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호는 '삼각지'의 유래를 알았을까?

일제가 이 땅에 남겨놓은 '세모꼴' 지명의 흔적

등록 2006.08.28 11:27수정 2006.08.29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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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1968년 4월 28일자에 수록된 (완공 직후의) 삼각지입체교차로 일대의 항공사진이다. "3억원짜리 '도너트'"라고 표현한 설명문이 흥미롭다.
<한국일보> 1968년 4월 28일자에 수록된 (완공 직후의) 삼각지입체교차로 일대의 항공사진이다. "3억원짜리 '도너트'"라고 표현한 설명문이 흥미롭다.
삼각지 로타리에 궂은 비는 오는데
잃어버린 그 사랑을 아쉬워하며
비에 젖어 한숨짓는 외로운 사나이가
서글피 찾아왔다 울고 가는 삼각지

삼각지 로타리를 헤매 도는 이 발길
떠나 버린 그 사랑을 그리워하며
눈물 젖어 불러 보는 외로운 사나이가
남 몰래 찾아왔다 돌아가는 삼각지



혜성처럼 나타나 전설로 사라진 가수 배호(裵湖·1942∼1971)가 부른 '돌아가는 삼각지'의 노랫말이다. 이 노래는 1967년 3월 16일에 취입됐는데, 그 해 1월 27일에 막 착공한 삼각지 입체교차로 건설공사와 맞물려 순식간에 빅 히트곡이 되었다.

비운의 스타가수는 채 서른을 넘기지 못하고 이내 세상을 떠났고, 노래의 유행과 더불어 유명세에 상승작용을 일으켰던 '돌아가는' 입체교차로는 그 후 요절가수의 생애만큼이나 짧은 27년간의 세월을 마감하고 1994년에 헐려져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노래는 여전히 사람들의 입에서 맴돌고 '삼각지'라는 지명은 지하철 4호선과 6호선의 교차역 이름으로 채택되었다.

그렇다면 이 '삼각지'란 것은 도대체 언제부터 사용되었으며 어떻게 생겨난 말일까?

['삼거리'] 한강·서울역·이태원으로 세갈래

글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삼각지(三角地)는 '세모꼴로 생긴 땅'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몇 가지 어원풀이가 있는 듯 하다.


먼저, 한글학회에서 펴낸 <한국지명총람 I : 서울편> (한글학회, 1966)에는 '한강1가로동' 항목 (189쪽)에서 삼각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삼각지(三角地) [길] 한강, 서울역, 이태원 쪽으로 통하는 세 갈래 길."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의 <동명연혁고 (V) 용산구 편> (서울특별시, 1980)에 수록된 '한강로1가' 항목 (146쪽)에서도 이와 비슷한 설명이 보인다. "삼각지란 원래 한강 서울역 이태원 방면으로 통하는 세모난 땅이란 데에서 나온 지명이지만 현재는 사각지(四角地)라고 해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설명에서 보면 삼각지란 것을 대체로 '삼거리'와 동일한 의미로 파악하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하지만 삼각지는 삼거리나 사거리와 같은 길의 갈래를 뜻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용어이며, 더구나 삼각지는 실제로도 삼거리가 아니라 처음부터 '사거리'(보기에 따라서는 '오거리')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설명을 곧이곧대로 따르기는 어렵다.

['습지'] 억새풀 우거진 '새풀'→'세뿔'→'삼각지'?

1974년 7월 20일에 삼각지 건널목이 폐쇄되고 이곳에는 철로 위를 지나는 고가도로가 건설되었다. 경부선 철로를 가로질렀던 이 길은 이미 1910년 이전부터도 존재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삼각지는 애당초 세 갈래 길이 아니라 처음부터 네 갈래 길의 형태를 띄고 있었던 것이다.
1974년 7월 20일에 삼각지 건널목이 폐쇄되고 이곳에는 철로 위를 지나는 고가도로가 건설되었다. 경부선 철로를 가로질렀던 이 길은 이미 1910년 이전부터도 존재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삼각지는 애당초 세 갈래 길이 아니라 처음부터 네 갈래 길의 형태를 띄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주간한국> 제1883호 (2001년 8월 9일자)에 수록된 이홍환 선생의 연재물 '땅이름과 역사(79쪽)'에서는 '용산구 삼각지'의 지명유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오늘날과 같이 한강기적의 상징처럼 각인되고 있는 이촌동 지역의 개발이 있기 훨씬 이전에는 한강이 범람하면 말 그대로 삼각지 일대는 물바다였다. 한강물이 상습적으로 들락거리다 보니, 늪지대로 습지(濕地)일 수밖에 없었던 것. 그래서 억새풀이 우거진 습한 이 늪지를 두고 '새펄'이라 불렀다.

