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창부금' 컨템포러리 판소리 '화제'

명창 정회석과 아내인 해금 디바 정수년의 아름다운 음악동행

등록 2006.09.08 09:40수정 2006.09.08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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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와 현악 앙상블, 전혀 어울리지 않은 것만 같은 두 음악이 컨템포러리 환경 속에서 서로 잘 어울리는 동행을 보인 정회석의 창작판소리 '뿌리 깊은 나무' 공연 장면
판소리와 현악 앙상블, 전혀 어울리지 않은 것만 같은 두 음악이 컨템포러리 환경 속에서 서로 잘 어울리는 동행을 보인 정회석의 창작판소리 '뿌리 깊은 나무' 공연 장면김기
7일 저녁,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는 아주 진기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서양 현악앙상블이 연주를 하고 있는데 객석에서는 '얼씨구', '으이~' 등 살가운 추임새가 들려온 것이다. 물론 그 가운데에 한 사내가 서있었다. 국립국악원 소속 판소리 명창 정회석, 그였다.

2003년 11월 파리에서 반가운 소식이 전해왔다. 우리 판소리가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는 것이다. 온 나라 언론들은 종묘제례악에 이어 두 번째 쾌거로 받아들여, 앞 다퉈 판소리가 훌륭한 음악임을 보도했다. 그리고는 그만이었다. 정부도, 국가음악기관에서도 그 후로 한 일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 사건은 젊은 판소리꾼이나, 귀명창들에게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판소리는 이제 국내에서만이 아니라 세계와 호흡해야 한다는 자각이었다. 세계의 민족음악 혹은 정통음악들을 인정하고, 그것들과 교류해 세계음악으로 나아가야 하며 그럴 동기가 주어졌다고 믿었다. 그 계기로 인해 판소리하는 젊은이들은 새로운 음악적 모색에 박차를 가하였다.

구히서 글고름의 '신 용비어천가'를 부르는 정회석, 고수는 전 국립창극단장 정회천
구히서 글고름의 '신 용비어천가'를 부르는 정회석, 고수는 전 국립창극단장 정회천김기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의욕이 결과를 담보해주는 것은 아니다. 계기와 의미는 충분했으나 세계의 낯선 벽은 호락호락 열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포기하면 피를 토하고, 인분을 받아먹으며 독공(득음을 위한 소리수련)에 매달리는 소리꾼들이 아니다. 또 판소리는 다른 장르를 섭렵하고, 협력하는 특성을 숨기고 있기에 태생적으로 크로스오버에 적합하다고 볼 수도 있다.

판소리는 경상도의 메나리, 한양지역의 책 읽는 소리 송서, 농민들이 함께 부르며 노동의 고단함을 달랬던 농요, 장사지낼 때나 부르던 노래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판소리 바깥의 것들을 자신의 살과 뼈로 받아드렸다.

그럼에도 7일 국립국악원(원장 김철호) 목요상설이라는 창작지원 프로그램의 일원으로 마련된 정회석의 판소리 창작무대는 많은 사람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정회석은 현재 판소리 계파 중 예술성에서 으뜸 대접을 받는 보성소리의 130년 소리가계를 잇고 있고, 평소에도 여기저기 모습을 잘 나타내지 않는 신중한 사람이라 그의 크로스오버는 이변까지는 아니어도 결코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한글 창제 이후 최초로 쓰인 서사시인 용비어천가를 구히서씨가 고르고 걸러 새롭게 만든 단가 '신 용비어천가'로 공연을 연 정회석. 우선 그를 익히 아는 청중을 위해 심청가 눈대목인 '범피중류'를 집안 형님인 전 국립창극단장 정회천의 북장단에 맞춰 불렀다. 여기까지는 이 날 공연이 여느 판소리 무대와 딱히 다를 바 없었다.

부창부금(夫唱婦琴) 지아비는 판소리하고, 아내는 해금 켜고..이만한 궁합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말 수 적기로 소문난 정수년이 화가 났다. 130년 간 으뜸가는 판소리 계파로 인정받는 보성소리 계승자 정회석의 공연에 정책적 배려가 너무 없다는 것이다. 사명감 아니면 대대로 소리명맥을 잇기란 불가능한 일이라며 문화정책적으로 전통예술가계를 지원해야 한다고...
부창부금(夫唱婦琴) 지아비는 판소리하고, 아내는 해금 켜고..이만한 궁합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말 수 적기로 소문난 정수년이 화가 났다. 130년 간 으뜸가는 판소리 계파로 인정받는 보성소리 계승자 정회석의 공연에 정책적 배려가 너무 없다는 것이다. 사명감 아니면 대대로 소리명맥을 잇기란 불가능한 일이라며 문화정책적으로 전통예술가계를 지원해야 한다고...김기
다음 무대에는 판소리 무대의 고정세트인 병풍과 돗자리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음향반사판이 둘러쳐졌다. 그리고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 그리고 해금을 든 연주자들이 앉았고, 이어 정회석이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강준일 작곡의 컴템포러리 판소리가 시작되었다.


