 남자>
<대통령을 갈아치우는 남자>들녘
<대통령을 갈아치우는 남자>는 전여옥, 유시민, 노회찬 황금트리오가 출연했던 SBS <이것이 여론이다> 만큼 재미있는 책이다. 백악관 주인이 여덟 번이나 바뀌었던 48년 동안, FBI의 총수자리에 앉아 실제 미국 정치사를 쥐락펴락했던 실세 중의 실세 에드거 후버에 관한 실화소설.


후버의 연인이자 동료였던 클라이드 톨슨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소설가 마르크 뒤갱이 재구성한 미국 정가의 이야기로, 역대 대통령들의 숨겨진 비화와 스캔들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가장 적나라하게 정체를 드러내는 것은 미국인들에게 아직도 사랑받고 있는 신화같은 대통령 존 F. 케네디이다. 모든 미국인들의 사생활을 마음대로 도청하고 들여다볼 수 있었던 무소불위의 권력자 후버가 들추어낸 케네디의 모습은 추악함의 극치이다.


이기심과 충동, 동물과도 같은 성욕,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 대한 철저한 무시. 후버의 시선으로 본 케네디는 저급하고 추잡한 욕망의 동물에 불과했다. 그러면서도 텔레비젼이라는 매체에서 연기를 잘해서 오로지 이미지로만 버텼던 쓰레기같은 사람.

권력의 정점이라는 백악관 주인의 모습이 추할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였을 줄이야.

…그 발바리(로버트 케네디)가 쓰레기더미(마피아)를 파헤치려고 하니 우리가 협조해줘야지. 자기 어머니(케네디의 모친)가 그 쓰레기 농축액으로 만든 젖을 먹였다는 걸 깨달을 때까지. 클라이드, 이참에 본격적인 수사에 들어가야겠어. 이번 기회에 마피아 조직에 대해 낱낱이 알아놔야지. 하지만 나를 이렇게 만든 자들은 모두 자기들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몰라. 그들은 자네와 내가 부메랑 세계 챔피언이라는 걸 모르고 있어….

후버는 범죄조직을 소탕하려는 케네디 형제의 발목을 잡기 위해 그들의 부모가 마피아와 연관되어 있다는 증거를 낱낱이 캐낸다. 이런 식으로 그는 역대 대통령의 치부를 볼모로 삼아 FBI 총수 자리를 굳건히 지켜간 것이다.

그러나 후버는 몰랐을 것이다. 그가 냉소적으로 경멸해마지 않았던 역대 대통령들에게서 나는 역겨운 냄새가 자신에게도 물씬 풍기고 있다는 것을. 권력을 두고 벌이는 싸움판에서는 모든 참가자가 역겨운 냄새를 풍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클라이드 톨슨의 회고록에 바탕을 두긴 했지만 어쨌든 이 책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 작가의 구성능력이 떨어진다면 이렇게 치밀하고 잘 읽히는 이야기로 탄생되지 못했으리라. 마르크 뒤갱은 훌륭한 이야기꾼이다. 이 소설을 읽는 이들은 전철역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한테 잠깐 인생이야기를 듣는 듯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무심코 말을 시켰는데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어마어마하고, 그 사람의 정체가 FBI의 2인자였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쯤이면 이미 모든 이야기가 끝나있는 듯한.

확실한 정황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세인들에게 두고두고 이야기거리가 될 케네디와 마릴린 먼로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도 이때까지 나왔던 추론 중 가장 개연성 있다.

대통령을 갈아치우는 남자

마르크 뒤갱 지음, 이원희 옮김,
들녘,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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