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그럽고 떼굴떼굴 굴러가는 유년 동화

<할머니 집에서>

등록 2006.09.20 15:31수정 2006.09.20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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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림출판사

보림출판사에서 펴내는 ‘보림어린이문고’ 14권 <할머니 집에서>가 나왔다. 글쓴이는 이영득 선생님이고, 그린이는 김동수 선생님이다. 초등학교 1-2학년용 동화책인 <할머니 집에서>는 주인공 ‘솔이’가 시골 할머니댁에서 맞닥뜨린 네 개의 이야기가 엮여 있다. 도시 아이인 솔이가 아버지가 태어나 자란 시골 할머니 댁에서 만난 자연과 농촌의 삶은 평소 솔이가 겪어보지 못한 신기하고도 흥미진진한 이야기이다.

유년동화 <할머니 집에서>에는 '내 감자가 생겼어요' '또글또글 망개 목걸이' '말 잘 듣는 호박' '꼬꼬꼬, 닭이 아파요'라는 네 편의 동화가 실려 있다. 글쓴이 이영득님의 이야기의 본질을 단도직입적으로 파고드는 단순명쾌한 문장과 그리고 재미난 화법으로 네 편의 이야기는 풀빛 망개(청미래덩굴 열매)같이 싱그럽고 떼굴떼굴 잘 굴러간다. 여기에는 그림 일기장에서 가져온 듯한 천진난만한, 보면 볼수록 그냥 실실 웃음을 짓게 만드는 김동수 선생님의 독특한 그림 솜씨가 한몫을 하고 있다.


빼뚤빼뚤한 글씨와 아이들이 즐겨 쓰는 연필과 색연필을 재료로 그린 천진난만한 그림은 마치 어린아이가 직접 그린 그림 같다. 언뜻 보기엔 단숨에 쓱쓱 그려 버린 것 같지만, 책장을 넘기다 보면 그것이 결코 허투루 그린 그림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런 그림 속에는 개구쟁이 어린 아이의 마음을 그대로 담고 있다. 가령 21쪽의 감나무 뒤에 숨은 상구에게 망개 열매를 집어던지기 위해 살금살금 까치발을 들고 가는 솔이 모습에 “기다려라. 히히히” 말풍선을 단 거며, 47쪽 상구네 닭의 파란만장한 곡절을 유아용 교재에서나 볼 수 있는 ‘그림 연결하기’로 한눈에 들어오게 처리한 것들이 그 좋은 예들이다.

자꾸 이런 저런 설명을 늘어놓는 것보다 직접 동화 한 편을 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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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식구는 토요일이면 할머니 집에 자주 가요. 할머니 집은 시골이에요. 마루에 서면 산만 보여요. 나는 할머니는 좋은데, 시골은 싫어요. 할머니랑 엄마 아빠는 밭에 가서 일만 하고, 나는 같이 놀 동무도 없고 심심해요. 참, 내 또래가 있긴 해요. 할머니 뒷집에 사는 상구요. 그런데 나만 보면 숨어요, 바보같이.

아까 저녁을 먹는데, 전화가 왔어요. “솔이냐? 할미다. 내일 할미 집에 올 끼가? 솔이 감자 솔이가 캐야제?” 다른 때 같으면 가기 싫다고 했을 텐데, 내 감자가 생각나서 얼른 간다고 했어요.


내 감자가 생신 건 한 달도 더 앞이에요. 할머니네 감자 밭을 지나는데, 이랑마다 감자 꽃이 하얗게 피어 있었어요. 그런데 자줏빛 꽃 하나가 눈의 띄었어요. “히야!” 자줏빛 꽃을 보니, 고구마가 생각났어요. “할머니, 저기에는 고구마가 많이 달려?”이랬더니 할머니랑 아빠가 막 웃었어요. 엄마는 고개를 갸웃했어요.

아빠가 웃으며 말했어요. “어무이, 저 감자에 뭐가 달리나 수수께끼 내입시더.” “그라까? 솔이랑 어멈이 맞출랑가” 엄마는 고개를 절레절레, 그래서 내가 말했어요. “할머니, 지금 캐면 안 돼?” “때 되마 솔이가 캐면 되제.” “그럼, 저거 내 감자 할 거야. 할머니가 잘 가꿔야 돼!” “오야 오야. 자주 꽃 핀 감자, 이제 솔이 끼다.” 그래서 내 감자가 생긴 거예요.


