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우리의 한옥을 망치고 있다.

한옥에 관한 왜곡된 인식을 제대로 이해하기

등록 2006.09.16 12:27수정 2006.09.16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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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대학의 건축학과 졸업반 학생이 제게 말했습니다.
"대학 4년동안 우리네 전통건축에 관한 강의는 채 2시간도 안되었던 같습니다"
흔히들 '건축'하면 아파트나 빌딩, 콘크리트나 슬라브 주택을 떠올리게 되는데 우리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냈으면서 우리네 부모님이 생활했고 또 그 부모님이 사셨던 우리들의 옛집은 "한옥", "전통건축", "고건축" 운운하며 아주 특별한 대접을 받고있습니다. 거기다 부제까지 달아 '아주 비싼 집', '겨울에는 무지하게 추운 집', '생활하기에 불편한 집' 등등의 꼬리표가 언제나 따라붙게 마련이지요. 말하자면 이 특별한 대접이 평가절하된 상태에서 일반적으로 현실적으로 '건축'이라는 말과 전혀 동떨어진 개념으로 전락하고 만 연유는 무엇일까요?


지난 세기의 60년대 말과 70년대 초에 시작된 경제부흥 정책의 일환인 이른바 '새마을운동'이 온 국민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가고 있었는데 이 때 부터 초가지붕을 무너뜨리고 황토벽을 헐고 나아가서 군불지피던 아궁이를 부수어 대한민국의 근대화 사업을 시작하면서 한옥의 평가절하, 한옥의 수난시대는 도래했던 것입니다.  

당시의 시대 상황이 상황인 만큼 절실했던 육림정책이나 절대빈곤의 타파가 최우선 과제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근대화 사업이라는 미명하에 짚이엉이나 갈대로 엮여진 지붕이 스레트나 양철지붕으로, 원적외선이 그득히 방안을 맴돌게 했던 황토벽이 세계 최고의 6가크롬이 방출된다는 우리네 국산 시멘트 벽으로 또한  환경오염이란 것은 눈을 씻고 봐도 없는 아궁이를 연탄과 석유로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육림을 이유로 전국의 산지에 아카시아 씨를 마구 뿌렸듯이 그렇게 우리의 농촌도 마구잡이로 지붕과 벽을 헐고 여기에 더하여 싸리나무나 산죽으로 엮은 구수하고 정감넘치던 울타리, 토담, 돌담장을 마구잡이로 뜯어내고 대신 그 자리에다 시멘트 담으로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마치 군대가 사열대에서 열병식을 치르듯이 말입니다. 하기사 문화재 복원도 시멘트로 했던 시절이었으니까 까짓 민초들의 찌그러진 집들이야 뭐 작전을 진두지휘하는 총사령관의 눈에는  뵈는게 없었겠지요.

나무하면 강원도 육송이 최고라는 말이 있습니다. 당연한 말일 것입니다. 그 향(香)하며 무늬, 목질 어느 것 하나 버릴데가 없지요. 외국에서 들여오는 수입목이 현재처럼 japan grade다 china grade다 하여 4~5등급으로 분류되는데 그 중 가장 저급품이 판을 치는 국내에서는 상대적으로 국산 육송을 따라 잡을 수입목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수 천, 수 만 마일 떨어진 곳에서 수입된 나무보다 월등히 가격이 높은 것 외에는요. 국토의 2/3 이상이 산지인 나라에서 그것도 대대적이고 강력한 리더쉽을 가진 당대의 정부가 산림녹화정책을 편 지 벌써 40년, 허울뿐인 녹화성공이 가져온 결과는 국내 목재사용량의 90% 이상이 수입목이란 서글픈 현실인 것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자업자득으로써 우리 스스로가 뿌린 씨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또한, 졸부 근성을 가진 일부 국민들이 수 백년 전에 조상님들이 제정해 놓은 건축법을 무시하고선 일본 제국주의의 앞잡이가 되어 민초들의 삐를 빨아다가 '황국신민'이다 '내선일체'다 하여 갖은 아부를 다 하던 중에 덩그러니 대궐같은 집을 짓고 기품있고 과학적이던 우리의 한옥을 농락하는 시발점이요 견인차가 되어 마치 허수아비가 양복을 입듯 꼴볼견인 작태를 연출하기 시작함으로써 머릿속은 텅 비어있고 껍데기만 그럴싸한 '졸부근성'내지는 '천민의식'이 이 때부터 발로되지 않았나 합니다.

