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껏해야 그의 부친과 안면이 있다는 녹림채(綠林寨) 일부에서 뒤를 봐주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는 있으나, 그래보았자 도둑 떼들에 불과하여 떳떳하게 나설 처지도 되지 못하였다. 안면이 있다는 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그의 부친이 장사를 위해 중원 여러 곳을 다니다 보니 자연 녹림도들과 부닥치게 되고, 그런 과정에서 돈을 건네주고 안면을 쌓은 정도이니 그리 큰 안면도 아니었다.
더구나 녹림채란 것이 워낙 방대하고 그 결속력도 겨우 상대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기 위해서 맺은 협약에 불과해 녹림채 전부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모가두가 다른 사형제에 비해 뛰어난 자질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처음부터 제자들 중 가장 자질이 떨어지고, 무공 수위에 있어서도 제일 뒤처진다는 것이 세간의 평가였다. 사실 지금까지 나타난 바도 다르지 않았다.
"아무래도 대제자인 장문위(蔣文偉)가 유력하지 않느냐?"
신태감의 물음에도 불구하고 추교학은 선뜻 고개를 끄떡이지 않았다.
"명분이야 당연한 것 아닙니까? 사실 대사형이 후계를 잇는다고 하면 누가 반발을 할 수 있겠습니까? 차기 운중보주로서 절대 손색이 없는 인물이지요. 하지만 섬서(陝西)의 패자 만권문(卍拳門)의 후광만으로는 조금 힘들지 않을까 합니다."
대제자 잠룡검(潛龍劍) 장문위(蔣文偉)는 섬서의 패자 만권문(卍拳門)의 문주인 철권(鐵拳) 장혁(蔣爀)의 맏아들이다. 권법의 대가인 철권 장혁은 온몸이 쇠로 이루어졌다고 할 정도로 외문무공에 일가(一家)를 이룬 인물. 몸이 흉기라 할 정도로 웬만한 도검으로는 몸에 상처를 낼 수 없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성질이 불같고 고집이 강해 타 문파와 긴밀한 교류를 가지지 못한 것이 그의 약점이었다. 그러다보니 이런 시기에 도움을 받을 문파가 많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이번 섬서에 있는 화산파(華山派)에서 누구를 이곳에 보내느냐에 따라 변수가 생길 겁니다. 화산은 공공연하게 같은 지역에 있는 만권문을 밀기로 했다는 말이 나오니까요."
제법 예리했다. 항상 응석받이이고 여리기만 해서 걱정이 되는 아이였는데 이제는 사리분별도 뚜렷하고 판단력도 예리했다. 신태감은 적이 마음이 놓였다.
"장문위가 된다면 우리 역시 보주를 탓할 수 없게 된다. 더구나 욱일승천(旭日昇天)의 기세에 있는 화산파의 입김은 무시하기 어렵다."
"물론 화산파에서 존망을 걸고 달려든다면 모르겠지만 소질 생각으로는 그럴 가능성은 좀 낮다고 생각합니다. 아직까지 화산에서는 사람이 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넷째 사저가 걱정이었는데 다소 안심이 되기는 합니다."
봉황검(鳳凰劍) 궁수유(宮秀柔).
운중보주의 제자 중 유일한 홍일점(紅一點)인 그녀는 사내들을 뛰어넘는 자질을 가지고 있었고, 매우 영민한 두뇌의 소유자였다. 사실 대개 여자는 신체적으로 사내보다 연약하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제자를 삼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럼에도 여자의 몸으로 보주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그녀가 주위의 사내보다 훨씬 뛰어나지 못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일이었다.
"왜…? 그녀를 밀었던 철담이 죽어서?"
"물론입니다. 아무리 사부라 해도 만약 살아 계셨다면 철담 어른의 의견을 매정하게 뿌리치지는 못했을 겁니다. 실질적으로 운중보를 이끌어 온 분이 철담 어른이셨으니 말입니다. 이런 시기에 그 분이 돌아가신 것은 어쩌면 하늘이 제게 기회를 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냉정한 말이었다. 철담은 추교학에게도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았던 인물이었다. 가끔 그의 부친을 만나 뵈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부친과의 교우도 돈독했던 모양이었다. 추교학 역시 살아생전에는 철담 어른에 대해 경외와 존경심을 가지고 대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말투를 보면 이해가 얽혔다고는 하나 그의 죽음에 대해서도 아쉬운 마음을 가지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죽은 것이 잘되었다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삼합회(三合會)란 무시하지 못할 배경을 등에 업고 있는 아이다. 아예 배제할 수는 없는 일이야."
