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의 수난시대?

독일 대학에서 홀대 받는 '동독산 마르크스' 기념물

등록 2006.09.13 11:29수정 2006.09.13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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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독일 극장가를 휩쓴 <굿바이 레닌>이라는 영화에는 동독 몰락 후 레닌 동상이 철거되는 장면이 인상 깊게 나온다. 40년 세월을 마르크스-레닌주의 깃발 아래 존재한 동독사의 종언은 사실 ‘레닌과의 작별’로도 불릴 만하지만, 비둘기 놀이터에 불과한 동상 따윈 만들지 말라던 레닌의 당부는 자칭 레닌주의자들의 몰락과 더불어 역설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여하튼, 현실사회주의라는 역사적 실험의 현기증 나는 몰락의 도미노에 첫발을 디딘 동독의 운명과 나란히, 수십 년을 ‘비둘기 친구’로 보내야 했던 레닌의 동상들도 그렇게 독일 땅에서 일제히 자취를 감추었다.

레닌이 제자로 자처한 마르크스는 어떨까. 근대 이후 인류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긴 마르크스가 고향 땅 독일에 남긴 흔적을 찾는 일은 별로 어렵지 않다. 수도 베를린에그의 이름을 딴 긴 거리가 있고, 마르크스-엥겔스 광장에는 그와 엥겔스가 동상으로 남아 있다. 트리어에 있는 그의 생가는 여전히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독일이 낳은 위대한 인물을 묻는 설문조사에서도 마르크스의 이름은 빠지지 않는다.

자신이 태어나고 떠나야 했던 나라에서 마르크스는 안녕하신 것일까. 별로 그렇지 않은 듯하다. 사실 마르크스의 기념물들은 대개 동독산이고 동독의 몰락과 함께 대거 구석자리로 밀려났다. 동독시절 마르크스 시로 바뀐 헴니츠는 통일 후 주민들의 결정으로 원래 이름으로 돌아갔고, 마르크스 대학으로 불리던 라이프치히 대학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당시 마르크스 대학이 위치한 도시 라이프치히가 마르크스주의 동독정권의 몰락과 독일 통일의 역사를 숨가쁘게 일구어낸 동독 ‘평화 혁명’의 발원지라는 사실은 꽤 역설적이다. 그런 역사를 가진 라이프치히가 최근 동독시절의 마르크스 유산을 둘러싼 논쟁에 휘말렸다. 라이프치히 대학의 이른바 ‘마르크스 부조’ 때문이다.

무게가 무려 33톤에 달하는 이 거대한 청동 부조는 동독시절을 거슬러 30여 년을 라이프치히 대학본관 건물 입구에 걸려 있었다. 하지만 3년 앞으로 다가온 대학 설립 6백 주년 기념에 맞춰 신축되는 본관에 마르크스 부조를 위한 자리는 없었다. 라이프치히 대학의 대대적인 캠퍼스 개축을 준비하는 총장은 “우리는 그 부조가 계속해서 대학을 내용적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인상을 피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요구를 담은 그 ‘선전 예술품’이 오늘날까지 대학에 걸려 있어 “라이프치히를 방문하는 세계인의 웃음거리가 된다”는 것이다.

한술 더 떠 라이프치히의 기민당 청년 조직은 “마르크스 부조가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고 못박았다. 그 조형물이 동독의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도그마와 학문적 부자유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동독 정권이 사악한 목적으로 자신의 이름과 사상을 오용한 사실을 알았다면 “마르크스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났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옹호자들은 다른 견해를 펼쳤다. 마르크스 부조가 동독시절 선전 이데올로기의 산물임이 분명하지만 보존할 가치가 있는 ‘역사적인 문화재’라는 것이다. 당시 5년간 부조의 제작에 참여한 한 예술가는 “로마에서 황제가 바뀔 때마다 모든 것을 깨끗이 청소해버렸다면 누가 지금 로마를 찾을 것인지” 물었다. 라이프치히 박물관 관장은 거대한 부조를 몇 개로 쪼개서 도시 곳곳에 설치하는 방안을 내놓기도 했지만, 막상 그 ‘동독산 기념물’을 박물관에 받아들이고 싶어하지는 않았다.


마르크스 부조는 지난달 21일 결국 대학본관에서 철거되었다. 30년 보금자리를 떠나는 라이프치히 대학의 마르크스는 폐기처분을 면하는 대신 4조각으로 나뉘어 대학 가장자리에 걸리는 신세가 되었다.