토요일. 고속도로를 달리다 작은 길로 빠져 나왔어요. 할머니네 마을 이름이 새겨진 바위가 보였어요. 골짝을 따라 길도 꼬불꼬불, 아름드리나무도 많았어요. 나는 할머니 집에 가자마자, 감자 캐러 가자고 졸랐어요. 호미 들고, 자루 메고 밭으로 갔어요. 그런데 감자 꽃이 다 져 버렸어요. “할머니, 내 감자 어딨어?” “꽃이 없으이 할미도 모르겠네. 저깅가? 다 캐면 솔이 감자 표 날 테니 기다리 봐라.” 할머니는 맨 앞 이랑에 앉아 감자를 캐기 시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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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암

아빠는 다음 이랑, 엄마는 그다음 이랑에 앉았어요. 나는 내 감자를 찾으려고 아무 감자나 막 뽑아 봤어요. 조금 뒤, 할머니 뒤에 감자가 수북이 쌓였어요. 아빠 엄마 뒤에도 감자가 쌓였어요. 하지만 표 나는 감자는 없었어요. “치!” 나는 골이 나서 감자 하나를 홱 던졌어요. 감자는 캐지 않은 이랑에 툭 떨어졌어요.

“솔아, 그라믄 못씬다! 그 잠자, 할미 혼자 가꾼 거 아이다.” 할미가 머릿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말했어요. “그럼 누가 또 가꿨어?” “가랑비랑 이슬, 뙤약볕도 가꿨제.” 그때였어요. 할머니 뒤에 흙이 포슬포슬 올라오는 게 보였어요. 나는 깜짝 놀라 소리쳤어요. “할머니, 큰일 났어! 땅이 막 올라와!” “두더지구마. 솔이가 감자를 떤지서 놀랬는갑다.” “참말로 두저지야?” 두저지가 지나온 자국이 캐지 않은 이랑까지 이어져 있었어요. 나는 호미를 들고 두더지를 쫓아갔어요.

두더지는 여기저기 파헤치고 다녔어요. 나도 여기저기 파헤치고 다녔어요. 놀란 두더지가 이 구멍 저 구멍 머리만 쏙쏙 내밀다가, 어느새 땅속으로 숨어 버렸어요. “에이, 가 버렸어.” 나는 두지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감자 밭을 휘 둘러보았어요. 그러다 자줏빛 감자 하나가 두더지 굴 옆으로 삐죽 나온 걸 보았어요. “와! 할머니, 이것 좀 봐!” 나는 감자를 주워서 높이 들어 보였어요. “오야 오야! 솔이 감자구마.” 나는 내 감자를 포기째 뽑았어요. 그랬더니 자주감자가 주렁주렁 딸려 나왔어요. 나는 두더지 굴에 대고 소리쳤어요. “두더지야, 잠깐! 이거 하나 갖고 가.”
-'내 감자가 생겼어요' 전문.


인용한 동화에서 보듯 작가 이영득은 천진난만한 꼬마 아이 솔이 뒤에 숨어서 아이 눈에 비친 농촌 이야기를 과장됨 없이 재미나게 들려주고 있다, 그러나 네 편의 이야기에는 생명을 존중하고 자연과 함께 하고자하는 작가 이영득의 철학이 오롯이 담겨져 있다.

그것이 직접적이거나 노골적인 교훈담이 아니고 솔이의 할머니 말을 통해서, 또 농촌 생활 하나하나에 눈을 떠가는 솔이의 마음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표현되고 있다는 데 이 책의 장점이 있다.

순수한 어린 아이 ‘솔이’의 마음에 새겨진 농촌의 빛깔을 진솔하고도 건강하게 그려낸 동화책 <할머니 집에서>. 이는 어린 아이들에게는 자연이 주는 고마움과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어른들에게는 잊고 지낸 동심(童心)을 만나게 해주는 귀중한 책이다. 그렇다. 동심을 그려내고 있는 동화책은 자연과 생명의 존귀함을 우리에게 가만히 일러주는 철학책과도 같은 책이다.

할머니 집에서

이영득 지음, 김동수 그림,
보림,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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