줄리어드 출신 이보연이 이끄는 아리 앙상블은 쉽지 않은 현대음악 연주를 능숙하게 소화해내는 높은 기량을 선보였다. 거기에 국악계 대표적 해금 디바 정수년의 가세는 동서양 현악기의 아름다운 동행을 이루었다. 한국종합예술학교 전통예술원 교수인 정수년은 이 날 주인공인 정회석의 아내이기도 하다.

지아비는 판소리하고, 아내는 고수 대신 해금으로 장단을 거드는 부창부금(夫唱婦琴)의 흐뭇한 장면을 연출해냈다. 이런저런 흥미로운 요소들이 진진한 공연이라 그런지, 국악공연으로써는 이례적으로 TV방송 두 곳에서 열띤 취재를 벌이기도 했다.

이 날 판소리는 심청가 속에서 대부분 골랐다. 앞서 전통방식으로 부른 '범피중류'가 그렇듯이 강준일 작곡의 '추월은', '그때여 심봉사는' 그리고 '뺑파'까지 신작 3곡이 초연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곡 '님 따라서 갈까보다'는 올해 공연을 위해 작년 시험적으로 만들어져 이미 선보였던 것이다.

이보연이 이끄는 아리 현악앙상블과 판소리 명창 정회석의 이색무대
이보연이 이끄는 아리 현악앙상블과 판소리 명창 정회석의 이색무대김기
컨템포러리 판소리가 막상 펼쳐지자 일순 객석엔 차가운 긴장감이 감돌았다. 과연, 설마 하는 심정들이라는 것은 공연 전 로비에서 주고받은 말들로 미리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연주시간이 더해감에 따라 객석의 긴장감은 느슨해지고 급기야 서양 현악앙상블 연주에 추임새가 터지고 만 것이다.

그 동안에도 서양 오케스트라와 판소리 협연, 현대음악에서의 판소리 공연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때는 추임새가 없었다. 그땐 청중들이 판소리가 아니라 서양음악에 중심을 두었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날은 정회석 아니 보성소리 일가를 이룬 정재민-정응민-정권진의 130년 가계의 무게가 연주를 무엇으로 하건 판소리의 오롯한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게 만들었나보다.

심청가 주제의 3곡과 춘향가 주제의 마지막곡 연주를 마치자, 객석은 애초의 긴장감 대신에 뜨거운 박수로 꽉 찼다. 연주가 끝난 후, 사람들은 좀처럼 로비를 떠나지 못했다. 삼삼오오 모여 이 날 연주에 대해 나름의 의견들을 나누었다. 개중에는 비판적인 의견도 있었으나 대체로 좋다,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었다.

리허설 중 작곡가 강준일(왼쪽)씨와 연주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정회석.  강준일 작곡의 심청가 주제 3곡은 스스로 사설에 대한 충분한 해석을 바탕으로 탄탄한 구성을 보였다는 평을 받았다
리허설 중 작곡가 강준일(왼쪽)씨와 연주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정회석. 강준일 작곡의 심청가 주제 3곡은 스스로 사설에 대한 충분한 해석을 바탕으로 탄탄한 구성을 보였다는 평을 받았다김기
작곡가 강준일씨는 "일반적인 판소리 심청가가 아니라 정권진 선생의 심청가라는 점을 분명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나를 비롯해서 구히서, 정회석, 정수년, 이보연 등이 작년부터 보성소리에 대한 스터디를 하고 있다"며 "그때마다 '어떻게 이런 소리를 할 수 있나' 하는 감탄과 탄식만 매번 스무 번은 하게 된다"고 고백했다.

강씨는 "그것이 이 곡들을 쓰게 만든 원천"이라며 "판소리야말로 모든 한국음악이 귀결되는 예술음악이라고 믿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런 탄탄한 정서적, 인식적 경험이 바탕이 된 탓인지, 이번 그의 작곡은 판소리 본디의 성품은 하나도 흔들지 않으면서 고수역할을 잘 소화해 냈고 현악앙상블과의 조화도 잘 이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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