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룡의 독룡조를 익히면 한 가지 특징이 남게 된다. 양 겨드랑이 밑에 동전만한 검은 반점이 생기게 되지. 하지만 십성에 오른 자라면 그 반점도 사라지게 된다.”
그는 다시 한번 서교민의 사인이 독룡아라고 불리는 독룡조에 의한 것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익힌 자에게 나타나는 특징을 말해 줌으로서 흉수를 잡는 단서를 준 것이다.
“신태감...!”
“말씀하시지요.”
“이 사건을 신태감께 모두 맡기고 싶어도 그러지 못할 것 같네.”
신태감도 어느 정도 각오한 일이었다. 사인을 보는 순간 아무리 자신이 우겨도 자신들만 움직일 일이 아니었기에 현장을 보존하고 운중보주를 부른 것이다.
“본관이 어찌 보주의 뜻을 거역하겠소이까. 다만 이곳 본관의 수하들에 대한 조사는 경첩형이 맡고, 그 외에는 보에서 하시면 어떨까 하오이다.”
아무리 운중보 내라지만 동창의 무사들을 운중보에서 조사한다는 것 역시 어려운 일. 운중보주는 흔쾌히 동의했다.
“신태감의 판단이 백번 옳네. 조사야 경첩형의 솜씨를 들은 바가 있으니 걱정할 리 없을 테고.... 헌데....”
말과 함께 그의 시선이 돌아가며 용추를 바라보았다.
“용추선생께서도 도움을 주실 텐가?”
갑작스레 운중보주의 질문을 받은 용추는 좌중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빙그레 미소를 띠우며 고개를 저었다.
“소생으로서는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는 바에야 아예 나서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보주께서 청한 함곡께서 와 계신 마당에 소생의 용렬함이 누나 끼치지 않을까 걱정되어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 나으리라 생각됩니다.”
한 발을 빼는 말이었다. 그로서는 이 사건에 끼어들 이유가 없었다. 그의 목적은 오직 하나 뿐이었다. 자신이 모시는 상만천이 이곳에서 편안하고 안전하게 머물 수 있도록 해야 하는 일이었다. 더구나 독룡아가 나타난 이상 상만천도 무사하리라 보장할 수 없었다. 그는 서교민이 죽어 있는 상태를 보자 우선 상만천의 안위를 걱정했던 것이다.
“용추선생의 생각은 오직 하나 뿐이군. 그럼 경첩형과 함곡선생, 그리고 풍대협 세분이 수고를 해주어야겠네.”
운중보주는 이미 용추의 마음을 읽은 것 같았다. 사실 용추를 반드시 이 사건에 끼어 들이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일정 선을 그어놓아 용추가 나서는 것을 막으려고 한 말일지도 몰랐다.
“신태감. 이 일은 세분께 맡기고 노부의 거처로 가세나.”
보주의 말은 신태감과 할 말이 있다는 의미였다. 어차피 이곳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진 이상 오늘밤 온전히 잠이 들기는 틀린 일이었다.
“예, 그러시지요.”
운중보주가 앞서 나가자 죽어있는 서교민의 시신을 다시 한번 흘낏 본 신태감이 따라 나섰다. 그 뒤를 장문위와 옥기룡, 그리고 좌등이 따르자 보주가 좌등을 보며 말했다.
“좌노제 역시 이 우형 상관 말고 이들 세분 조사에 도움을 주시게나.”
“그래도..”
“괜찮아. 오히려 이 일을 벌인 놈이 누군지 모르지만 이 우형을 찾아오면 좋겠군.”
보주의 생각은 명확했다. 철담에 이어 서교민을 살해한 자들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 최종의 목적은 운중보주를 노리는 것일 터였다. 보주로서는 차라리 그 흉수가 자신을 찾아왔으면 하는 것이다. 그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좌등이었다.
“알겠소이다. 보주.”
보주와 신태감이 그곳을 나서고 보주의 두 제자가 나가자 용추는 함곡을 바라보았다.
“함곡. 오랜만이군.”
“신수가 훤하신 것을 보니 돈이 좋긴 좋은 모양이오.”
용추의 나이 마흔 셋. 함곡보다 다섯 살이 많다. 함곡의 뼈있는 말에 용추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돈은 불가능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지. 권력도 마찬가지. 하지만 그것은 가져 본 자만이 아네. 하지만 자네나 나 같이 머리나 쓸 줄 아는 자들은 죽어도 돈과 권력을 갖지 못한다네. 단지 그것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일 뿐이지.”
용추의 말은 사실 정확했다. 현자는 상인처럼 재물 모으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 아니다. 현자는 속고 속이는 정치에 뛰어들 사람이 아니다. 그저 그런 자들을 도와 재물과 권력을 늘이는데 일조를 하는 사람일 뿐이다. 현자는 그런 자신을 보며 선정을 하거나, 덕을 베풀도록 만들었다고 자위하지만 그것 역시 자신의 초라함에 대한 변명일 뿐이다.
“만족하시는 것 같구려.”
“나로서는 아직까지 세속에 물들지 않고 고고한 학처럼 살아가는 자네가 매우 부럽네. 그런 자네를 이 구렁텅이에 밀어 넣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도 하고.... 어쩌면 이번에 자네에 대한 빚을 갚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
용추의 말은 알지 못할 묘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어떤 내막을 알고 운중보에 들어 온 것일까? 분명 용추는 함곡 자신이 모르는 내막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재미있는 말씀이구려. 빚을 준적도 없는 사람에게 빚을 갚겠다고 하니 갑자기 횡재한 기분이 드니 말이오.”
“자네는 여전하군. 하지만 한 가지 충고 아닌 부탁을 하지.”
용추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함곡 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 사건을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운중보의 일에 너무 깊이 관여하지는 말게.”
함곡은 용추를 지그시 응시했다. 분명 용추는 뭔가 내막을 알고 있었다. 반드시 그를 믿을 바도 아니었지만 최소한 용추는 자신을 이용하고자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용추와 자신 간에는 묘한 경쟁관계가 흐르고 있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그들 두 사람이 만든 것은 아니었다. 말하기 좋아하는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아주 좋은 말씀이오.”
함곡이 의외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용추는 옅은 미소를 띠웠다. 사실 용추에게 가장 걸림돌이 될 사람은 함곡이었다. 자신이 의도한 일을 망칠 사람이 있다면 오직 함곡 뿐이었다. 그렇다고 손을 잡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 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있을 수 없는 이치처럼 그들은 한 곳에서 공존할 수 없는 존재였다. 공존할 수 있다면 오직 하나, 둘 중 하나가 자신을 완전히 버릴 때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이만 가보겠네. 수고 좀 하시게.”
그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고는 경후에게도 역시 같은 모습을 보였다. 오히려 경후가 정중히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배웅하지 못함을 용서하시오.”
“별 말씀을...”
용추는 힐끗 풍철한과 함곡의 여동생 선화를 보더니 고개를 저으며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삐딱하니 그의 등 뒤를 바라보던 풍철한이 불쑥 중얼거렸다.
“기분 나쁜 자식... 머리에 먹물깨나 들었다는 자식들은 한결같이 밥 맛 없게 군단 말이야.”
그 말에 함곡과 그의 여동생 선화의 얼굴이 굳어 들었다. 그 모욕적인 말은 용추에게 한 것이지만 함곡까지 싸잡아 한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