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주와 함께 하는 '다인(茶人)' 기행

[서평] 정찬주의 <茶人기행>

등록 2006.09.21 18:46수정 2006.09.22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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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정찬주 <茶人기행>

정찬주 <茶人기행> ⓒ 열림원

책읽기나 글쓰기, 사람을 포함하여 세상 그 무엇과의 만남도 인연(因緣)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소설가 정찬주가 쓴 <茶人기행>(열림원, 2006)이 내게 건너 온 것은 지난 무더운 여름이었다.

무더운 여름날에 이 책을 읽으면 그저 몸과 마음이 시원스레 다 해방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여름 한 철이 다 가도록 나는 이 책을 읽지 못했다. 자동차 안에, 서재 책상 위에, 사무실에 몇 번 자리를 옮겨가기도 했지만 가을이 성큼 다가온 어제서야 그 첫 페이지를 펴게 되었다.


고운 최치원과 수운 최제우를 통해 내가 배울 수 있는 사상과 문학 정신이 무엇인지를 듣기 위해 대학 때 은사님을 찾아가는 길 위에서였다. 일부러 자동차를 버리고 버스를 타고 갔는데 모처럼 가는 길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창밖의 사물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정찬주의 또 하나의 역작 <茶人기행>읽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21일), 그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독서의 흐름은 순식간이었다. 책을 손에서 놓기 싫었다.

20여 년 동안 명상적 산문과 불교적 사유의 글을 써온 정찬주를 모르는 사람은 그리 많지는 않으리라.

소설 <산은 산 물은 물> <야반삼경에 촛불춤을 추어라>와 산문집 <돈황 가는길> <선방 가는 길> <나를 찾는 암자 여행> 등이 모두 그의 대표작들이다. <茶人기행>은 모시사주간지에 2년 동안 연재했던 다인(茶人)을 찾아가는 기행산문집이다. 고운 최치원에서부터 초의선사와 춘원 이광수까지 50명의 다인(茶人)이 걸어간 삶의 향기를 깔끔하게 보여주고 있다.

작가 정찬주는 차 숲이나 다사(茶寺) 같은 차 유적지를 직접 찾아가 그곳의 풍광과 대화하고 그곳에서 다향(茶香)의 삶을 살다 간 선배 다인(茶人)의 삶을 그려낸다. 그리고 일반 독자인 우리에게 절창의 다시(茶詩)를 맛보게 해준다.

저자 정찬주는 책머리 '작가의 말'에서<茶人기행>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이 책에 실린 다인들의 삶도 참으로 다양한 모습이었다. 알려진 것보다 더 노장(老壯)에 심취했던 최치원, 이자현, 김시습, 허균 등은 차의 청허함을 어찌 세상이 알겠는가 하여 은둔했고, 차씨가 구법승들에 의해 중국에서 들어오기도 했지만 오히려 신라의 차씨를 중국에 퍼뜨린 후 등신불이 된 지잡법사가 있고, 수행과 중생제도의 방편으로 차를 마신 원효, 지눌, 혜심, 충지, 보우, 나옹, 함허, 휴정, 유정, 초의 스님 등이 있고, 차를 군자와 같이 여기어 가까이하고자 했던 고려 말의 이색, 정몽주, 길재, 그들로부터 도학(道學)의 맥을 이은 김종직, 이목, 기대승, 김장생, 이이, 송시열, 윤선도 등의 삶도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실학자 김육, 정약용 등은 차로 지친 심신을 다스렸고, 남종화의 양팽손, 김정희, 허백련 등은 차와 함께 '서화잠심(書畵潛心)'했으며, 차 한 잔으로 영욕의 고단함을 씻고자 했던 신숙주, 이광수 등의 또 다른 내면 풍경도 흥미로웠다.

저자는 이 <茶人 기행>을 통해 그들의 절창 다시(茶詩)를 감상하면서 잃어버렸던 시심(詩心)을 되찾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리라. 여기에 한 가지 더 보탠다면 저자가 찾아간 빼어난 차(茶) 문화의 풍광을 컬러 사진으로 감상하는 일이다. 책 속의 멋진 사진 작품은 작가 정찬주와 오랫동안 작업을 함께 해온 사진작가 유동영의 솜씨다.


저자는 우리 차의 중흥조인 초의(草衣) 선사의 다음 시를 이 책에서 맨 먼저 소개한 다시(茶詩)이다. 열반할 때까지 해남 일지암에 머무른 초의는<茶神傳><東茶頌>을 저술하기도 했으며, 동갑지기 추사 김정희와 둘도 없는 진정한 다우(茶友)였다.

찻물 끓는 대숲 소리 솔바람 소리 쓸쓸하고 청량하니
맑고 찬 기운 뼈에 스며 마음을 깨워주네
흰 구름 밝은 달 청해 두 손님 되니
도인의 찻자리 이것이 빼어난 경지라네


찻물 끓는 소리가 대숲과 솔숲 스치는 바람 소리라는 것은 어디서 들어보기도 한 말인데, 흰 구름과 달을 두 손님으로 자리 앉혀 차를 마시는 경지는 무욕(無慾)과 무아(無我)의 경지 바로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정찬주는 우리나라 최고의 다시(茶詩)로 진각국사의 '인월대(隣月臺)'를 들고 오래 전부터 애송하고 있다고 한다.

우뚝 솟은 바위산은 몇 길인지 알 수 없고
그 위 높다란 누대는 하늘 끝에 닿아 있네
북두로 길은 은하수로 밤차를 달이니
차 연기는 싸늘하게 달 속 계수나무를 감싸네


북두칠성으로 길어 올린 은하수로 달인 차는 어떤 맛이며, 차 연기가 달 속 계수나무를 감싸고 있는 풍광은 어떤 풍광일까? 이미 우주와 한 몸이 되어버린 자만 느낄 수 있는 선경(仙境)의 경지가 아니겠는가. 우주를 경영하는 듯한 스님의 활달한 상상력이 이 시를 다시(茶詩)의 명작으로 만들고 있다.

정찬주의 <茶人기행>에 수록된 빼어난 다시(茶詩)와 그 이야기들을 전할 여지(餘地)가 내게는 별로 없다. 책 속에 차(茶)와 연관된 좋은 문장 몇을 독자에게 전하면서 <茶人기행>을 둘러본 내 기행(紀行)도 끝을 맺어야 하겠다.

"진정한 다인이란 차를 잘 마시는 사람이 아니라 차의 성품을 닮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108쪽)
"분열을 지양하는 원효대사의 화쟁정신이야말로 다인들이 새겨듣고 실천해야 할 다도(茶道)가 아닐까 싶다."(141쪽)
"음다(飮茶)란 느림으로 돌아가서 자기를 성찰하는 행위이다."(169쪽)
"차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는 명상과 사색의 징검다리"(323쪽)
"깊은 밤 질화로에/달이는 차향기가 다관을 새어 나오네."(보우스님 시, 295쪽)

정찬주의 茶人기행 - 옛사람의 차 한 잔 마음 한 잔

정찬주 지음, 송영방 그림, 유동영 사진,
열림원,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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