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없고 그냥 사람이 되다

털작은입술잔버섯과 내 인생의 2막 1장

등록 2006.09.23 11:23수정 2006.09.23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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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비에 젖은 털작은입술잔버섯 유균(어린버섯).

비에 젖은 털작은입술잔버섯 유균(어린버섯). ⓒ 고평열

삶에 비가 내린 어느 날, 흠뻑 젖은 몸을 떨며 심하게 앓았다. 비를 가릴 그 무엇도 없이 내가 그냥 세상에 던져져 있음을 알았을 때의 그 긴장감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삶의 터는 양지바르지 않았고 스산한 습기가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a 잠시 내리는 햇살에 뽀송뽀송해지는 털들.

잠시 내리는 햇살에 뽀송뽀송해지는 털들. ⓒ 고평열

사는 동안 비 내리는 날만 계속됐다면 삶은 그냥 끝났을 테지... 작은 햇살이 나무 사이로 스며들어와 삶의 온기를 불어 넣어 주지 않았더라면 죽어가며 그렇게 썩어갔을 테지.

a 털작은입술잔버섯.

털작은입술잔버섯. ⓒ 고평열

다시 찾아온 인생의 봄에서 물오른 '털작은입술잔버섯'처럼 나는 삶의 찬가를 부르고 있었다. 삶의 향기가 무르익은 내 나이는 마흔다섯, 그리고 9월에 나를 찾은 반갑지 않았던 손님 '암'.

a 술잔의 내부가 열리면 포자는 성숙해집니다.

술잔의 내부가 열리면 포자는 성숙해집니다. ⓒ 고평열

초기라고 했지만, 이제 갓 자리잡은 작은 세포덩어리라고 했지만 '암'이라는 한 글자에 담긴 의미는 전율과도 같은 긴장을 주었다.

a 털작은입술잔버섯.

털작은입술잔버섯. ⓒ 고평열

왜 이렇게 아쉬움이 많을까. 할 일은 아직도 많고, 하고픈 일들도 그 끝이 다 드러나지 않았는데, 버섯은 아직도 오름과 곶자왈에서 피고 지고를 반복하며 나의 관심을 희망할지도 모르는데...

a 농익은 색깔은 차차 퇴색되고, 버섯은 잔을 벌려 내부를 드러냈다.

농익은 색깔은 차차 퇴색되고, 버섯은 잔을 벌려 내부를 드러냈다. ⓒ 고평열

내 내부를 열어 상처를 도려냈다. 아이를 셋 키운 '宮'이 있던 자리는 터만 남았다. 이제 여자는 없고 그냥 사람이 됐다.


a 작고 앙증맞은 양주잔을 닮은 버섯.

작고 앙증맞은 양주잔을 닮은 버섯. ⓒ 고평열

1막 1장이 끝나고 다시 막이 오르는 새 장이 열렸을까. 아직은 알 수 없다. 내부의 저 깊숙한 곳 어느 장기가 다시 반란을 일으킬지는 알 수 없으니...

a 비로소 마무리되어가는 버섯의 삶... 건배라도 하듯이.

비로소 마무리되어가는 버섯의 삶... 건배라도 하듯이. ⓒ 고평열

어머니가 세상을 등지셨던 그때 그 나이 마흔다섯과 암. 그리고 다시 마흔다섯이 된 나는 현대의학의 힘을 빌어 조기발견, 조기치료라는 행운을 얻었다. 마감해야 하는 생을 예감하셨던 어머니의 눈물이 28년 세월을 훌쩍 넘어 입원해 있던 기간 내내 다시 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병은 세습됐지만, 한숨은 세습되지 않았다.


a 제 삶을 순조롭게 다한 생명에 깃드는 경건함.

제 삶을 순조롭게 다한 생명에 깃드는 경건함. ⓒ 고평열

비는 다시 내릴 것이다. 빗물에 튕겨진 흙이 그를 옴팡 덮씌워도 털작은입술잔버섯의 내부에는 버섯의 포자가 무르익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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