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주몽>, 어디로부터 왔는가?

22년 전 소설, <단(丹)>에 관한 추억

등록 2006.09.18 11:52수정 2006.09.18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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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1985년 베스트셀러였던 소설 <단> 표지.

1985년 베스트셀러였던 소설 <단> 표지. ⓒ 정신세계사

최근 몇 년 동안 역사극이 TV 드라마를 이끌고 있다. 한동안 <다모>로 대표되던 '퓨전'이 유행이었다면 2006년 각 방송국들은 약속이나 한 듯 '민족사학'으로 몰아치고 있다. 이들 역사극들은 이른바 '재야사학'이라 불려왔던 입장들을 대폭 수용해서 <삼국사기>를 멀리하고 <한단고기>를 즐겨 인용하고 있다.

SBS <연개소문>의 경우 고구려가 배달국을 이어받았다고 설명하며 일종의 관직으로 해석되어온 '조의선인'을 선도와 무도를 함께 닦는 집단으로 묘사했다. MBC <주몽>도 한나라에 맞섰다는 '다물군'을 등장시켰다.


드라마 성격이나 형식으로 본다면 <연개소문>과 <주몽>은 많은 차이가 있지만 민족사학을 바탕으로 했다는 점과 그런 입장을 중국과 전쟁을 벌이는 것으로 표현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조금 부풀려서 이야기 하면 2006년 방송가에 불어 닥치고 있는 역사극 열풍은 22년 전 한 권의 책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오늘 오랜만에 책장에서 꺼내어 읽은 '장편선도소설(長篇仙道小說)' <단(丹)>이 바로 그 책이다.

초판 발행일은 1984년 11월로 되어 있고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1985년 2월에 펴낸 15판이다. 불과 석 달 사이에 15판이라니 당시나 지금 기준으로도 대단한 베스트셀러다. 누나들이 생일 선물로 사 준 책이었는데 누나들 역시 이런 분야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 베스트셀러였기 때문에 골랐을 것이다.

a 소설 뒷면에 실린 우학도인의 모습. 책에서 권필진으로 등장했던 봉우 권태훈 선생은 현재 고인이 되셨다. 去去去中知, 行行行裡覺는 선생의 좌우명.

소설 뒷면에 실린 우학도인의 모습. 책에서 권필진으로 등장했던 봉우 권태훈 선생은 현재 고인이 되셨다. 去去去中知, 行行行裡覺는 선생의 좌우명. ⓒ 정신세계사

소설 <단>은 필자의 분신인 듯한 '나'라는 인물이 '우학도인'을 만나는 이야기다. 우학도인은 근대 한국 도인들의 맥을 잇는 마지막 인물로 자신이 경험했던 도인들의 이야기와 수련법을 전하고 있다. 소설 <단>을 이루는 큰 줄기는 두 가지로 선도 수련에 대한 이야기와 사대주의를 뿌리치는 민족사학에 대한 이야기다.

선도소설을 표방했지만 소설 <단>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무래도 민족사학에 대한 내용들 때문이라 생각한다. 소설 <단>은 재야사학자의 입을 통해 삼국사기의 사대주의를 파헤치고 중국과 일본에 의해 자행된 역사말살을 고발하면서 우리가 알지 못했던 상고사 이야기를 펼친다. 여기에 우학도인의 예언을 빌어 앞으로 '우리 백두산족'이 세계를 이끌며 큰일을 할 것이라 덧붙인다.


소설 <단>에 언급된 이야기들은 새롭게 발굴된 것은 아니다. <조선상고사>나 그것이 바탕으로 삼고 있는 <한단고기>에서 온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저자는 맥이 끊어져 생소해진 이야기를 대중소설이라는 편안한 틀로 되살렸다. 그래서 큰 반향을 불러 온 것이 아닐지.

저자는 1984년 LA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대표선수들이 대거 금메달을 따오며 민족적 자부심이 높아졌다고 적고 있는데 이런 배경 역시 소설 <단>이 돌풍을 일으키는데 큰 역할을 했으리라.


소설 <단>이 제시한 두 가지 흐름은 모두 살아남아 지금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단전호흡 정도로 불리던 것이 단학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며 몇몇 단체를 통해 퍼져 나갔고 그중 일부는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했다. 명상이나 요가 등 심신수련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 역시 소설 <단>이 중요한 발판을 마련해 줬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소설 <단>이 불을 지핀 덕에 <한단고기>를 찾는 사람도 늘었고 민족사학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물론 소설에 대한 관심만큼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간 것은 아니지만 고구려나 고조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거나 '다물'같은 단어들이 널리 퍼지게 된 것, '삼족오'같은 상징물이 익숙하게 쓰이게 된 것이 소설 <단>의 영향력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a 조의들과 수련을 하고 있는 연개소문. 드라마 <연개소문>은 민족 고유의 심신수련법과 민족사학 관점을 모두 수용하고 있다.

