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은 크게, 진실은 얼렁뚱땅

[김태경의 동북아 브리핑] 외교부의 음습한 진실 공개

등록 2006.09.05 09:09수정 2006.09.05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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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19일 워싱턴에서 열린 '제1차 한·미 장관급 전략대화'에 참석한 반기문 외교부장관과 라이스 미 국무장관. 두 장관은 이날 채택한 공동성명에서 느닷없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에 관하여 양국 정부의 양해사항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지난 1월 19일 워싱턴에서 열린 '제1차 한·미 장관급 전략대화'에 참석한 반기문 외교부장관과 라이스 미 국무장관. 두 장관은 이날 채택한 공동성명에서 느닷없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에 관하여 양국 정부의 양해사항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로이터/연합
올 1월 한미 외교장관간 전략대화에서 양국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하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당시 이에 대해서 "유사시 주한미군의 중국-대만 분쟁 개입을 허용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비판이 나왔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공동성명의 다음과 같은 내용을 들어 부인했다.

"전략적 유연성의 이행에 있어서 미국은 한국이 한국민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북아 지역 분쟁에 개입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한국의 입장을 존중한다.

(영문 : "In the implementation of strategic flexibility, the U.S. respects the ROK position that it shall not be involved in a regional conflict in Northeast Asia against the will of the Korean people.)"

지난 1월 20일과 22일 청와대 국정브리핑은 이 공동성명을 설명하면서 "미국은 한국민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북아 지역 분쟁(즉 양안분쟁)에 개입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한국의 입장을 존중한다"고 강조했다. 즉, 주한미군의 양안분쟁 개입이 원천적으로 차단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반박이 있었다. 일부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영문으로 된 공동성명의 'ROK position that it shall not be involved'라는 문장에서 'it'은 주한미군이 아니라 사실상 한국군을 의미한다"며 "따라서 한국군이 동북아지역 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뜻일 뿐 주한미군의 개입은 전혀 제한받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분쟁 개입주체, '주한미군'인가 '한국군'인가


당시 외교통상부가 배포한 한글 공동성명에도 "미국은 한국이 한국민의 의지와 관계없이"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청와대 브리핑과 사석에서 만난 정부 관계자들, 그리고 대부분 언론들은 "미국은 주한미군이 한국민의 의지와 관계없이"라는 식으로 설명했다.

실제 올해 초 고위 당국자와 만난 자리에서 기자는 일부 비판 의견을 소개하면서 견해를 물었다.


그러나 이 관계자는 "주한미군이 양안 분쟁에 개입하면 당연히 한국도 끌려들어간다"며 "따라서 한국이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동북아 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말은 곧 주한미군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공동성명의 한국이 한국군을 의미한다는 것은 과대 해석"이라고 일축했다.

기자는 "공동성명 문안은 애매모호해 사후 해석을 놓고 한미 양국간 심각한 의견차가 발생할 수 있다"며 "'ROK position that it shall not be involved'라는 문장에서 'it'을 'U.S. Forces Korea(주한미군)'로 바꿔야 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 관계자는 문제가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런데 지난 1일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이 중견 언론인들의 모임인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논란에 종지부를 찍는 발언을 했다. 그는 전략적 유연성을 합의한 올 1월 공동성명을 설명하면서 "한국 정부나 국민이 원하지 않는 지역 분쟁에 '한국군'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에 합의했다"고 설명했다.

즉, 한미 공동성명에 언급된 양안 분쟁 개입을 자제 당하는 쪽은 주한미군이 아니라 한국군인 것이다. 외교부에서 평생 공직생활을 한 반 장관의 이날 발언이 실수는 아닐 것이다.