안동의 하회마을이나 경주의 양동마을에 가 보십시오.  어디 어떤 자리에 그런 집들이 서 있는가 말입니다. 신라시대때 부터(삼국사기 옥사조) 시작된 건축법은 그 명맥이 고려에 이어져 오다가 조선시대 세종조 13년에서 성종 9년(1498년)에 완성되어 1910년 일본의 우익 과격분자들과 우리네 협잡꾼들의 사기.공갈극으로 패망하기까지 명실공히 1,000년 이상을 족히 지켜져 온 법규인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신분에 따라 칸(間) 수의 제한, 방의 사이즈, 기둥의 높이, 두께 등 좁은 국토의 산림을 보호하고 신분의 상하를 구별하기 위하여 엄격하게 시행된 강행법이었음을 하회마을이나 양동마을의 집들을 보면 분명히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전국에 산재한 일제 이후에 건축된 한옥들은 완전히 그 법규를 무시하고 제 멋대로 지어지게 되는데 "기둥의 높이가 서민은 8尺(240cm) 양반은 9尺(270cm), 두께는 서민 4寸(12cm), 양반이 5寸(15cm)...등의 구체적인 규정이 완전히 와해되어 황국신민이다 내선일체다 하는 신 부흥족들은 기둥의 높이가 보통은 10자 이상, 두께는 최소가 6寸를 넘으니 그 후손들인 현재의 신민들은 뒤를 이어 너도 나도 본을 떠게 된 것입니다. 방의 사이즈 또한 와해되어 서민이나 양반들이 동일하게 9尺이던 것이 지금은 앞을 다투어 규모를 키워 지금은 20尺이 넘는 것도 허다한 현실이고 여기다 소로는 물론이고 익공집에다 포집까지 궁궐인지 절집인지 어느 문중의 사당인지도 모를 살림집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 과거 일제시대는 차라리 점잖았다 싶을 정도로 외형만 커지고 있는 것이 요즘의 한옥입니다.

서까래 밑에 도리, 도리밑에 장여, 장여밑에 창방, 창방밑에 상인방, 그 밑에 중인방, 그 밑에 하인방, 어디 이 뿐입니까?  벽선에 문선에 소로에 익공(초익공에다 2익공에다), 심지어 포집까지 또, 또... 뒷 산 절집에 있는 부재는 다 넣고 그것도 모자라 대궐집에 있는 수장재는 있는대로 갖다 발라야 하는 것이 요즘 한옥의 특징입니다. 절에 사는 부처인지 대궐에 사는 임금님인지도 모를 정도로요. 나무가 많이 사용된 집일수록 그 사이 사이로 스미는 찬바람은 많아 질 것이고 양이 많은 것 만큼 나무값과 인건비가 비싸진 다는 것은 아예 안중에도 없는 듯이 말입니다. 점잖은 옛날 양반님네가 언감생심 이런 집을 짓고 살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하니, 각각의 부재 사이에서 틈은 생기게 마련이고 방의 사이즈는 커진데다가 기둥이 90cm 이상 높아지고 집의 형태 또한 변화되어 당시에 근간을 이루던 3량집이 5량, 7량으로 늘어나 전체의 높이가 최소 1.5m~2m 이상 높아졌으니 겨울에 춥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거기다 옛날 굴뚝들을 보면 집안의 연기가 바깥으로 새는 것이 동네에 누가 된다하여 굴뚝을 낮추어 설치하고 마당 가득 은은하게 퍼지는 연기를 바라보면서 마치 신선이 구름을 탄 양 절제하면서도 道를 즐겼던 선조들과는 달리 지붕보다 더 높이 설치하여 아궁이에 든 군불이 금방 타버려 밤 하나을 못넘기게 만드니 냄비같이 변한 구들장이 어찌 새벽녘 찬공기를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일제시대의 졸부들이 엄동설한에 남모르게 휑하게 큰 방 안에서 추위와 씨름하며 졸부적 품위를 지키려고 애쓰던 모습이 마치 T.V속에서 코메디안극을 보는 것 같이 눈에 훤합니다. 자업자득이지요

"한옥이 비싸다" 이 말도 분명히 맞는 말입니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습니다만 짧고 적당한 두께의 기둥과 도리, 보만 있으면 한 채의 집이 넉넉히 지어 지던 옛날(일제 이전)과는 달리 조선의 건축법이 무너지고 너도 나도 경쟁적으로 - 이 것은 현재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 보다 두껍게 보다 길게 보다 많은 치장재를 사용하여 짓다 보니 그걸 치목하는 목수들의 인건비 또한 비싸질 도리 밖에요.