이 '새펄'이 세월이 흐르면서 '새펄─새뻘─세뿔'로 된소리 발음되다 모음발성음으로 인해 '세뿔' '세뿔'했던 것. 이 '세뿔'이라는 땅이름을 일제가 우리 국토를 유린, 토지조사사업을 하면서 '세뿔'은 곧 '삼각(三角)'이라 한 것이 삼각지(三角地)라는 땅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하지만 새펄에서 세뿔로 발음이 바뀌고, 이것이 다시 일제에 의해 잘못 채록되어진 결과로 삼각지라는 지명이 생겨났다는 설명은 매우 과장되고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해석이다. 특히, 세뿔에서 한자어 '삼각(三角)'으로 전환되었다고 하는 대목에서는 논리의 비약이 심하다.

여기에서 말하는 새펄은 지금의 이촌동 일대를 일컫던 새푸리(新草里), 새평리(沙平里), 사원(沙原, 새벌) 등의 속칭과 관계된 것일 뿐이며, 지금의 '삼각지' 부근과는 여러모로 거리가 먼 지명인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점은 1914년 4월 1일자로 조선총독부 경기도고시 제7호에 따라 '경성부정동(京城府町洞)의 명칭 및 구역'이 변경될 때 "신초리(新草里), 사촌리(沙村里), 신촌리(新村里)는 이촌동(二村洞)"에 귀속된 반면, 정작 삼각지가 위치한 "한강통(漢江通)은 원흥동(元興洞), 이태원동(梨泰院洞)"을 관할구역으로 한다고 적시한 사실에서도 거듭 확인된다.

['세모꼴'] 경부선철도와 한강로가 만들어낸 삼각형

<경성회고록> (1922)에 수록된 1910년 9월 제정 '용산구시가신정명(龍山舊市街新町名)'에는 스에히로쵸(末廣町)에 대해 '교마치 북측 모토마치 4쵸메 및 경부선과의 중앙삼각지(中央三角地)'라고 설명하고 있다. '스에히로쵸'라는 말 역시 '부채꼴'을 가리키는 것으로 '삼각정(三角町)'과도 뜻이 통하는 말이다.
<경성회고록> (1922)에 수록된 1910년 9월 제정 '용산구시가신정명(龍山舊市街新町名)'에는 스에히로쵸(末廣町)에 대해 '교마치 북측 모토마치 4쵸메 및 경부선과의 중앙삼각지(中央三角地)'라고 설명하고 있다. '스에히로쵸'라는 말 역시 '부채꼴'을 가리키는 것으로 '삼각정(三角町)'과도 뜻이 통하는 말이다.
그럼 삼각지란 것이 삼거리를 뜻하는 것도 아니며 새펄에서 파생된 이름도 아니라면 이 말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삼각지의 이름에 얽힌 수수께끼는 경부선(경인선) 철도와 한강로가 이 부근을 지나면서 함께 만들어낸 '세모꼴' 지형과 도로구조에 주목하는 것으로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서울역 방면에서 곧장 내려오는 철도와 한강로 도로가 용산역 방면으로 이어지기 전에 크게 꺾어진 위치가 바로 지금의 삼각지이다. 이러한 도로구조 탓에 이곳에는 우연찮게도 꽤 너른 '세모꼴 광장'이 형성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사실은 이 무렵에 제작된 용산 일대의 시가지도를 한번만 살펴봐도 금세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

더구나 이 지점을 이태원 쪽에서 철길을 건너 원효로 방면(지금의 용산구청 방향)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비스듬히 가로지르면서 군데군데 세모꼴 지형으로 잘라 놓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 일대에 '세모꼴' 지형과 관련된 지명이 자주 발견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물론 그것들이 한결같이 일본인들의 작품이란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1910년 이전에 이미 삼각지 교차로가

가령 오무라 토모노죠의 <경성회고록(조선연구회, 1922)>에 보면, 1910년 9월에 경성거류민단에서 제정 고시한 '용산구시가신정명'이 소개되어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삼각지형과 관련된 지역으로는 '쿄마치' '스에히로쵸' '히가시쵸' 같은 사례가 있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쿄마치'는 지금의 삼각지 교차로에서 경부선 철길을 가로질러 용산구청 앞으로 연결되는 '백범로' 일대를 가리킨다.