주한미군이 중국 공격하는데 한국은 상관없다?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지난 2월 반기문 외교부장관, 서주석 NSC 전략기획실장, 김숙 외교부 전 북미국장 , 위성락 주미공사, 이종석 통일부장관의 사진을 모형감옥에 넣는 퍼포먼스를 통해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과 평택 미군기지 이전에 항의했다.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지난 2월 반기문 외교부장관, 서주석 NSC 전략기획실장, 김숙 외교부 전 북미국장 , 위성락 주미공사, 이종석 통일부장관의 사진을 모형감옥에 넣는 퍼포먼스를 통해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과 평택 미군기지 이전에 항의했다.오마이뉴스 권우성
이와 관련, 한 외교·안보 전문가는 "원래 미국의 의도는 미군과 한국군을 함께 묶어 동북아 분쟁에 개입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우리 정부는 주한미군은 어쩔 수 없어도 한국군의 개입만은 막자는 수준에서 공동성명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따라서 주한미군이 양안 분쟁에 개입하는 데는 아무런 장애물이 없다"며 "이런데도 우리 정부가 마치 주한미군의 개입이 차단됐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국민을 속이는 짓"이라고 비판했다.

더 큰 문제는 한국군을 양안 분쟁에 개입시키지 않겠다는 정부의 의도도 실현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주한미군은 2008년까지 항구가 있는 평택과 공항이 있는 오산으로 이전한다. 예를 들어 오산에서 출격한 미군 전폭기가 베이징을 폭격한다면 중국군의 탄도 미사일이 오산으로 날아든다는 것은 상식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정부는 "한국군은 양안 분쟁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한미 양국이 합의했다"며 팔짱만 끼고 있을 것인가?

닝푸쿠이 주한 중국대사는 지난 3월 22일 한 토론회에서 "주한미군이 제3국을 대상으로 행동하게 되면 우리는 관심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고 이미 경고한 바 있다.

외교부 말바꾸기, 이번만이 아니다

한미간 안보현안과 관련된 외교부의 말바꾸기는 상습적이다. 더 문제는 거짓은 크게 떠들면서 설명하고 나중에 진실을 밝힐 때는 구렁이가 담넘어가듯이 얼렁뚱당한다는 것이다.

외교부는 지난 2003년 이래 용산미군기지 이전이 미국의 해외주둔미군 재배치(GPR)및 전략적 유연성과 상관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유명환 외교부 차관은 지난달 25일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에서 "용산기지의 이전은 전략적 유연성과 포괄적으로 연관된다"고 말을 바꿨다. 당시 이 통외통위에는 참석 의원도 취재진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유 차관이 말을 바꾼 사실이 즉각 공개되지 않았다.

반기문 장관은 지난 1일 관훈클럽 초청 토론에서 전략적 유연성에 따른 동북아 지역 분쟁의 개입 주체를 '주한미군'에서 '한국군'으로 말을 바꿨다. 반 장관은 2시간이나 걸린 초청 토론회에서 전시 작전통제권 관련 말을 하다가 딱 이 한 마디를 쓸쩍 끼워넣었다. 평소 이 사안에 관심있던 사람이 아니라면 이전 설명과의 차이점을 알 수 없었다.

최대 3조원에 이를 것이라는 추산까지 나오는 반환 주한미군 기지의 환경오염 치유 비용을 누가 부담하는가 하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지난 2004년 10월 외교부가 펴낸 '용산기지 이전협정 해설'이라는 자료집에는 "미측이 치유비용을 부담키로 합의했다"고 명시돼 있다. 당시 사석에서 만난 한 외교부 관리는 "일부 시민단체들이 한국이 부담하면서도 정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국제적 외교 관례에 무지하고 반미 감정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억지"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올해 들어 시민단체의 주장대로 오염 미군기지 정화는 한국이 떠맡는 것이 밝혀졌다.

반 장관은 1일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지금 불행하게도 한미간에 인식차가 있다"고 말했다. 한미간 인식차는 바로 이런 행태에서 비롯된다. 미 행정부의 불만은 "결국 한국 정부가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공개적으로는 왜 딴 소리를 하는가"라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11일 오후 경기도 평택역앞에서 지역주민과 시민사회단체 회원 5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평택미군기지확장반대와 한반도 평화실현을 위한 2차 평화대행진'.
지난해 12월 11일 오후 경기도 평택역앞에서 지역주민과 시민사회단체 회원 5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평택미군기지확장반대와 한반도 평화실현을 위한 2차 평화대행진'.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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