삼합회는 안휘성(安徽省)의 남궁세가(南宮世家)와 천궁문(天宮門), 그리고 강소성(江蘇省)에 있는 흥화회(興華會)가 연합한 단체로 처음에는 대상(大商)들이 결탁하여 운송되는 물자를 보호하기 위해 시작한 것이 시발이었다.
그러다가 무림세가이자 대상이었던 남궁세가까지 자연스럽게 합세하게 되자 시정에 떠돌아다니는 패거리들 정도였던 자들을 선별하고, 재주가 있는 자들을 더 뽑아 가르쳐 호위무사로 체계를 갖추게 하였다. 또한 다른 문파에 소속되지 않은 무림인들까지 모아 대체되면서 그 힘을 갖추자 무림문파의 하나로 대접받기에 이른 것이다.
그들 세 군데는 독립성을 잃지는 않았지만 결속력이 매우 강해 하나의 세력을 이루게 되었고, 현 중원에서 무시하지 못할 문파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현 삼합회의 회주는 천궁문의 문주인 단철수화(丹鐵手花) 궁단령(宮丹令)으로 궁수유는 그녀의 맏딸이었다.
천궁문은 사실 특이한 문파이자 가문이었다. 여인만으로 구성된 문파는 아니었으나 그곳의 가주는 대대로 여인이었고, 모계혈통을 이어가는 곳이었다. 자식들의 성도 모친의 성을 이어받았고, 문파를 움직이는 사람도 모두 여자였다. 사내는 그저 다른 문파의 여인네들처럼 장식품에 불과했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철담어른이 살아계셨다면 몰라도 삼합회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어려울 겁니다. 더구나 그녀는 꺾어진 꽃이니까요…."
"그게 무슨 말이냐? 그녀의 행실에 대한 소문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구나…."
"벌써 오래 전의 이야기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지워지기야 하겠습니까? 사부님께서야 더 자세히 알고 계실 테니까요."
"결국 네가 생각하는 자는 둘째 옥기룡이구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신태감은 고개를 끄떡였다.
"아무래도 둘째 사형이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되겠지요. 동정오우(洞庭五友) 중 한 분이신 혈간(血竿) 어른의 장조카가 아닙니까? 더구나 상만천(尙萬天) 부호의 딸과 혼담도 오고 간다고 들었습니다."
추교학은 정확히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신태감이 이곳에 직접 온 것도 바로 그 이유였다. 만약 대제자인 장문위를 후계자로 정한다면 서운한 마음은 있어도 명분상 따지고 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헌데 파악해 본 결과 둘째 옥기룡이 가장 유력해 보였다. 그렇다면 둘째나 다섯째나 상관없는 일 아닌가? 대제자가 아닌 다음에야 충분히 노력만 한다면 경쟁자를 물리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운중보를 차지하는 일은 무림을 지배한다는 것과 같았다. 추교학 이 아이가 운중보의 후계를 잇게 되면 무림은 곧 동창의 손아귀에 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 후에는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동림파나 위태부에게 반대하는 자들을 직접 처리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명단만 전해주면 이 아이가 다 알아서 처리할 것이 아닌가? 위태부까지도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이유였다.
"상만천 역시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하더구나. 하지만 그라도 대놓고 옥기룡의 편을 들지는 못할 거야."
"사위가 될 사람인데 누가 말리겠습니까?"
신태감은 고개를 저었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아. 내심이야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무리 상만천이라도 위태부나 네 부친의 의중을 알 텐데 감히 대놓고 나설까? 어쩌면 너를 위해 오고 있는지 모른다. 그건 이 숙부가 처리할 테니 걱정 말아라."
"혈간 어른은 다르지 않습니까?"
그 말에 신태감은 대답을 하지 않고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았다. 차를 다 마실 때까지 곰곰이 생각에 빠져있던 그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오히려 잘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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