이 동네가 있다는 것은 곧 1910년 이전에 이미 삼각지 교차로가 '사거리'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음을 뜻한다. 그러니까 삼각지의 유래와 관련하여 "세 갈래 길…운운" 하는 발상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 저절로 입증되는 셈이다.

그런데 쿄마치를 사이에 두고 남북대칭으로 자리한 '스에히로쵸'와 '히가시쵸'는 모두 경부선 철로를 끼고 삼각지를 형성하고 있다는 설명이 눈길을 끈다. 쿄마치의 북쪽에 자리한 '스에히로쵸'는 '(끝이 넓어지는) 부채꼴' 모양의 동네를 가리키는데, 일본 내에서도 세모꼴로 생긴 마을을 부를 때 자주 사용되곤 하는 지명이다.

요컨대 지금의 '삼각지' 부근이 이 이름을 얻기 이전에도 용산 일대에서 '삼각지'라고 표현되고 있는 지역들이 두루 존재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삼각지' 이름 정착은 20년대 초반

<병합기념조선사진첩> (신반도사, 1910)에 수록된 '테라우치통감 신임 피로회장(용산통감관저)' 안내약도에 보면 지금의 삼각지 자리에 '삼각도(三角道)'라는 표시가 등장한다.
<병합기념조선사진첩> (신반도사, 1910)에 수록된 '테라우치통감 신임 피로회장(용산통감관저)' 안내약도에 보면 지금의 삼각지 자리에 '삼각도(三角道)'라는 표시가 등장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삼각지는 언제부터 삼각지였던 것일까?

<경성부사> 제2권(1936)에 정리된 내용에 따르면, 서울역 쪽에서 한강로로 이어지는 대로가 완성된 것은 러일전쟁 이후 일본군 진영이 막 구축될 무렵인 1906년 6월이라고 전한다. 따라서 세모꼴 지형인 삼각지 역시 이 시기 이후에나 정착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경성부가 1927년 2월에 정리한 <경성도시계획자료조사서>(248쪽)에 보면, "명치 41년(1908년), 신용산 한강통 삼각지, 총면적 500평, 광장으로서 설비는 없음"이라고 하여 이 곳에 '운동장'이 설치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이 기록만 가지고는 그 당시부터 이 곳을 '삼각지'라고 불렀는지는 분명히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

어쨌거나 삼각지라는 표현이 정식지명으로 채택된 적은 없었고, 그저 일본인들 사이의 속칭으로 통용된 탓인지 처음부터 통일된 표기가 사용되었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른바 '한일합방' 직후에 발행된 <병합기념조선사진첩>(신반도사, 1910)은 그러한 흔적을 담고 있는 확실한 자료의 하나이다.

여기에는 '테라우치통감 신임 피로회장' 안내약도가 그려진 것이 수록되어 있는데, 남대문 방향에서 용산통감관저에 이르는 행로가 나오고 지금의 삼각지 자리에 '삼각도'라고 표시해놓은 것이 눈에 띈다. 이것이 아마도 삼각지와 관련한 지명표기에 있어서 가장 빠른 시기의 용례가 아닌가 싶다.

이와 아울러 이 이후의 시기에 있어서는 삼각공원, 삼각지점, 삼각도로와 같은 용어들이 두루 사용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지만 여기에 다 소개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이것 말고도 삼각지 일대를 '삼각정'이라고 표기한 사례도 심심찮게 발견된다. 가령 <시대일보> 1924년 9월 4일자에 수록된 "행정구역정리, 한강통 부근과 육군관사근방"이라는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용산 한강통은 구역이 너무 광범하고 번지가 복잡하여 공사간 불편한 일이 적지 않고 더욱 육군관사부근은 육군 독특한 칭호로써 부르게 되었는데 경성부에서는 그 관할지와 동명을 조사한 후 행정구역을 정리할 예정으로 목하 조사중인 바 연병정, 경정, 삼각정은 이미 그대로 굳어버렸으므로 그대로 두고 가장 복잡한 한강통은 일정목에서 삼정목으로 제정하고 육군관사방면은 독특한 정명을 붙이려고 계획 중이라 한다."