조의들과 수련을 하고 있는 연개소문. 드라마 <연개소문>은 민족 고유의 심신수련법과 민족사학 관점을 모두 수용하고 있다. ⓒ SBS

물론 드라마 <연개소문>이나 <주몽>은 민족사학을 전면에 걸고 그것을 알리는 목적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소설 <단>에서 민족사학을 부르짖으면 그것은 하나의 견해로 받아들여지고 그저 '재야사학'이라 여기면 그만이지만, 방송에서 설정된 '조의선인' 이미지는 다른 매체로 옮겨갈 가능성이 크고 가설 중 하나가 아니라 상식처럼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이 드라마들이 앞으로 끼칠 영향력은 만만치 않다.

현재 방송을 이끌고 있는 이들이 바로 이 소설 <단>을 통해 <조선상고사>나 <한단고기>를 소개받은 세대라는 점을 떠올려 본다면 <연개소문>이나 <주몽>에서 소설 <단>이 되살린 상고사에 대한 적극적 해석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한겨레신문 경제부 권태호 기자는 2005년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 글에서 '치우천왕'을 소개하며 <삼국사기>에 대해 "구역질난다"는 표현을 썼다. 그 역시 '1985년 소설 <단>을 접한 것'을 중요한 계기로 기억하고 있는데 사실 이런 경험은 그만의 특수한 경험이 아니라 1985년 소설 <단>을 읽은 많은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소설 <단>이 뿌린 씨앗은 크게 자랐으나 소설 <단>의 주인공들은 그런 흐름을 타지는 못했다. 우학도인으로 소개된 권태훈 선생은 연정회를 결성해서 후진을 양성했지만 원칙에 철저한 수련법을 이끈 탓에 현대적인 기법을 도입한 다른 단체들에 비해 크게 세를 넓히지는 못했다. 저자 김정빈씨는 선도와 불교를 넘나들며 명상관련 책들을 꾸준히 발표했고 최근에는 명상을 바탕으로 한 리더십 강의를 했다.

a 베스트셀러 소설을 등에 업고 만들어진 영화 <단>은 뜬금없는 공중부양 장면이 보여주듯 난감한 사회고발 액션영화가 되어 버렸다.

베스트셀러 소설을 등에 업고 만들어진 영화 <단>은 뜬금없는 공중부양 장면이 보여주듯 난감한 사회고발 액션영화가 되어 버렸다. ⓒ 태창흥업

소설 <단>은 1986년 영화로 만들어지지만 어설픈 액션영화처럼 만들어져 그리 흥행하지는 못했다. 책을 펴낸 '정신세계사'는 이 분야를 대표하는 출판사로 다양한 책들을 꾸준히 펴냈고 한때 명상관련 교육기관도 운영했지만 소설 <단>에 버금가는 베스트셀러를 내지는 못했다. 사실 대중 소설로 보건 명상이나 역사라는 분야로 보건 소설 <단>같은 폭발적인 흥행 자체가 한 출판사가 자주 만나기는 어려운 '초대박'이지만.

20년 묵은 소설 <단>은 종이도 누렇게 되고 눅눅한 냄새도 나기 시작했다 이 책에 심취해서 장풍으로 촛불 끄겠다고 밤새워 숨을 모아 초를 노려보던 어린 시절이 떠올라 한참을 웃었다. 당시 이 책이 유명하다는 얘긴 들었지만 사 볼 생각은 없었고 누나들 선물이 아니었다면 읽을 계획도 없었을 텐데 베스트셀러가 된 탓에 내 손까지 흘러 들어왔고 사실 고백하자면 나 역시도 이 책을 읽으며 심신수련과 민족사학을 알게 되어 지금도 그 영향 아래 있다.

소설 <단>은 정신세계사 나름의 스테디셀러로 2000년에도 시내 대형서점에서 새로운 표지로 본 기억이 있다. 지금은 대부분 품절 상태라 하는데 재고가 남아 있는 서점, 대학 도서관, 헌 책방 등 발품을 좀 팔면 아직은 만날 수 있다. 1985년 소설 <단>으로 맺어졌던 전우들이라면 이 책이 집 어디에 있나 한 번 찾아보는 것은 어떠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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