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화를 바라보는 풍철한의 시선은 어이없는 것이었다.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울그락붉그락 하게 끓어올랐는데, 표정 역시 종잡을 수 없었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당황한 듯한 표정과 겹치더니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으로 변했다. 한참이나 선화를 바라보던 그는 결국 고개를 저으며 나직하게 탄식을 불어냈다.
"이번이 두 번째군."
그의 태도는 확실히 이상했다. 그의 성격으로 보아 누구에게 뺨을 맞았다면 발작이라도 일으켜야 정상인데 그는 그녀와 함곡을 번갈아 보면서 한발자국 물러난 것이다. 그리고는 선화를 보며 딱딱하게 말했다.
"이번까지는 참지. 하지만 세 번째라면 아마 그 손목이 다른 방향을 보게 될지도 몰라."
말은 그래도 그의 어조에는 힘이 없었다. 말을 들어보면 선화가 그 이전에도 풍철한의 뺨을 때린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감히 누가 풍철한의 뺨을 두 번 씩이나 때리고 멀쩡할 수 있을까? 하지만 세상에는 반드시 천적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는 여전히 어이없는 미소를 지은 채 함곡에게 말했다.
"더 볼 것이 있나? 나는 이만 가보겠네."
망신이라면 망신이었다. 좌등과 드잡이질을 할 뻔한 것도 그렇고, 사람들 앞에서 선화에게 뺨을 맞은 것도 그랬다.
"그러지. 어차피 앞으로도 수십 번 와보아 할 것 같으니 일단 가는 것이 좋겠네."
풍철한이 앞서자 미안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함곡이 뒤를 따랐다. 그러다 문득 풍철한은 얼굴이 굳어있는 철금강 반효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네가 오늘밤에는 힘을 써야 할 것 같다. 면철비를 부셔버리려면 말이야."
지나가는 투로 말을 했지만 이미 이 안에 있는 일행들은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보주가 면철비를 부셔버리라고 한 뜻을 이제 알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나타난 상황으로는 운중보주가 흉수였다.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분명 그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보주는 면철비를 부셔버리라고 말한 것이다. 만약 자신이 흉수라 밝혀져도 면철비를 내세우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평생을 같이 한 친구를 죽인 죄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다. 그렇다면 그 자신도 용서받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자신이 흉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은근히 공표하는 또 하나의 행동이기도 했고, 자신의 결백을 강조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14
"그 간 별래무양 하셨습니까?"
운중보의 다섯 번째 제자인 미환검(美幻劍) 추교학(萩矯學)은 신태감이 들어서자 깊숙하게 허리를 꺾었다. 실내에서 보아서인지 여장을 시켜놓는다면 아주 아름다운 미녀로 보일 것도 같았다. 그렇다고 그의 외모 때문에 미환검이란 외호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검은 아름다웠다. 누구나 그의 검을 보면 너무나 아름다워 검이 자신의 몸을 베는 순간까지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상대는 마치 앵속이라도 먹은 듯 그저 아름다운 환상 속에서 미몽(迷夢)을 헤매다 죽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름다울수록 더 위험하고 치명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그리고 그 위험이 눈앞에 닥쳐와야만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신태감은 의자에 몸을 실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앉거라. 그 간 너에게 많은 성취가 있어 보이는구나."
추교학은 신태감의 맞은편에 앉으며 이미 신태감이 올 것을 예상했다는 듯 끓여놓은 차를 찻잔에 따랐다. 그의 손은 남자의 투박한 손과는 달리 가늘고 희어 손만 본다면 여자로 착각할 정도로 섬세해 보였다.
"아직 미진합니다. 경쟁 상대들이 웬만해야 말이지요."
"걱정할 것 없다. 설마 후계를 정하는데 제자들을 모아놓고 비무(比武)라도 시키겠느냐?"
추교학은 자신의 잔에도 차를 따랐다. 차향이 향긋하게 실내에 퍼졌다.
