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의 '모호성'과 한·일 관계개선 시나리오

[이병선의 재팬 워치] 주목되는 양국 외교당국간 연쇄접촉

등록 2006.09.05 12:28수정 2006.09.05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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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이종호

한·일 외교당국간에 '포스트 고이즈미' 시대를 준비하는 움직임이 분주하다. 일본의 새 정권 출범을 계기로 지난해 6월 이후 중단돼 있는 양국간 정상회담 재개를 포함, 관계회복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것이다.

양측은 이번 주 서울에서 다양한 채널의 연쇄접촉을 갖고 있다. 4~5일 양국 조약국장을 수석대표로 하는 '배타적경제수역(EEZ) 경계획정을 위한 회담'이 열리며, 6~7일에는 유명환 차관과 야치 쇼타로 사무차관이 마주 앉는 '고위급 전략대화'가 개최된다.

이를 위해 사사에 겐이치로 아주국장이 야치 차관과 함께 방한하며, 야마다 시게오 북동아과장은 4일부터 7일까지 계속 한국에 머물 예정이다. 사사에 국장은 지난달 23~24일에도 서울을 다녀갔다.

1년에 두 번씩 양국을 오가며 갖기로 한 '셔틀 정상회담'이 중단된 것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와 독도문제 등 '역사갈등' 때문이다. 한국정부는 정상회담을 재개하려면 새 총리가 야스쿠니를 참배하지 않는 등 고이즈미 정권과는 다른 자세를 보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아베의 모호성 전략

일본의 차기 총리로 거의 확실시되는 아베 신조 관방장관은 현재 야스쿠니 참배에 대해 '간다, 안 간다, 혹은 다녀왔다' 등 사실관계를 일체 확인해주지 않겠다는 '모호성' 전략으로 나오고 있다. 이미 지난 4월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한 것으로 뒤늦게 보도됐으나, 이에 대해서도 본인은 일체 확인을 거부하고 있다.

지난 4월 야스쿠니를 참배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일종의 '타협책'으로 볼 수 있다. 정치인으로서 국내적 '명분'을 크게 잃지 않으면서, 총리 취임 후 한동안은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지 않아도 되는 '조건 만들기'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적어도 올해 안에는 야스쿠니신사를 다시 참배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이를 실마리로 해서 정상회담 재개를 포함한 한국과의 관계개선 시나리오를 짜고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이 지난달 일본을 방문했을 때 아베 장관에게 한·일 정상회담을 재개하자는 노무현 대통령의 뜻을 전하면서 총리 취임 후 조기 방한을 초청했다는 4일 언론보도는 일본측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교도(共同)통신>과 <도쿄(東京)신문> 등 일본 언론들은 반 장관의 메시지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강하게 반발해온 노 대통령의 방향전환"으로 해석하면서 "차기 정권에서 한·일관계 개선을 향해 움직일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한국외교부 당국자가 설명하는 반 장관의 '메시지'는 전혀 다르다. "양국간 갈등을 빚어온 문제들이 해소돼 정상간 교류중단 상태가 해소되길 희망한다"는 '일반론'이었다는 것이다.

한·일 정상회담 재개나 아베 장관의 총리 취임 후 방한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야스쿠니 문제 등 '양국간 갈등'이 먼저 해소돼야 한다는 것이 현재 정부의 입장이라고 이 당국자는 덧붙였다.

'관계회복'과 '국내명분' 두 마리 토끼 잡기

사실 이날 일본 언론들의 보도는 서울의 분위기와는 사뭇 거리가 있다. 고이즈미 총리가 8월 15일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한 이후 청와대는 "야스쿠니 문제는 A급 전범 분사로도 해결될 수 없다"라는 초강경 입장으로 내달렸다.

지난달 사사에 아주국장이 서울을 다녀간 직후 만난 주한 일본대사관의 고위 관계자도 "한국정부는 정상회담 재개의 전제조건으로 아베 장관이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지 않겠다고 명시적으로 선언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며 한숨을 지었다.

이런 흐름을 볼 때 반 장관이 지난달 9일 일본을 방문했을 당시 '정상회담 재개' 입장을 전달했다는 일본측 보도는 일단 신빙성이 떨어진다.

왜 이런 보도가 나왔을까? 외교부 당국자는 "아베 장관 주변에서 그의 정치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해석했다. 아베 장관으로서는 고이즈미 정권과의 차별성을 확보하기 위해 한국, 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든 풀어야 하는데, 한국측의 적극적인 요청이 있었다고 보도되면 사실과 관계 없이 국내적인 명분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아베 장관은 지난 1일 히로시마에서 가진 자민당 총재선거 출마 기자회견에서 "일·중, 일·한 관계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전향적 입장을 보이면서도 "정상회담을 부활시키기 위해서는 서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한국과 중국의 '책임'도 거론했다. '대외관계 회복'을 위해 '국내적 명분'을 포기하지는 않겠다는 자세이다.

새로운 출발이냐, 대립의 만성화냐

그가 실제 총리가 됐을 때 한, 중과의 관계개선에 적극 나설지에 대해서는 전망이 엇갈린다. 한, 중을 계속 외면하면서 인도와 호주 등을 아시아 외교의 중심축으로 삼을 가능성도 있다. 이 같은 구상은 그의 최근 저서 <아름다운 나라로>에 담겨 있다.

그러나 이 보다는 한, 중과의 경색된 관계를 계속 방치할 수는 없기 때문에 관계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전임자의 정책을 답습하기만 해서는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 또 관계개선을 요구하는 여론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베 장관이 이 설사 이 시점에서 총리 재임 중 야스쿠니를 참배하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해도 이를 명시적으로 선언하는 것은 일본 내 정치역학상 불가능에 가깝다. 여기에 '해법찾기'의 어려움이 있다.

아베 장관이 예상대로 총리가 되면 일단 오는 11월 베트남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때 노 대통령과 조우하게 된다.

그 때까지 야스쿠니 문제를 포함한 현안들에 있어서 양측이 어느 정도 접점을 찾느냐에 따라 11월 회동은 새로운 관계의 출발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반목과 대립의 만성화 과정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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