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의 푸른 물살로 번져나가는 책

김봉식 엮음 <시에게 마음을 빼앗겼네>

등록 2006.08.22 16:03수정 2006.08.22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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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글

열대야가 기성을 부리는 무더운 여름날 시선집 한 권을 읽었다. 김봉식 시인이 엮은 <시에게 마음을 빼앗겼네>(우리글)가 그것이다. 이 시선집은 1991년 <심상> 신인상으로 등단한 김봉식 시인이 미주 중앙일보에 4년 간 연재한 '한국 현대시 감상'을 모아 엮은 책이다.

1920년 한국의 대표시인 김소월의 '초혼'에서부터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자인 신인 길상호 '그 노인이 지은 집'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대표적인 현대시 56편을 엄선하여 수록하고 있다. 또 개별 작품 뒤에는 엮은이의 섬세하고도 정확한 해설과 시인 소개를 곁들여 시를 읽는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앞에서 바람이 불면
살갗은 갈비뼈 사이 앙상한 틈을 더 깊이 후벼 판다
뒤에서 바람이 불면
푹 꺼진 배는 갑자기 둥글게 부풀어 오른다
가는 뼈의 깃대를 붙잡고 나부끼는
검은 살갗

아이는 모래 위에 뒹구는 그릇을 내려다보고 있다
가는 막대기 팔과 다리로 위태롭게 떠받친 머리통처럼
크고 둥근,
굶주릴수록 악착같이 질겨지는 위장처럼
텅 빈,
그릇 하나
-김기택 /사진 속의 아프리카 아이 1' 전문.


김기택 시인의 위 시를 두고 엮은이 김봉식 시인은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김기택은 사물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세부 묘사로 그 속에 가려진 부분과 은폐된 사실을 밝혀내는 언어의 해부학자로 평가되고 있다. 이 시는 아프리카 흑인 아이가 피사체인 한 장의 사진을 소재로, 그 사진보다 더 슬프고 아프고 아리게 그들의 참상을 고발하면서, 시적 인식의 예각성이 얼마나 통렬한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서도 인류의 3분의 1인 20억이 식량 부족 상태이며, 그 중 5억 정도는 절대 빈곤 속에 허덕이고 있다. 세계 제1의 나라라는 미국에서만도 3천만 명이 굶주리고 있다고 한다. 독자들도, 피골이 상접해 죽어가는 아프리카 흑인들의 비참한 화보를 보면서 충격을 받은 적이 있을 것이다.


필자가 먼저 울어버리면 독자는 켤코 슬퍼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시는 감정 표현을 완전히 배제하고 냉정한 즉물주의로 일관하여, 독자의 마음을 더욱 더 슬픔의 심연으로 유도하고 있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수천 편이 넘는 한국 현대시에서 좋은 시를 뽑아내는 김봉식 시인의 감식안과 섬세하고도 정확한 해설은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커다란 안복(眼福)의 기쁨을 전해준다.


시선집 <시에게 마음을 빼앗겼네>는 ‘허무와 고독’, ‘사랑과 그리움’, ‘소망과 경이’라는 세 개의 큰 주제로 56편의 시가 편재되어 있다. 오래 전 한 문학월간지가 개설한 ‘문예대학’에서 시창작의 스승의 연을 맺은 오세영 교수는 추천사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56명의 시인의 작품들에 대한 그의 섬세하고도 날카로운 생각들이 혹은 감상적인 차원에서 혹은 비평적인 차원에서 단아하게 표출되어 있다.

그리고 시인의 일반적 시세계에 대한 소개와 작품에 대한 직관적 분석과 이에 대한 필자 김봉식씨의 촌철살인의 비평이 마치 금강석처럼 빛을 발하고 있다. 이 같은 내용을 원고지 2, 3매라는 짧은 지면에 이처럼 적확하게 함축할 수 있다는 것은 그의 범상한 문학적 감수성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치하하고 싶은 것은 그가 고른 시인들이 그 어느 하나 빠짐없이 우리 시대 한국의 시를 대표한 분들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가 외국에 있으므로 국내의 비평가들과 달리 오히려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보다 객관적으로 우리 현대시를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김봉식 시인이 ‘사랑과 그리움’이라는 주제에 언급하고 있는 아름다운 서정시 1편을 감상해보자. 한국 서정시의 본령을 이어가고 있는 젊은 시인 장석남의 '수묵(水墨) 정원 9'라는 작품이다.


번짐./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여름이 되고/너는 내게로/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번짐./번져야 살지/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번짐./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또 한 번-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번짐. /번져야 사랑이지/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 번져서/봄 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

이 시는 '수묵 정원' 연작시의 끝 작품이다. 시제(詩題)가 그냥 정원이 아니고 ‘수묵 정원’인데, 시인이 정원을 그린 수묵화를 보고 그 감상을 시화(詩化)했거나, 우리 마음의 정원을 수묵화에 비유했다고 볼 수도 있다.

화선지에 그리는 수묵화는 먹물의 번짐 효과를 기본 테크닉으로 한다. “번짐(spread)".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 그리고 우리의 삶 자체가 명료하게 선을 긋듯이 타자(他者)와 딱 부러지게 한계를 맺고 끊으면서 존립(存立)할 수 있겠는가. 결국 만유는 번짐, 즉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존재하는 것이다.

목련꽃이 번져 계절이 바뀌고, 너는 번져 내가 되며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된다는 인식, 삶은 번져 죽음이 되고 그 죽음이 다시 번져 부활에 이른다는 통찰, 나아가 오두막 한 채가 번져서 나비를 날려 보낸다는, 의미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시인이 찾아낸 결론은 ‘사랑’이다. “번져야 사랑이지”라는 조용한 호소가 바로 그것이다.

시인은 번짐이 사물과 사물의 벽을 허물고 인간관계의 증오를 사랑으로 물들이며, 현실과 꿈이 유연하게 섞이고 삼과 죽음이 그 경계를 초월하는, 부드럽지만 강한 힘이 있다고 파악한 것이다.

“시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감동의 대상이므로 논리적으로 따지지 않고 총체적 깨우침으로 나아가는 것이 시 감상의 요체”라고 생각하는 김봉식 시인의 자상한 안내를 받으며 한국의 대표적인 현대시 56편을 만나는 일은 내게 큰 행복이었다. 이 시선집을 통해서 삭막하고 살벌한 세상에 좀더 서정의 물살이 번져나갔으면 한다.

시에게 마음을 빼앗겼네

김봉식 엮음,
우리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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