이와 같은 자료들을 죽 훑어보면, '통칭' 삼각지라는 지명은 1920년대 초반 무렵에 완전히 정착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을축대홍수가 일어났던 1925년에는 이곳까지 물이 차 올랐고, 피난민들이 자연스레 이곳으로 몰려들었던 탓에 '삼각지'라는 용어가 자주 신문지상에 오르내렸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39년 로타리→1967년 입체교차로→1994년 철거

<조선일보>1938년 10월 14일자는 삼각지교차로를 '로타리식'으로 교체하는 공사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그러니까 '삼각지 로타리'의 이미지는 이때부터 생겨난 일이다.
<조선일보>1938년 10월 14일자는 삼각지교차로를 '로타리식'으로 교체하는 공사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그러니까 '삼각지 로타리'의 이미지는 이때부터 생겨난 일이다.
그리고 삼각지 하면 무엇보다도 퍼뜩 떠오르는 말은 '삼각지 로타리'이다.

삼각지 교차로가 '로타리'로 변신한 것은 1939년 봄의 일이었다. 로타리 설치공사는 전년도 여름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1939년 4월말에 완공을 보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조선일보> 1938년 10월 14일자에 수록된 "용산 삼각지에도 로타리식 교통로 착공, 분수탑도 금월내에는 준공"이라는 기사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경남] 병참적 대륙도시로 나날이 뻗어나가는 대경성의 약진에 호응하여 경성부에서는 교통량의 격증에서 일어나는 교통사고의 방알과 근대도시로서의 미관을 보지할 계획으로 시내 번화한 네거리마다 순차로 '로타리'식 교통정리 도로를 설치하고 있는데 벌써 서문의 십자로와 대조선은행 앞에는 십만원을 들여 최근 완성되었고 경성의 남쪽 관문이라 할 용산 삼각지에는 또한 이곳이 장차 남산주회도로에 입구가 되는 반면에 경남 일대로서는 제일 교통이 번잡하여 총공비 오만여 원을 들여 지난 여름부터 '로타리'식으로 꾸미고 있는데 넓은 길 한복판에는 녹청에 주린 이곳 주민들의 일대 위안을 주고저 '프라탄'을 심고 또 한편에는 보기 좋은 분수탑까지 신설하여 전부 금월 안으로 낙성될 터이라 한다."

이 때 생겨난 삼각지 로타리는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존속되었다가 1967년에 입체교차로가 들어서면서 재변신하였고, 1994년에 이르러 마침내 이 입체교차로마저 철거되면서 다시 평범한 네거리 교차로로 환원되는 과정을 거쳤다.

그런데 이 삼각지라는 명칭을 왜색 지명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보는 까닭은 무엇일까?

말하자면 삼각지가 단순히 '세모꼴'의 지형을 지칭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개념이라면, 설령 그것이 일본인들에 의해 처음 불려지기 시작했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딱히 왜식 지명으로 단정하는 것은 좀 지나친 발상은 아닐까?

하지만 이에 대한 대답은 다시 되짚어봐도 여전히 변함이 없다. 분명히 그렇다는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스에히로쵸'처럼 세모꼴 지형에 으레 이런 식의 이름을 붙이길 좋아하는 것이 일본인들의 습관인 것은 분명하다. 삼각지 역시 그러한 관행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지명이라 할 것이다.

삼각지·삼각정·삼각산, 모두 일본식 지명

조선총독부 청사 너머로 백악(즉 북악)이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이른바 '내지인들'은 그네들의 오랜 습성대로 이 산이 세모꼴이라는 이유로 줄곧 이를 '삼각산(三角山)'으로 불렀다. 바로 그 뒤에 '오리지날' 삼각산(즉 북한산)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도 말이다.
조선총독부 청사 너머로 백악(즉 북악)이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이른바 '내지인들'은 그네들의 오랜 습성대로 이 산이 세모꼴이라는 이유로 줄곧 이를 '삼각산(三角山)'으로 불렀다. 바로 그 뒤에 '오리지날' 삼각산(즉 북한산)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도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일제강점기에는 그네들의 방식으로 세모꼴 지형의 지명을 정해놓은 곳이 '삼각지' 말고도 더 있었다.

