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의 짐, 가족들이 함께 나눠 지자

<투명인간 최장수>를 보며 느낀 가족사랑

등록 2006.09.11 12:59수정 2006.09.11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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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투명인간 최장수>

<투명인간 최장수> ⓒ KBS

"장수씨. 나 만나서 행복했어? 나랑 살아서 행복했냐구. 나는 행복했는데 나만 행복했을까봐. 당신은 힘만 들었을까봐. 그게 너무 미안해요. 미안해요."


소영의 절규에 가슴이 미어진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안타까움에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왜? '아니라고, 나도 너만큼 행복했다'고 대답해줄 남편 장수가 곁에 없기 때문이다. 떠난 보낸 후에야 비로소 절절하게 다가오는 남편에 대한 소중함. 그리고 그 소중함을 너무 늦게 깨달은 것에 대한 타들어가는 갈증.

그러나 어찌하리. 이젠 돌이킬 수 없는 것을. 이젠 정말 잘 할 수 있는데, 행복이 어떤 것인가를 이제야 알 것 같은데. 그러나 남편 장수는 하늘나라로 떠나버렸다. 그러니 있을 때 잘해야 하는 것을….

"여보. 지금 행복해?"

문득. 나도 남편에게 물어보고 싶다. 함께 드라마를 보고 있는 남편을 가만히 곁눈질해 본다. 그런데 입이 안 떨어진다. 모르긴 몰라도 '도둑이 제 발 저린' 그런 심정이겠지. 뭐 하나 똑 부러지게 잘해주지도 못하면서 나랑 사는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냐고?

스스로 생각해도 나란 사람이 참 뻔뻔하고 한심하다. 이내 가슴이 뜨끔하다. 다만 한 가지. 있을 때 잘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뜨끔해진 가슴을 다독여본다.


<투명인간 최장수>는 가족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 드라마이다. 좀 더 단적으로 말하면 딱 '이 시대 가장들'에 대한 이야기다. 적어도 드라마를 시청했다면, 또 풍문으로라도 장수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면 지금쯤 가족이란 존재의 실체가 가슴팍에 아주 선명하게 새겨져 있을 것이다.

가족이란 그냥 가족임을, 단지 가족이라는 그 울타리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고 감사한 것임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더불어 당분간은 남편에 대한, 아버지에 대한, 구구절절한 자격의 잣대를 들이대는 어리석은 일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고 하던 CF가 문득 생각난다. 강력계 형사로서 불철주야 열심히 일한 장수. 어느 날 그는 떠난다. 열심히 일했기에 그 보상으로 주어진 그런 가슴 부푼 여행이 아니다. 열심히 일만 했다는 이유로, 일만 열심히 하다보니 미처 가정을 돌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내에게 등 떠밀려 가정을 떠난다.

그렇다면 장수는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어떤 결격사유가 있었을까. 식구들 밥을 굶겼나? 아니다. 바람을 피웠나? 아니다. 바다에 미쳐 시도 때도 없이 고래를 잡으러 다녔나? 아니다. 그럼 매일 술에 찌들어 식구들을 못살게 굴었나? 아니다. 그럼 도대체 장수가 이혼을 당하는 이유가 뭔가.

이유는 단 한 가지. 일만 열심히 했다는 것. 강력계 형사로서 눈만 뜨면 범인 잡는 일에만 매달렸지 정작 아내와 아이들에겐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게 바로 그 이유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장수는 왜 그토록 일에만 매달렸던 것일까.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자신의 출세욕에 불타서? 아니면 경찰이라는 직업에 한이 맺혀서? 그도 저도 아니다.

그게 바로 최장수식 가족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온갖 흉악한 범인들에게 칼을 맞아가면서도 장수가 그토록 일에 매달린 건 오로지 가족 때문이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몸 아끼지 않고 열심히 일 하는 것만이 가족을 위해, 또 발달장애를 앓고 있는 아들 다미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장수는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건 장수의 생각일 뿐이다. 아니 이 시대 가장들 대다수가 아마도 그렇게 믿고 있을 것이다. 여기에 함정이 있다. 하루하루 급속하게 변해가는 이 세상이 가장의 역할이라고 가만두겠는가. 우리 어머니 세대만 해도 그저 삼시 세끼 밥 안 굶기면 최고의 가장이었다.

거기다 좀 더 욕심을 내자면 안 두들겨 패는 남자, 바람 안 피우고 노름 안하는 남자면 일등 가장이었다. 우리 어머니만 해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그런 남자를 만나야 한다고 입이 닿도록 말씀 하셨으니까.

그러나 이 시대가 요구하는 가장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한 그야말로 만능 슈퍼맨이어야 한다. 돈 잘 벌어야 하는 것은 두 번 말하면 입 아프다. 아내에게는 혀끝에서 살살 녹는 아이스크림 같은 부드럽고 달콤한 남편이 되어야 한다. 아이들에겐 도깨비 방망이를 가진 도깨비처럼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외치기만 하면 원하는 대로 다 해줄 수 있는 아빠가 되어야 한다.

만약, 그 모든 것을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면? 결국 소외당하고 만다. 하루 온 종일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내 식구 먹여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한 남자들. 내 집에서만이라도 가장으로서 대우 받고 싶을 것이다. 물 먹은 솜뭉치 같은 몸과 마음을 아내의 따스한 말 한마디로, 아이들의 까르르 넘어가는 웃음 한 조각으로 위로 받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가족들은 냉랭하다. 왜? 아이스크림 같은 남편이 되어 주지 않기에, 만능 도깨비 방망이를 휘두르는 아버지가 되어 주지 않기에. 가족이라는 물 위에 뜬 한 방울 기름 같은 존재. 바로 요즘 남편이며 요즘 아버지라면 너무 과한 표현일까.

