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39회

등록 2006.09.22 08:18수정 2006.09.22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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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단서가 될만한 것은 없었다. 현장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몇 가지뿐이었다. 흉수가 외부인이라는 전제 하에 흉수는 창문을 통해 들어 온 것으로 일단 결론을 내렸다. 방문을 통해 들어왔다면 아무리 신출귀몰한 자라 할지라도 신태감 일행의 이목을 피할 수 없었다는 점이 그런 결론을 이끌어 냈다.


솔잎이 발견된 것도 그런 결론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침대 앞에 놓여진 의자에 누가 앉아 있었느냐는 것이었다. 만약 흉수가 그 의자에 앉아 있었다면 왜 그곳에서 서교민을 죽이지 않고 탁자에 까지 와서 죽인 것일까?

조사의 기본은 일단 현장의 물증(物證)이었다. 그리고 물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죽어있는 시체였다. 이런 일에 전문가라는 경후 역시 그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사실 서교민의 시체에서는 너무나 물증이 확연하게 나타나 있어 더 이상 조사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풍철한은 달랐다. 사실 살인사건에 있어 죽어있는 시체는 다른 무엇보다 너무나 많은 사실을 가르쳐 주는 중요한 증거였다. 그는 일단 시체가 옮겨지지 않았는지 살펴보았다. 주위에 끌린 자국이 남아 있는지 세세하게 살펴보았지만 그런 흔적은 없었다. 서교민은 의자에 앉아 있다가 흉수에게 살해당하면서 의자 밑으로 흘러내린 것 같았다.

그의 겉옷이 위로 말려 올라가 있는 것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항한 흔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서교민은 흉수를 알고 있었거나, 아니면 흉수가 다가오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한 상태에서 갑작스런 공격으로 죽었다는 말이었다.

헌데 이상한 점은 또 한 가지가 있었다. 탁자의 의자는 한 개가 침상 앞에 놓여진 것과 서교민이 기대고 있는 의자 외에는 탁자 깊숙이 정돈되어 있어 다른 사람이 탁자에 앉아 있었던 흔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탁자에서는 흉수와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정황이 서교민을 잘 아는 자 또는 내부인의 소행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침입한 자의 은밀한 공격에 당했다는 쪽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풍철한이 조심스럽게 시신 곁에서 조사를 하고 있다가 경후를 보며 말했다.

“이제 시신을 벗겨봐야 하지 않겠소?”


시신이 중요한 증거가 된다는 말은 시신에는 살아 있을 때보다 더욱 확연한 몸의 상태를 가르쳐 주기 때문이었다. 혈도를 집혔다던가, 맞은 경우에는 마치 붉은 반점처럼 그 부위에 뚜렷한 흔적을 남기게 된다. 함곡이 고개를 끄떡였다.

“너는 잠시 밖으로 나가 있겠느냐?”

자신의 여동생 선화를 보고 한 말이었다. 남녀가 유별한데 아무리 시신이라지만 사내의 벌거벗은 몸을 본다는 것은 시집도 안 간 처녀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일이 될 수 있었다.

“괜찮아요. 좀 멀리 떨어져 있죠.”

그녀는 말과 함께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미 하늘에는 하한(河漢)이 흐르고 있었다. 보름을 며칠 앞둔 일그러진 달이 제법 밝은 빛을 뿌리고 있어 주위의 경물을 훤히 볼 수 있게 만들었다.

경후와 풍철한은 조심스럽게 시신을 눕히며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시신은 너무나 깨끗했다. 아무런 상처나 흔적이 없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다시 한번 흉수의 깨끗한 솜씨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유일한 상처는 그의 목숨을 앗아간 독룡아의 흔적뿐이었다.

하지만 세 사람은 모두 다 벗겨진 시신에서 기이한 점을 두 가지나 발견해 냈다. 그런 점에서 세 사람은 확실히 세심한 관찰력과 뛰어난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능력은 사실 아무나 가질 수 있는 능력은 아니었다.

한 가지는 그의 양물(陽物)이 진한 적색을 띠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그가 죽기 전에 성적으로 흥분한 적이 있거나 아니면 여자와 관계를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가능케 했다. 아주 중요한 정보였다.

그의 아랫도리 안쪽 옷에 있는 얼룩이 언제 것인지는 몰라도 분명 그런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하지만 운중보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그가 여자와 관계를 가졌을 것이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철한... 시신의 입을 열어보겠나?”

함곡이 한 말이었다. 두 번째로 기이하게 느낀 것이 바로 목 부위였다. 조금 부은 듯 하였는데 처음에는 그것이 목에 난 상처 때문으로 생각해서 넘어간 부분이었다. 하지만 시신을 벗겨놓고 보니 분명 목 부위는 비정상적으로 부어 있었다.

“귀찮은 일은 나만 시키는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풍철한은 시키는 대로 조심스럽게 시신의 입을 벌리기 시작했다. 얼마 벌리지 않아 그들은 아주 의외의 물건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아주 좋은 질의 천이었다. 그 천은 뭉쳐져 그의 목에 박혀 있었고, 그것으로 인해 소리를 내거나 숨을 쉴 수 없게 된 것인지 몰랐다.

풍철한이 조심스럽게 입속에서 그 천을 모두 빼내자 그것은 손바닥 두개를 포갠 듯한 정도의 크기였다. 그것을 본 경후가 손바닥에 몇 올의 실오라기를 올려놓고 함곡과 풍철한에게 보여 주었다. 침상에서 발견한 그 실오라기였다. 그것은 기이하게도 같은 실로 짠 천임을 보여주고 있었고, 서교민의 목에서 나온 천이 어떤 의복의 조각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게 무슨 천이지?”

풍철한은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 이런 천으로 옷을 해 입는 다는 것은 사치였다. 더구나 너무나 고급스럽고 부드러워 옷감으로도 사실 적합하지도 않았다. 분명한 것은 이런 천으로 만든 옷이라면 여인들이 입는 옷일 것이다.

“질식한 것일까?”

풍철한이 중얼거렸다. 과거에 두 번이나 이런 흔적이 나타났듯이 질식시켜 죽은 시신에 이런 흔적을 남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지만 운중보주가 확인한 이상 이것은 분명 독룡아의 흔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죽이기 전에 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이 천을 입에 처넣고 죽였을 가능성이 많았다.

“여자가 흉수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군.”

함곡의 말에 한 동안 기이한 기색을 띠우고 있던 경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얼굴에는 신경질적인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는 것일까?

“좌대협. 이곳 청룡각에 배정된 시비(侍婢)가 몇 명이오?”

시녀는 또 왜 묻는 것일까? 설마하니 함곡이 한 말에 흉수가 시녀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좌등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여섯 명이오.”

“귀찮으시겠지만 그 여섯 명의 시비를 한 방에 모아 주시겠소?”

증거는 반드시 물증만이 아니다. 사람의 증언이나 그 정황 역시 중요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이제 내부인들에 대한 조사가 시작됨을 알리고 있었다.

“이미 이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리를 비우지 말라고 하였으니 그 아이들은 분명 한 곳에 모여 있을 것이오.”

“안내를 해주시오. 본관은 잠시 다녀오겠소. 두 분은 이 방안에서 단서를 더 찾아주시길 바라겠소.”

약간 당황한 듯한 경후가 무슨 일인지 두 사람을 놔두고 혼자 나섰다. 풍철한은 여전히 세심하게 시신을 살피고 있었다. 경후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함곡이 기이한 미소를 머금었다. 경후의 표정으로 보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다는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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