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 고속철 부채는 시지포스의 바위

철도직원이 바라보는 정부의 8.23 철도경영개선책

등록 2006.09.11 23:50수정 2006.09.11 23:55
0
원고료로 응원
a 세계 어느 나라에도 철도건설부채를 철도 운영주체에게 고스란히 떠넘긴 예는 없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철도건설부채를 철도 운영주체에게 고스란히 떠넘긴 예는 없다. ⓒ 김만년

요즘 들어 바위를 산꼭대기로 힘겹게 밀어 올리며 평생을 희망 없는 헛수고만 되풀이 하는 시지포스의 운명이 철도공사 직원들의 신세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철도경영개선 종합대책에 대한 정부의 발표가 있었다. 발표대로라면 철도의 경영정상화는 철도공사의 자구노력과 상관없이 평생 시지포스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철도공사의 자구노력과 정부의 경영지원으로 이루어지며…2015년까지 흑자대책 안을 마련했음…" 9월4일 국회 예결위원의 질의에 대한 건교부 장관의 답변내용이다. 그러나 지금 철도현장에 그런 말을 믿는 직원들은 별로 없다. 정말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20년을 현장에 근무해 오면서 적자라는 단어에 이젠 이력이 날 때도 되었건만 그래도 한 번쯤은 빚 없는 회사에서 근무해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연초 철도 적자문제와 관련한 대통령의 연두기자회견과 CEO의 각별한 관심이 담긴 친서를 보고 현장직원들은 희망에 부풀었다. 늦은 감은 있지만 다행이라는 반응이었다. 공사 전환과정에서 많은 불이익을 당하고도 적자기업이라는 원죄에 가위 눌림을 당해온 터라 직원들의 기대와 관심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고속철부채이자 전액지원으로 첫 말문을 연 이번 개선책은 얼핏 보면 그럴듯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현재도 턱없이 부족한 공익유지비용(PSO)을 슬쩍 삭감해 버렸다. 연간 1~2천억원의 추가투입이 기대될 뿐이다. 결국 현란한 숫자놀음으로 앞문은 열고 뒷문은 닫아버린 꼴이다. 이 돈을 받는 조건으로 철도공사는 강도 높은 자구노력을 하고 매년 그 결과를 점검받아야 한다.

문제는 1~2천억 원의 추가예산과 철도공사의 자구노력으로 2015년 부터는 흑자로 전환된다는 정부 관계자들의 허황된 발상이다. 3만2천 직원 모두가 CEO처럼 무보수 선언을 한다면 모를까. 이 속빈 강정을 만드느라고 전담팀을 만들고 지난 수개월 동안 그렇게 요란을 떨었는지 참으로 답답하다. 개선책이 아니라 부채를 철도에 떠넘긴 꼴이다. 철도의 속사정을 잘 모르는 국민들을 기만하는 처사라고 볼 수밖에 없다.

고속철건설비 부채이자와 선로사용료만으로 연 8천억원, 사회적 약자 보호 등 공적유지비 손실액 수천억 원.., 어림잡아도 연 1조원의 돈을 쏟아 부어야 하는 것이 2006년 9월 현재 철도공사의 기형적인 재무구조다.


결국 '수입증대와 비용절감'이라는 자구노력에 경영개선 초첨을 맞춘 것 같다. 즉 "땅 팔고, 역세권 개발하고, 인력효율화해서 경영정상화 하라"는 말인 것 같다. IMF직후 이미 7천 명의 직원들을 감축한바 있다. 해마다 신설선은 개통되는데 몇 년 째 정원은 동결상태다. '자구노력'이라는 태풍에 노사관계 또한 극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철도의 속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국민의 혈세를 왜 철도에 쏟아 붓는가"라고 반문할 것이다. 철도공사가 운영을 잘못해서 생긴 적자라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철도건설부채를 철도 운영주체에게 고스란히 떠넘긴 예는 없다.


고속철 관련 부채상환액만 없다면 철도는 내일이라도 당장 흑자전환이 가능할 것이다. 멀리 비교할 것도 없이 도로공사의 예만 보더라도 그렇다. 고속도로 건설비를 도로공사에 떠넘겼는가. 도로공사는 통행료를 받아 유지 보수만 하면 된다. 공공성으로 보나 SOC투자의 중요성으로 보나 철도가 홀대 받을 이유가 없다. 비록 국민의 혈세일지라도 이유가 분명하다면 써야할 것이다.

철도에는 인위적인 적자 요인도 많다. 광명역사 하나만 보더라도 그렇다. "어떻게 허허벌판에다가 수천억을 투입해 역사를 건설할 발상을 했을까" 광명역을 볼 때 마다 느끼는 생각이다. 광명역 때문에 한 해 4백억 원의 적자가 난다고 한다. 철도공사에서 짓자고 했던가. 철도공사가 그만한 정책을 결정할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 부실한 정책을 결정한 정부 담당자들은 누구인지 묻고 싶다. 직원들이 밤잠안자고 피땀 흘려 번 돈을 왜 이런 곳에 쏟아 부어야 하는가. 이런 억울한 생각이 3만2천 직원들의 마음속에 깊이 박혀 있는데 어떻게 직원들이 '뼈 깎는 자구노력'을 온전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겠는가.

철도는 좁게는 직원들의 소중한 일터이지만 넓게는 국민들의 삶 그자체이다. 그리고 철도의 경쟁력이 곧 국가의 경쟁력이다. 철도를 투자의 개념으로 볼 수는 없는가. 남북과 시베리아 대륙을 넘나드는 미래 국운상승의 기회로 말이다. 정부 철도정책 담당자들의 거시적 안목이 어느 때 보다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철도공사도 더 이상, 과거 철도청 시절의 종속적 관계에서 벗어나 정부와의 대등한 협력적 관계를 확보해야 할 것이다. 소신을 가지고 책임경영을 하라는 뜻이다.

10조 원이 넘는 고속철 빚 갚기에 언제까지 희망 없는 시지포스의 바위를 짊어지고 가야하는가. 직원들이 잘 먹고 잘살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직원들의 무한 희생을 포함한 자구노력만으로는 철도경영개선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자구노력을 바란다면 직원들에게도 그만한 희망은 주어야 하지 않는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삶의 여백이 익어가는 마을! 민들레농장, 농장지기입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2. 2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3. 3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4. 4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5. 5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