여하튼‚ 말년에 스스로 ‘나는 마르크주스의자가 아니다’고 말한 마르크스가 다름아닌 마르크스주의자로 자처한 동독 전체주의 정권의 선전 기념물로 둔갑한 것은 묘한 ‘역사적 아이러니’다.


이제 마르크스가 19세기에 몇 년간 학창시절을 보낸 베를린 훔볼트 대학으로 가보자. ‘근대적인 대학의 어머니’로 불리는 훔볼트 대학 본관에 들어서면 누구든 마르크스의 인사를 받는다. 그의 유명한 글귀가 현관 정면에 준엄하게 새겨져 있는 탓이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왔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수없이 인용된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 테제 11번’은 좋든 싫든 그렇게 지난 50여 년간 훔볼트 대학의 손님들을 맞이하는 얼굴이었다.

훔볼트 대학은 동독 시절인 1953년 마르크스 탄생 135주년에 맞춰 이 기념물을 만들었다. 동독 정부가 선포한 ‘마르크스의 해’에 발맞춘 것이었다. 1989년 동독이 무너지고 기념물 제거를 둘러싼 논쟁이 몇 차례 불붙었지만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 테제 11번은 줄곧 훔볼트 대학을 떠나지 않았다.

최근, 2010년으로 다가온 훔볼트 대학 2백 주년 기념 준비를 앞두고 다시금 마르크스의 이 유산을 둘러싼 논란이 일었다. 상황은 전보다 나빴다. 동독시절의 비슷한 기념물인 라이프치히 대학 마르크스 부조의 철거가 이미 결정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훔볼트 대학 본관에 박혀 있는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 테제 11번'
훔볼트 대학 본관에 박혀 있는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 테제 11번'강구섭
훔볼트 대학 총장도 자기 대학에 설치된 마르크스 기념물을 별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세계를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철학자의 말로는 합당치 않다”는 것이다. 대학은 “해석에 우선성을 두어야” 한다는 논리다. 그는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 테제 11번은 “훔볼트 대학이 3백 년으로 나아가며 동반하기를 바라는 슬로건이 아니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적잖은 철거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 대학의 ‘마르크스 유산’은 라이프치히 대학과 달리 그 자리에 보존될 예정이다. 적갈색 대리석 위에 황동으로 새겨진 마르크스의 글귀가 문화재로 보호되고 있다는 점이 한 몫 했다. 그래도 앞으로 마르크스가 훔볼트 대학 본관에서 ‘얼굴마담’ 노릇을 계속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 대학 출신 유명 인물들의 글귀가 마르크스의 테제와 나란히 현관을 장식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세계를 해석하는 대신 변화시키자’는 마르크스의 테제는 사실 많은 68세대 독일 교수들의 좌우명이기도 했다. ‘변화의 열기’로 꿈틀댄 68운동의 세례를 받고 대거 학계로 진출한 그들은 대학을 행동하는 비판적 지성의 산실로 바꾸려는 꿈을 대변했다. 이제 68세대가 대학에서 은퇴하는 시점과 맞물리며 ‘변화의 열망’을 아로새긴 그 상징물까지 점차 대학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듯하다.

하지만 훔볼트 대학의 마르크스 기념물도 무엇보다 ‘동독산’이라는 부담을 안고 있다. 동독 시절 비판적 지성의 역할을 팽개치고 독재정권의 나팔수로 전락한 대학의 ‘부끄러운 역사’와 동독 전체주의 정권의 ‘어두운 역사’가 마르크스의 어깨를 누르고 있는 것이다.

결국, 동독 정권이 마르크스의 이름으로 얻고자 한 권위는 마르크스의 짐으로 뒤바뀌고 말았다. 독일이 낳은 그 ‘역사의 거인’이 다시금 동독이라는 ‘역사의 짐’을 지게 된 셈이다. 마르크스가 벗어야 할 짐은 어쩌면 현실사회주의에서 만들어낸 수많은 ‘비둘기 놀이터’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울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참세상>에 실린 필자의 글입니다

덧붙이는 글 <참세상>에 실린 필자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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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부산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로 있으며, 저서로는 『68혁명, 상상력이 빚은 저항의 역사』, 『저항의 축제, 해방의 불꽃, 시위』(공저), 역서로 『68혁명, 세계를 뒤흔든 상상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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