물위에 뜬 한 방울 기름이면 어떠리. 그나마도 장수는 오래오래 물 위에 떠 있을 수가 없다. 느닷없이 그를 찾아든 알츠하이머. 야금야금 기억을 잃어가는 그에게 오로지 절실한 건 가족들이다. 그리고 밀려드는 후회….

해준 게 없다. 가장으로서 일만 열심히 하면 그게 최선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가장으로서의 최선이 아니었다는 걸 죽음을 앞에 두고서야 알게 되다니. 아내에게도 아이들에게도 해줄 건 너무 많은데 시간이 없다. 비록 자신은 기억을 잃어가고 있을지라도 아이들에겐 무수한 기억들을 심어주고 싶은 아버지로서의 안타까운 몸부림이 눈물겹다.

"정말 지긋지긋해. 당신을 만난 10년 동안 단 한번도 행복한 적 없었고 힘들기만 했어! 그러니 이젠 제발 저리가."

장수에게 이렇게 매몰차던 소영. 아빠를 보는 것이 그저 이웃집 아저씨 보던 것 같던 무심한 아이들. 그러나 가장의 불치병 앞에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말.

"그저 오래오래 우리들 곁에 있어 주세요.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감사해요."

더 이상 바라는 건 없다. 그냥 남편으로서 그냥 아버지로서 오래오래 함께 살 수 있기를 그들은 간절히 기도한다. 왜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 왜 꼭 죽음을 앞에 둔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 그게 가족이라는 것을. 남편으로서의 어떤 자격도 아버지로서의 어떤 자격도 굳이 필요 없는 것임을 왜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 이제 그들은 시간이 없는데.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동고동락할 시간이 너무 짧은데...

"가족들에게 모든 걸 내어 주느라 그렇게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는데 아직도 우리들에게 줄게 남아 있어?"

자신을 위해 마음껏 써보라며 소영이 내민 카드. 원 없이 마음껏 한번 써봤다며 떠드는 장수의 손에 들려진 것은 온통 가족들 선물이다. 그럼에도 장수는 가족들에게 해주고 싶은 게 아직 너무 많다. 그런 절실함은 욕심껏 산 애비로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마지막 소원으로 이어진다.

소영에게 신장을 줄 수 있게 해달라고, 그리하여 행복하게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장수는 애원한다. 결국 장수는 아낌없이 다 주고 떠난다. 아니 떠난 게 아니다. 투명인간이 되었다. 소영의 몸 속에서 피를 돌게 하고, 아이들의 문자메시지를 받고 답장을 해주는 영원히 죽지 않는 투명인간이 되었다.

인생이란 것이 늘 그런 것 같다. 소중함이란 곁에 있을 땐 결코 모른다는 것. 자의든 타의든 떠나고 나서야 알게 된다는 것이다. <투명인간 최장수>는 그래서 고맙다. 뼈저린 후회와 미안함으로 장수를 떠나보낸 소영. 그녀의 피맺힌 절규는 오래 우리 가슴에 여운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가장들을 <투명인간 최장수>로 만들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시대의 가장들. 누가 하라고 해서 하는 것도 아니며 자격이 없다고 박탈할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가장이라는 것이 생각하기에 따라 감투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며 바위덩이 같은 육중한 짐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 남편은 그 가장이라는 것을 감투로 생각할까. 짐으로 생각할까.

자, 그럼 이제부터다. 내 남편을 절대 <투명인간 최장수>로 만들지 않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남편이 느낄 수 있는 가장이라는 무게를 한번 가늠해보자. 감투로 씌워져 있다면 그 감투에 걸 맞는 대우를 하자. 또 짐으로 얹혀져 있다면 가족들이 함께 나누어 지자.

아이스크림 같은 달콤한 남편을 기대하기에 앞서 따스한 위로의 말 한마디를 먼저 건네 보자. 아버지로 하여금 도깨비 방망이를 기대하는 아이들에게 고단함으로 뭉친 아버지의 두 어깨를 먼저 주무르게 하자.

드라마가 끝날 때쯤. 남편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다. 그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장수를 통해 자신의 실체를 보는 것 같아 허무해서일까. 아니면 새삼스럽게 나와 아이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 걸까. 자못 궁금하다. '여보. 지금 행복해?'라고 물어 보려던 처음의 말을 바꾸어야 할 것 같다. 지금껏 가장이라는 무거운 짐을 남편의 두 어깨에 올려놓았던 스스로의 죄책감 때문이다.

"여보.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앞으로는 잘할게."
"아니야. 내가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앞으로는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 노력할게."

이건 또 뭐란 말인가. 내 손을 움켜잡은 남편의 손이 불같이 뜨겁다. 이런 것을 두고 이심전심이라고 하는 것이겠지. 차마 남편의 눈을 오래 마주할 수 없다. 정작 미안한 건 나인데, 온전하게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투명인간최장수>라는 드라마는 끝났다. 그러나 장수는 죽지 않았다. 다만 투명인간이 되었을 뿐이다. 지금 이 순간도 이 세상 모든 가족들이 행복해지는 그날을 위하여 '오~ 카이'를 외치며 동분서주하고 있을 장수. 그에게 이 세상 모든 아내를 대표하여 고마움을 전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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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자회원이 되고 싶은가? ..내 나이 마흔하고도 둘. 이젠 세상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하루종일 뱅뱅거리는 나의 집밖의 세상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곱게 접어 감추어 두었던 나의 날개를 꺼집어 내어 나의 겨드랑이에 다시금 달아야겠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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