일반 서민이 살았던 집들은 굳이 말 할 필요도 없고 양동마을이나 하회마을 등의 기품있던 양반님네 동네에 가보면 서까래의 굵기가 팔뚝만한 것에서부터 엄지손가락 굵기 정도에 이르기까지 현대인들을 놀라게 하는 건축물들을 많이 볼 것입니다. 저 굵기로 어떻게 지붕위의 그 두꺼운 흙하며 기와의 무게를 버텨낼 수가 있었을까? 그것도 수 백년 동안이나...하고 의구심을 품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줄로 압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서까래의 굵기가 옛날엔 보통 좋은 집이라 해야 3寸이나 3.5寸 이하이던 것이 4寸에서 5寸로 이제는 그것도 모자라 6寸 짜리까지 나오는 마당입니다. 한옥을 장려하고 있다는 어느 지방 정부에서 공관으로 지은 한옥에서까지 6寸 짜리를 사용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이거 이래도 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서까래가 그러하니 다른 부재는 오죽하겠습니까? 한옥을 장려하려는 것인지 일반인들의 기를 죽이려는 것인지? 멀리도 아니고 나라가 망해가던 100년 전으로만 거슬러 올라가서 그 시절의 지방 감영과 한 번쯤 비교해 보는 양심이 있었으면 합니다. 이렇듯 나무의 양만 예전에 비해 갑절 이상이나 많이 사용하는데 그 인건비 또한 갑절 이상이 비싸질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거기다 거주 공간이 가로, 세로, 높이가 한결같이 늘어나니 춥다는 말을 할 수 밖에요. 흔히 단독주택의 난방비가 아파트보다 훨씬 많이 든다고 하는데 마찬가지로 동일한 공간이라고 한다면 제대로 지은 한옥과 요즘의 단독주택과의 난방비 차이는 상당할 것입니다.

또 있습니다.
6~70년대 이후 절집이 우리 한옥의 명맥을 그나마 유지시켜 왔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인데 참 고마운 일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실수한 점은 노동력의 낭비를 줄이기 위한 스님들의 절묘한 품값 계산법이 어쩌면 한옥을 비싸게 만드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것은 나무의 재적수에 따른 인건비 계산법인데 지금은 일반인들도 덩달아 이런 계산법을 원용하고 있습니다. 나무 한 材(가로×세로×길이=1寸×1寸×12尺)에 인건비를 1500원이다 2000원이다 하는 식의 계산법이 바로 이 것인데 한옥이 대세에 밀려 겨우 명맥을 유지해 나가고 있던 시기에 목수들의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을 것입니다. 이 것을 목수들은 역이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3寸 서까래나 5寸서까래나 깎는데 걸리는 시간이나 노동력은 별 차이가 없는 것이고 이보다 덩치가 더 큰 쪽으로 가면 예컨데 대들보 쪽으로 가면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해지는 것이지요. 기술적으로 뛰어난 도목수가 역학적인 구조를 들고 천민근성을 자극시켜 한마디만 부채질하면 부재는 쉽게 커지고 많아지기 딱 쉽상인 계산법이 바로 이 방법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나 할까요?

어느 지방에서 2층으로 지은 멋진 식당을 구경하다가 그 집의 서까래 끝에 덧 댄 부연을 보고 저으기 놀란 적이있습니다. 정확하게 치수를 잴 수는 없었지만(워낙 높아서) 아마도 옛날 양반님 댁의 기둥치수보다 훨씬 커보였던 것입니다. 반면에 벽체는 시멘트 벽돌로 조적을 한 것을 볼 수가 있었는데 참으로 어이가 없는 광경이었지요. 부연, 뜻 그대로 서까래 끝에 덧 댄 보조서까래라는 말인데 이것의 크기가 이러하다면 전체적인 부재의 크기는 어떠했을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여기에다 사람들이 실제로 거주하는 공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이런 값싸고 형식적인 자재를 쓰고 있는 것이 작금의 한옥 건축현장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남들이 물으면 "평당 1,000만원이 들었네, 2,000만원이 들었네" 하며 목수 탓과 더불어 탄식조 비슷한 어조로 은근히 자랑을 하니 내막도 모르는 일반인들이야 껍데기를 보면 탐이 나고 안에 들어가 보면 한겨울에는 찬바람이 쌩쌩불고 삼복더위에는 기와의 열기가 내려앉아 한증막 같이 더운 것 아니겠습니까?  이리하여 우리의 자랑거리요 세계에서 으뜸가는 목조주택 한옥은 "한옥은 춥다", "비실용적이다" 등등의 부제가 늘 붙어다니는 것이 아닌가 싶어 씁쓸한 가슴을 쓸어내려 봅니다.

전통건축에 권위가 있으시다는 어느 대학의 건축학과 유명 교수님께서 관심있는 분들이 수 백명 모인 자리에서 하신 말씀이 뇌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 집을 한옥으로 짓는데 평당 2,000만원이 들었다. 요즘 목수들의 인건비가 너무 비싸니 한옥이 제대로 활성화되지 않고 있다."  이 교수님께 이렇게 묻고 싶었습니다. "교수님 댁의 기둥과 서까래는 몇 치 짜리를 쓰셨습니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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