우선, 청계천 광교와 장교 아래에 붙어 있는 '삼각정'이 그 하나였다. 이 곳은 원래 '굽은 다리'가 있었다 하여 곡교동이라고 했던 지역이었으나, 식민통치자들이 이곳을 청계천 본류와 무교동방면에서 흘러 내려온 지류가 합쳐지는 지형으로 그 모양이 세모꼴이라고 하여 '삼각정'이라고 고쳐 불렀던 것으로 알려진다.

세모꼴인 탓에 이를 '삼각정'으로 고쳐 부른 것이 언뜻 보아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닌 듯이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이 '삼각정'이라는 표현은 '산카쿠쵸' 또는 '미스미마치'라고 하여 일본 내에서도 세모꼴 지형으로 생긴 동네의 이름을 정할 때에 곧잘 사용하는 일본식 지명에서 따온 명칭이었다. 말하자면 그네들이 익숙한 지명을 그대로 가져와 식민지에 정착시킨 경우라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 이름은 해방이 되고서도 고쳐지질 못하고 '삼각동'이라고만 바뀌어 지금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가 흔히 백악 또는 북악산이라고 부르는 산의 이름을 고쳐 '삼각산'이라고 불렀던 것도 세모꼴 지명에 관한 또 다른 사례이다.

삼각산이라 하면 원래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하는 시조에서 보듯이 북한산의 본디 이름인데, 이것에는 구애되지 않고 일본인들 사이에는 거의 예외 없이 북악을 일컬어 '삼각산'이라는 이름이 통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이마무라 토모는 <조선급만주> 1933년 10월호에 기고한 "경성부근의 산명계몽록"이라는 글을 통해 이렇게 설명했다.

"[북악] 이것은 총독부의 후방에 약간 삼각형을 이룬 산의 본이름이다. 다른 이름은 백악, 고려시대의 이름 면악이다. 동월 <조선부>에…북악후종궁전증휘…가 있다. 이 산을 대다수 내지인은 삼각산이라고 불러왔으며, 요즘에는 삼각산으로 통하고 있다. 요사이 내지인뿐만 아니라 조선의 아동들도 그 얘기에 감염되어 삼각산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에게 닉네임이 있는 것과 같이 산에도 속칭이 있대도 지장이 없는 것이나, 삼각산으로 부르는 산은 따로 부근에 저명한 것이 있으므로 크게 지장이 있어, 향후 본이름인 북악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경성관련 역사서와 안내책자들에는 총독부가 있던 경복궁의 뒷산을 가리켜 이른바 내지인은 거의 예외 없이 '삼각산'으로 부른다는 사실이 자주 등장한다. 산의 생김새가 '기하학적'인 삼각형을 닮았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발상 역시 세모꼴 지형을 일컬어 '삼각정'과 같은 이름으로 부르길 즐겨했던 그네들의 오랜 습성에서 비롯되었음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이렇게 본다면 삼각지·삼각정·삼각산은 모두 단순한 세모꼴 지형의 한자식 표현이 아니라 일본식 지명이 그대로 유입된 결과라는 사실은 거듭 확인되는 셈이다.

사실이 이러할진대 혹여 삼각지 부근을 지날 일이 있다면, 이 곳에서 그저 "돌아가는 삼각지"의 낭만과 추억에만 빠져들 일은 결코 아니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다음카페 '일그러진 근대 역사의 흔적(http://cafe.daum.net/distorted)'에도 위의 내용을 올립니다.

덧붙이는 글 다음카페 '일그러진 근대 역사의 흔적(http://cafe.daum.net/distorted)'에도 위의 내용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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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년전부터 문화유산답사와 문화재관련 자료의 발굴에 심취하여 왔던 바 이제는 이를 단순히 취미생활로만 삼아 머물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습니다. 알리고 싶은 얘기, 알려야 할 자료들이 자꾸자꾸 생겨납니다.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버린 얘기이고 그것들을 기억하는 이들도 이 세상에 거의 남아 있지는 않지만, 이에 관한 얘기들을 찾아내고 다듬고 엮어 독자들을 만나뵙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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