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8일 저녁에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도로명주소 등 표기에 관한 법률(도로명주소법)'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법이 생김으로써 막대한 국가예산이 대표적 예산낭비사업에 반드시 투입되게끔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 사업은 행자부가 주관하는 '도로명주소사업(일명 새주소사업)'입니다. 이 사업은 1996년부터 지금까지 계속 진행중인 사업으로서 그간 쓴 예산만도 2000억에 달하지만 당초 예측과 달리 실효성이 매우 낮은 것으로 판명되었는데도 고집스럽게 계속 추진되어 언론과 시민단체 등으로부터 대표적인 예산낭비사업으로 비판받아 왔습니다.
사업효과가 워낙 낮은 것으로 판명된 탓에 기획예산처·국회 등에서도 부정적 평가를 받아 당초 매년 국비 180억원을 쓸 계획이었으나 예산을 삭감당하기 일쑤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행자부가 내놓은 방안이 도로명주소의 법정화, 즉 아예 도로명주소를 법적 주소로 바꾸는 것이고, 그 결과 나온 법안이 바로 도로명주소법안입니다. 그런데 법정주소를 바꿀 때 들어갈 비용이 얼마나 될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도로명주소법안에는 입법으로 인해 추가로 소요될 비용이 50억 정도밖에 안된다고 되어 있지만, 이것은 터무니없이 축소된 액수입니다. 일례로 법정주소를 바꾸면 정부측 연구결과로도 주민등록·등기부 등 최소 300여 종류의 공적장부를 바꿔야 한다고 합니다.
정통부는 새 주소에 맞춰 우편번호 체계를 개편할 경우 양 주소 병기 단계에서 우편번호부가 191배 증가하게 된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주시의 경우 현재 우편번호 개수가 183개인데, 새주소에 맞춘 우편번호를 추가할 경우 3만4988개가 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새로운 주소체계가 정착될 때까지 필요한 비용과 노고가 어느 정도일지 예측이 안 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하는시민행동 등은 기본적으로 10년 넘게 뚜렷한 사업성과를 보이지 못한 예산낭비사업을 회생시키기 위해 조급하게 법을 만드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만약 법을 만들고자 한다면 사전에 반드시 합리적인 비용추계, 즉 이 법을 만들 때 소요될 국가적 비용이 얼마나 될지에 대한 예측이 정확하게 이루어져야 하고 그에 대한 충분한 사회적 토론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2006년 2월 시민행동의 '도로명주소법안 반대' 보도자료 참조>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국회는 예산정책처에 의뢰하여 비교적 과학적인 비용추계를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았고, 정부 예산 관련부처 및 예결특위 등의 공식의견 청취도 하지 않은 채 입법을 강행한 것입니다.
이로써 2011년까지 기존주소와 새주소(도로명주소)의 병용기간이 있긴 하지만, 법정주소로 확립된 도로명주소 체계를 갖추고 활용을 증대한다는 명목으로 막대한 국가예산이 성과예측이 불분명한 사업에 투입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액수가 얼마나 될지는 아직 모릅니다. 다만 행자부에서 2006~2009년간 필요한 사업비를 1117억원으로 잡고, 이러한 거액의 재원확보를 위해 이 사업을 BTL 방식으로 추진하는 계획을 밝힌 바도 있음을 상기하면 몇천억으로도 모자라는 엄청난 규모가 될 것임은 예상할 수 있습니다.
도로명주소법은 충분한 비용추계 없이 졸속 입법되었습니다. 따라서 추상적인 취지가 그럴 듯 하다 해도 이 상태로는 소중한 국민 세금을 무한정 갖다쓸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이 법이 생김으로써 실제 소요될 예산 규모와 사회적 비용을 정확히 추계하여 합리적 사업계획과 재원 조달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고, 검토결과가 부정적 또는 유보적 의견이 우세하다면 법의 개폐를 무릅쓰고라도 졸속 입법에 의해 국민 세금이 헛되이 쓰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늦었지만 정부와 정치권의 신중하고 책임감 있는 검토와 대책 마련을 촉구합니다. 진정 필요한 일이라면 자신있게 국민을 설득하여 사업을 추진하기 바랍니다. 뒷날 도로명주소법 입법이 '예산 먹는 하마'를 탄생시킨 일로 비판받는 일이 생긴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지겠습니까? 조금 늦게 가는 것이 무작정 가보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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