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벵 아니지유?"

아랫집 유씨 할아버지가 쓰러지셨습니다

등록 2006.09.05 10:26수정 2006.09.05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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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암소가 송아지를 낳다 죽어 텅빈 유씨 할아버지네 외양간

암소가 송아지를 낳다 죽어 텅빈 유씨 할아버지네 외양간 ⓒ 송성영

적당히 큰 배추 모종잎이 밭에 옮겨 심기도 전에 또르르 말려갔습니다. 거름 때문일까? 씨를 잘못 구입해서 그런 것일까? 그 원인을 알 수 없어 자문을 구하기 위해 아랫집 유씨 할아버지를 찾아갔습니다.


"할아버지 계세유?"
"아이구, 어쩐데유! 호성이 아부지가 많이 아퍼유."

거동이 불편해 바깥 출입마저 못하고 있는 할머니는 불안한 눈빛을 내보였고 유씨 할아버지는 안방에 엎드려 구토를 심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어이구, 심하신가 보네, 언제부터 그러셨슈?"
"어제부터 저 모냥여, 계속 토하기만 해유…."
"약은유?"
"어제 병원에서 약 지어다가 먹었는디 소용 읍슈. 다 토했어유."

할아버지는 말을 건네기 힘들 정도로 기운이 쏙 빠져 있었습니다.

"아이구 어떡헌디야, 호성이 한티 전화 해두 안돼구."


유씨 할아버지네 외아들 호성씨는 대전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호성씨의 핸드폰 번호는 낡은 수첩에 적혀 있었습니다.

"민우(인효를 민우라고 부르십니다) 아부지가 차 좀 불러줬슈."


할아버지는 계속해서 심하게 구토를 하고 계셨고 할머니는 어찌 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 못하며 병원에 모시고 갈 택시를 불러달라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휴지통에 엎드려 계속해서 토악질을 해대고 있었습니다.

"안되겠슈, 업히세유. 그냥 우리 차 타구 가유."
"○○○ 내과로 가유."
"거기는 가지 마세유, 거긴 아주 못된 놈들유, 무조건 독한 주사 놓고 약까지 독하게 줘서 처음엔 잘 낫는 거 같지만 그때뿐유, 오히려 몸이 더 안 좋아질 수 있응께, 거긴 가지 마세유. 원인을 치료할 수 있는 큰 병원에 가야 돼유."

평생 농투성이로 살아온 유씨 할아버지, 농촌을 황폐화시키는 WTO며 FTA가 뭔지도 전혀 모른 채 오로지 농사만 지어 오신 할아버지. 유씨 할아버지네는 우리 동네에서 유일하게 소를 기르고 있었는데 얼마 전 송아지를 낳다가 저 세상으로 떠났습니다.

할아버지의 소는 송아지를 포기하지 않고 죽는 순간까지 용을 썼다고 합니다. 하지만 송아지마저 세상 구경도 못하고 어미 뱃속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 동네에는 소가 단 한 마리도 없습니다. 소를 잃은 마음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던 유씨 할아버지는 그 일로 큰 탈이 난 모양입니다.

두 발로 마당에조차 나서기 힘들어 내 등에 업힌 할아버지의 몸은 벗은 매미 껍질처럼 무척이나 가벼웠습니다.

"요새 농약 치신 적 있슈?"
"배추 옮겨 심고 조금 쳤는디, 그거 때문은 아닐 거유."
"그래두 혹시 모르쥬, 어쩌믄 소 잃고 맘고생이 많으셔서, 고것 땜에, 기운이 막혀 탈 나셨는지도 모르겠네유. 병원에 가믄 괜찮아지실규."

젊은 의사의 묵묵부답

유씨 할아버지는 공주에서 제법 큰 ㅎ병원 응급실에 누워 먼저 몇 가지 간단한 진료를 받았습니다.

"많이 안 좋으신가 봐유?"
"……."
"워디가 안 좋은가유?"
"……."

젊은 의사는 내내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시선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나는 동네 어른들과 함께 있으면 부쩍 사투리가 많아지는데 의사는 내 어리숙한 말투에 대고 뭔가를 대답해 줘 봤자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촌놈'으로 봤던 모양입니다.

거기다가 세수도 하지 않은 꼬질꼬질한 낯짝, 밭일을 하다 말고 그대로 차려입은 흙 묻은 꾀죄죄한 옷차림, 흙이 덕지덕지 묻고 다 낡아빠진 고무신을 신고 있었으니, 생각없이 곁눈질로 보아도 내 몰골은 다리 밑에서 금방 나온 듯 추레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시골에서 흙 묻히고 사는 '촌놈'들은 이래저래 무시당하고 살아간다는 생각이 들어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 말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더럽게 무시하구 자빠졌네."

나는 그 젊은 의사가 듣거나 말거나 혼잣말로 궁시렁거리며 할아버지를 엑스레이실로 모시고 갔습니다. 할아버지는 두 차례에 걸쳐 엑스레이를 찍었습니다. 다시 응급실에 모셔놓고 잠시 밖에 나왔다가 들어가 보니 호성씨가 할아버지 곁에 있었습니다. 내 전화를 받고 대전에서 곧장 달려온 모양입니다.

엑스레이를 검토한 의사 말을 들어보니 농약 때문에 구토를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오줌 줄기가 막혀 있다고 합니다. 그곳이 뚫리지 않으면 대전에 있는 큰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몸이 쇠약할 대로 쇠약해져 오줌 줄기마저 막혀버린 할아버지의 건강은 농촌의 현실 같았습니다.

할아버지를 호성씨 곁에 두고 마을로 돌아와 할머니를 안심시켜 드렸습니다.

"죽는 벵 아니쥬? 아이구 어쩐디야, 죽으면 안 되는디!"
"걱정 마세유, 오줌 줄기가 멕혀서 그렇테니께유."
"죽는 거 아니쥬, 죽을 벵 아니지유?"
"하참, 걱정 마시랑께유, 고거만 뚫으믄 괜찮다니께유."

죽을병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줘도 눈물을 보이며 할머니는 자꾸만 죽음을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몇 년 전부터 힘에 부쳐 이미 논 일에서 손을 놓으시고 밭일에만 매달리고 있는 유씨 할아버지는 예전보다 눈에 띄게 몸놀림이 굼떠 보였습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오래된 고목나무의 그림자처럼 더디게 움직이고 있는 할아버지는 거의 약으로 살다시피했습니다.

팔순을 눈앞에 두고 계시는 유씨 할아버지께서 그나마 일손을 놓게 되면 이제 산비탈 밭을 일굴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됩니다. 산비탈 밭을 일굴 수 있다는 것은 할아버지께서 그나마 기운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기운은 또한 농촌의 마지막 남은 불씨와도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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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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