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합기념조선사진첩> (신반도사, 1910)에 수록된 '테라우치통감 신임 피로회장(용산통감관저)' 안내약도에 보면 지금의 삼각지 자리에 '삼각도(三角道)'라는 표시가 등장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삼각지는 언제부터 삼각지였던 것일까?
<경성부사> 제2권(1936)에 정리된 내용에 따르면, 서울역 쪽에서 한강로로 이어지는 대로가 완성된 것은 러일전쟁 이후 일본군 진영이 막 구축될 무렵인 1906년 6월이라고 전한다. 따라서 세모꼴 지형인 삼각지 역시 이 시기 이후에나 정착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경성부가 1927년 2월에 정리한 <경성도시계획자료조사서>(248쪽)에 보면, "명치 41년(1908년), 신용산 한강통 삼각지, 총면적 500평, 광장으로서 설비는 없음"이라고 하여 이 곳에 '운동장'이 설치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이 기록만 가지고는 그 당시부터 이 곳을 '삼각지'라고 불렀는지는 분명히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
어쨌거나 삼각지라는 표현이 정식지명으로 채택된 적은 없었고, 그저 일본인들 사이의 속칭으로 통용된 탓인지 처음부터 통일된 표기가 사용되었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른바 '한일합방' 직후에 발행된 <병합기념조선사진첩>(신반도사, 1910)은 그러한 흔적을 담고 있는 확실한 자료의 하나이다.
여기에는 '테라우치통감 신임 피로회장' 안내약도가 그려진 것이 수록되어 있는데, 남대문 방향에서 용산통감관저에 이르는 행로가 나오고 지금의 삼각지 자리에 '삼각도'라고 표시해놓은 것이 눈에 띈다. 이것이 아마도 삼각지와 관련한 지명표기에 있어서 가장 빠른 시기의 용례가 아닌가 싶다.
이와 아울러 이 이후의 시기에 있어서는 삼각공원, 삼각지점, 삼각도로와 같은 용어들이 두루 사용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지만 여기에 다 소개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이것 말고도 삼각지 일대를 '삼각정'이라고 표기한 사례도 심심찮게 발견된다. 가령 <시대일보> 1924년 9월 4일자에 수록된 "행정구역정리, 한강통 부근과 육군관사근방"이라는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용산 한강통은 구역이 너무 광범하고 번지가 복잡하여 공사간 불편한 일이 적지 않고 더욱 육군관사부근은 육군 독특한 칭호로써 부르게 되었는데 경성부에서는 그 관할지와 동명을 조사한 후 행정구역을 정리할 예정으로 목하 조사중인 바 연병정, 경정, 삼각정은 이미 그대로 굳어버렸으므로 그대로 두고 가장 복잡한 한강통은 일정목에서 삼정목으로 제정하고 육군관사방면은 독특한 정명을 붙이려고 계획 중이라 한다."
이와 같은 자료들을 죽 훑어보면, '통칭' 삼각지라는 지명은 1920년대 초반 무렵에 완전히 정착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을축대홍수가 일어났던 1925년에는 이곳까지 물이 차 올랐고, 피난민들이 자연스레 이곳으로 몰려들었던 탓에 '삼각지'라는 용어가 자주 신문지상에 오르내렸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39년 로타리→1967년 입체교차로→1994년 철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