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따라 가을산행

농다치 고개 넘어 중미산에서 만난 가을

등록 2006.09.22 15:19수정 2006.09.22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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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누렇게 벼가 익어가고 코스모스가 피었다

누렇게 벼가 익어가고 코스모스가 피었다 ⓒ 김선호

양반집 규수를 짝사랑하던 하인이 있었다. 하인의 마음을 알 리가 없는(안들 어쩔 수 없었겠지만) 규수는 때가 되어 시집을 가게 되었다. 가마를 타고 시집을 가는데 규수를 짝사랑 하던 하인도 짐을 지고 가마행렬을 따랐다.

몰래 사랑한 규수가 다른 남자한테 시집가는 것도 서러운데 농을 지고 신행길을 따라가는 하인의 심정이야 오죽했을까. 그래서 죄 없는 농을 산모퉁이 이쪽에도 찍고, 저쪽에도 찍으며 가니 가마에 탄 규수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농 다칠라.'


양평의 신복리를 오가는 옛길인 '농다치고개'에 얽힌 이야기다. 길이 좁아 한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정도로 좁은 길이었으며 산비탈로 이어진 이 고개를 넘으려면 무려 네시간이 걸려야 했단다.

a 임도를 따라 숲으로 들어간다

임도를 따라 숲으로 들어간다 ⓒ 김선호

지금은 매끈하게 도로가 나 있어 농다치고개의 전설을 떠올려 보기엔 무리가 있을 정도였다. 발품을 팔아 힘겹게 넘곤 했다는 이 고개에 지금은 사람은 안보이고 매끈하게 뻗은 도로를 거침없이 달리는 자동차의 행렬만이 눈에 띈다. 자동차를 사이로 모터사이클의 질주도 숨가쁘게 이어진다. 자동차와 모터사이클이 합창하듯 만들어 내는 굉음 사이로 강풍이 몰아쳤다. 태풍 산산이 불던 일요일(17일)이었다.

중미산을 올라가려다 길을 잘못 들어 농다치고개로 들어섰다가 된통 바람한테 혼이 났다. 태풍의 영향이 아니더라도 농다치고개는 늘상 바람을 만들어 낼 것 같은 위치에 있었다. 437m에 가파르게 휘돌아가는 고개의 각도가 아찔할 정도로.

a 여름과 가을을 이어주는 꽃, 물봉선이 지천으로 피었다.

여름과 가을을 이어주는 꽃, 물봉선이 지천으로 피었다. ⓒ 김선호

그 고갯길에 휴게소 비슷한 건물들이 몇 개 보인다. 걸어서는 아니라도 차를 타고 지나다니는 행인들이 꽤 있나 보았다. 임시건물인 휴게소에 들어가 뜨끈한 꿀차를 부탁하며 길을 물었다. 예전엔 농다치고개 쪽에도 중미산 등산로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쇄되었다고 한다. 할 수 없이 농다치고개를 우회해서 중미산휴양림으로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등산로는 중미산휴양림 건너편에 있었다. 입장료를 받은 관리소 직원이 등산안내지도를 보며 등산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해 준다. 매번 국립공원관리소가 있는 산에서는 관리비명목의 입장료를 내곤 했지만 이렇듯 친절하게 등산안내를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입장료 내는 일이 중미산에서 만큼은 하나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a 정상에 오르니 바람이 몹씨도 불었다.

정상에 오르니 바람이 몹씨도 불었다. ⓒ 김선호

휴양림이 있는 중미산은 임도가 자주 눈에 띈다. 등산로가 시작되는 곳도 휴양림 건너편의 임도에서 시작되었다. 여름동안 도랑물이 흘렀는지 등산로 오른편에 물봉선이 떼지어 피어 있다. 물기를 좋아해 물가에서 주로 볼 수 있다는데 중미산엔 등산로를 따라 갈림길에 들어서기까지 약 700m 지점까지 꽃분홍색의 물봉선이 피어 근방을 화사하게 물들였다.

고마리도 한창이었다. 숲 언저리를 도배하듯 물봉선과 고마리가 피어 있어서 마치 꽃길을 걷는 듯 행복하게 숲길을 걸었던 구간이었다. 가끔씩 쑥부쟁이며 구절초도 만났다. 가을을 대표하는 우리들꽃들을 보니 비로소 가을이 실감되었다.


a 억새밭에도 바람이 불어 와 머잖아 하얗게 억새꽃도 피겠다

억새밭에도 바람이 불어 와 머잖아 하얗게 억새꽃도 피겠다 ⓒ 김선호

관리소 직원이 안내해준대로 제1등산로로 들어선 갈림길에서 비로소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중미산은 지나치게 단조롭지도 가파르지 않아서 아이들이 낀 가족산행에 적합한 산인 듯 싶었다. 힘들이지 않고 내처 능선까지 오르자 시야가 훤하게 트인 것이 조망이 좋은 산이기도 했다. 주변이 온통 능선과 능선으로 이어진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속에 깃들인 마을들이 마치 장난감처럼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을 내려보자니 '평화'라는 단어가 절로 떠오른다.

난데없이 굉음이 끼어 든 것은 그 즈음이었다. 농다치고개 쪽에서 모터사이클이 만들어 내는 요란한 소리가 숲의 정적을 깨뜨리고 있었다. 834미터급의 중미산을 보자면 거의 정확히 산 중턱에 농다치고개가 놓여 있는 셈이다. 속도의 최고치를 자랑하는 모터사이클의 굉음이 바로 발아래서 들려오듯 가깝게 들린다. 귀가 따가울 정도여서 산행의 맛이 싹 가시는 느낌이 들었다.

a 이 숲에 단풍이 들면 참 고울것 같다.

이 숲에 단풍이 들면 참 고울것 같다. ⓒ 김선호

산에서 듣는 모터사이클의 굉음이 신경이 쓰이더라도 오늘이 지나면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수도 있을 것이나, 숲에 사는 뭇 생명들은 참으로 고달플 일이겠다 싶었다. 도심에 심어진 가로수들이 스트레스를 받아 나이테가 없어진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나무들도 생명이니 어찌 스트레스가 없을 수가 있을까. 중미산의 나무들이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등산안내지도 덕분에 바람이 몹시 부는 와중에도 무사히 산행을 마칠 수 있었다. 산 정상에서 마주친 바람의 세기는 장난이 아니었다. 유난히 좁고 뾰족한 정상이었는데 바람 때문에 오래 서 있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바위에 몸을 기대고 앉아 정상 주변에 숲을 이룬 신갈나무숲에 바람이 이는 모습을 지켜보다 산을 내려왔다.

바람이 불 때마다 몸피를 뒤집으며 '쏴, 쏴' 파도소리를 내던 신갈나무숲에 황갈색의 가을빛이 묻어나 있었다. 바람이 가을을 몰고 왔을까, 바람이 부는대로 흔들리는 억새밭에도 하얀꽃잎이 하나둘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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