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대학교.안윤학 기자
어느 것이 그 상황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인지를 분별하는 것, 그것은 인간의 양심의 문제이다. 이찬수 교수의 행위가 드러나는 현상만으로 보자면 불상 앞에 절한 행위이니 우상숭배이지만, 그가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그랬는지를 먼저 따져봐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난 후 그가 개인적 이익을 위해서 그리했다면 그는 기독교교리는 물론이고 보편적인 도덕에도 반하는 행위를 했기에 비판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관용을 보여주자는 의미로 갈등과 대립을 종식하고자 하는 자신의 신앙적 양심에 의해 행동이었다면, 그것은 단순히 불상숭배를 했다는 것을 넘어 다른 차원의 문제로 봐야 할 것이다.
혹자는 이찬수교수의 불상에 절한 행위를 일제식민지하에서 신사참배를 한 것과 비교해서 비판을 했던데, 한마디로 어이가 없다. 신사참배가 일본의 종교에 대한 예를 표하는 것이었다면 모를까, 그것은 일본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의례였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교수가 불상 앞에 절하면서 자신의 기독교를 비난하면서 불교로 개종하겠다고 선언을 했으면 모를까? 그는 여전히 지금도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고 있다. 아무리 그의 행위가 기독교적 선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해도 너무 터무니없는 비교이다.
이 교수는 그는 자신이 불상에 대해 예를 표한 것은 단군 신상을 파괴하는 극단적인 기독교의 배타성에 경종을 울리고자 하는 마음과 평소 이 교수가 신앙하는 그리스도의 참모습은 관용과 사랑이라는 자신의 신학적 이론을 몸소 보여주고자 했던 것 같다.
물론,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방법에 있어 이 교수의 행위가 과연 적절했는가 하는 문제는 충분히 논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러한 논쟁이 기독교는 물론이고 타종교와 공존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매우 바람직할 것이다.
그런데 학문적 논쟁은 고사하고 단칼에 정죄하니, 타종교와 공존하고 있는 우리 현실에서 기독교는 점점 고립되고 비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왜? 불상에 절하면 안 되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기독교가 왜, 정체성을 잃어버리는지 그것에 대한 활발한 논쟁이 있어야만 기독교계가 그렇게 우려하는 이찬수 교수 같은 신앙인들이 다시는 나오지 않을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