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영수
후쿠오카에 있는 숙소를 나섰다. 7월말의 태양이 작열하는 호젓한 국도를 따라 남서쪽으로 1시간 정도 가니 가라쓰(唐津)에 도착하였다. 가라쓰는 이름대로 중국과의 역사적인 교역 항이었으며 한국과 가장 가까운 거리의 개항지이기도 하다. 또 한국의 역사와 문화가 들어가는 입구이기도 한 곳이다.
아울러 히데요시가 14만의 일본군을 집결시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킬 때의 발진기지이기도하다. 작은 개항지였지만 대규모 병력이 집결해 일약 대도시로 성장했다. 한국에도 당진(唐津)이란 같은 지명이 있으며 그곳은 당시 한반도와 중국과의 개항지였다.
한일해저 터널이 굴진 되는 곳엔 나고야(名護屋 - 名古屋와는 다름)성이 있어서 나고야라 부르기도 하나, 공식적으로는 사가현 (佐賀縣) 가라쓰(唐津)시 요부코쵸 토노노우라(呼子町殿ノ浦) 92번지 1에 있는 ‘국제하이웨이건설사업단’ 건설구역이다. 우리 일행은 사전에 연락을 받고 길까지 마중 나온 가라쓰 ‘후지하시 겐지’(57·藤橋健次) 사무소장 의 환대를 받으며 사무소 마당에 만들어진 설명회장으로 향했다.
차양으로 해를 가리고 사업단 마당에 만든 작은 설명회장은 우리 방문단에게는 흡족하였다. 수인사를 마친 후지하시 겐지 소장이 일본어로 설명을 하자 사무직원이 한국어로 통역을 하였으나 일본어를 더 많이 사용하여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방문단 모두가 일본어를 알고 있어 소장은 양해 하에 일본어로 설명을 다시 시작하였다.
후지하시 소장은 지난 1982년 현장조사부터 참여하였으며 이제까지 25년간을 한일해저터널에 몸 바쳐 왔다. 후지하시 소장은 이후 건설이 본격화되면 앞으로 약 15년에서 17년이 걸리므로 모두 40년 이상 이 사업에 종사하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한일해저터널에 대하여 차분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한일해저터널은 분명히 군국주의 시대 일본이 대륙침략을 위하여 좀더 효과적인 방법으로 발상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기술적인 문제나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일본은 2차 대전에서 패전하자 자연히 한일해저터널은 잊혀지게 되었다.
그 이후 일본의 우익진영에서 산발적인 제안이 있었으나 시행에 이르지 못하고 있던 차, 1981년 서울 '과학의 통일에 관한 국제회의'에서 한국측에 의하여 정식으로 제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