"차라리 그렇게라도 한다면 속이라도 시원할 겁니다. 소질(小姪)이 아무리 늦게 입문했다 하더라도 사형들에게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부의 속내를 도대체 짐작이라도 할 수 있어야지요."
웬만큼 자신이 없으면 속내를 말하지 않는 아이였다. 헌데 사형들에게 뒤지지 않을 것이라 장담한다는 것은 이미 나름대로 큰 성취를 이루었다는 의미다.
"무엇이 걱정이냐?"
"위태부(魏太父)께서 힘써 주신다고는 하지만 이것은 무림의 일입니다. 다른 사형들은 무림문파의 후손들로 그 영향력이 직접적이라고 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위태부는 허수아비 황제를 앞에 세우고 현 중원을 한 손에 쥐고 있는 위충현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권세가 하늘을 찌른다 해도 무림은 언제나 별개의 세상이다. 그것을 지적한 말이었다.
"흥… 말도 안 되는 소리. 무림은 국법이 미치지 않는 곳이라더냐? 걱정하지 말거라. 이 숙부가 괜히 이곳에 직접 왔겠느냐? 네 부친께서도 이 일에 대해 누누이 태부께 말씀드린 바가 있었다."
"참… 아버님께서는 별고 없으십니까?"
"이제야 부친 생각이 난 모양이구나. 네 부친께서 별 일이야 있겠느냐? 위태부의 절대적인 신임을 한 몸에 받고 동창을 한 손에 쥐고 계시는 분이... 요사이 동림당의 잔당들 때문에 골치를 썩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대충 정리되고 있으니 네 문제에 부쩍 신경을 쓰시더구나. 네 부친께서도 마침 강소(江蘇) 남직례부(南直隷府)에 와 계시다."
위충현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동창을 한 손에 쥐고 흔드는 인물이라면 추산관(萩㦃寬) 태감일 것이다. 사실 환관이라 해서 자식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양자를 들이는 환관도 있고, 혼인해 아이를 낳고 난 후에 환관이 되는 자들도 많았다. 사실 대놓고 불알 없는 환관의 자식이라고 떠들고 다니기 낯 뜨겁고 떳떳하게 드러내기도 어려운 노릇이었지만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 아는 일.
더구나 강소성 남직례부라면 대명을 일으킨 주원장이 최초의 경도(京都)로 정한 남경(南京)을 말한다. 이곳 항주와는 성(省)을 달리한다 해도 빠르게 달리면 하루 반나절 거리.
"직례부와 와 계시면 한 번 직접 들르실 일이지… 사형들의 친족들은 어떻게 하든 들어오려 하는 판에…."
약간은 원망스런 말투였다. 자식이란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다. 투정부리듯 하는 추교학의 말투에 신태감은 오히려 빙긋이 웃었다.
"녀석… 너도 불안한 모양이구나…. 하지만 걱정하지 말래두… 오일 후면 네 손에 용봉쌍비가 들려 있을게야."
안심시키듯 말하는 신태감을 보면서 추교학은 차를 홀짝거리며 마셨다. 차를 홀짝거리며 마시는 것은 추교학의 버릇이었는데 경망스럽게 보인다 해서 아무리 고치라 해도 아직까지 고치지 못하는 버릇이었다.
"그래 누가 특히 마음에 걸리느냐?"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이지요. 제일 처지는 건 셋째 모가두 사형이지만 사부의 제자가 된 사연도 애매하고 모사형을 보는 사부의 눈길도 모호해 종잡기 힘든 사람입니다. 물론 그렇다 해도 모사형이 후계를 잇는 다는 건 생각할 수 없는 일이지만 말입니다."
이미 셋째 모가두는 보주의 후계자 범위에서 모두 제외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배경이라 해 보았자 양주(楊洲)에서 자리를 굳히고 있는 상인의 아들이라는 정도였다. 그렇다고 대부호나 거상(巨商)도 아니었고, 무림문파 중 그를 밀어 줄 문파라고는 한 군데도 나선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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