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 일곱 노스승의 '가을 동화'

백수의 스승과 이순의 제자, 더불어 동심을 꿈꾸다

등록 2006.09.24 15:30수정 2006.09.26 11:12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저어기 저 갯벌에서 내 어린시절 게를 잡았제." "저기 절벽 아래 말입니까?" "맞아. 거기였어."

"저어기 저 갯벌에서 내 어린시절 게를 잡았제." "저기 절벽 아래 말입니까?" "맞아. 거기였어." ⓒ 권태균(월간중앙)

여수 바닷가에서


"도야, 저어기 바다 건너 산 위에 구름을 좀 봐!"
"네, 선생님.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게 목화송이 같습니다."
"너도 아직 동심이로구나. 어린 시절 나는 이 바닷가 갯벌에서 연을 날리고 게를 좇아다녔지."

백수(白壽·99세)를 이태 앞둔 백발의 노스승은 지팡이로 바다 위의 구름을 가리키면서 어린 시절을 얘기했다. 그리고서는 자작시를 읊으셨다.

소년의 설날은
어느 동화 속의 왕자 그대로였다.
연분홍 두루마기에 검정 돌띠를 둘렀다

강풍에 연이 줄을 끊겨서
멀리멀리 바다로 날아갈 때
소년은 눈물 콧물 훌쩍이며 돌아왔다

하늘이 처음 열리는 그날부터
바닷물에 씻긴 천인단애의 절벽 노송 마른가지에는
하루 종일 황새 한 마리가 졸고 있었다


노고지리가 공중에서 지저귀는 늦봄
길길이 자란 보리밭 이랑에는 푸른 물결이 일렁이고
바닷물이 핥고 지나간 백사장,
맨발로 게를 쫓기에 하루해가 모자랐다

서쪽 하늘이 벌겋게 타는 저녁놀
어린 목동들은 제각기 소를 몰고 돌아오는 황혼길
쇠 방울소리가 그렇게 정다웠다


휘영청 가을달이 하늘에 걸리고
건너 마을 강강술래의 윤무(輪舞)가
달무리를 타고 돈다.

(슬픈 추억- 어린 시절 이야기)


a "좋다, 좋아. 구름을 보니까 시심이 우러나는구나" 하늘의 구름을 보고 어린이처럼 좋아하시는 백수의 스승

"좋다, 좋아. 구름을 보니까 시심이 우러나는구나" 하늘의 구름을 보고 어린이처럼 좋아하시는 백수의 스승 ⓒ 권태균

노스승은 고향 바닷가에서 영화 서편제의 소리꾼 송화처럼 어린 시절을 되새기며 그 날의 동화를 들려주느라고 신명이 났다.

나는 고수가 되어 그 장단에 맞춰 추임새를 먹였다. 노스승은 흥에 겨운 듯 더욱 신명이 났다. 포구에서 백수의 스승과 이순의 제자가 더불어 동심을 꿈꾸면서 한바탕 춤사위를 벌였다.

지난 9월 6일 오후 4시,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바닷가에서 은사 박철규(97) 선생님과 나는 45년 전으로 돌아가 그 옛날 수업시간처럼 즐거운 한때를 가졌다.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가슴은 뛰노라"라는 워즈워드의 시구처럼 백수의 스승은 나이를 초월하고 있었다. 늙으면 다시 어린이가 되기 때문일까.

쪽지함의 메일

지난 8월 26일 <오마이뉴스>에 '백수의 스승이 보낸 한 줌의 아편'이라는 기사가 나간 지 닷새 후 내 쪽지함에 메일 한 통이 날아왔다.

박철규 선생님 연락처를 좀 알려 주십시오.

박도 선생님! 일면식도 없으나 선생님이 쓰신 '따뜻한 기사'는 자주 보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기사를 읽을 때마다 제 나름대로 느끼는 게 많고 때로는 제 생각을 바꿀 때도 있을 만큼 팬입니다.

우선 부럽습니다. 평생 마음속으로 모시는 은사가 계시다는 점이요, 그리고 행복해 보입니다. 백수 연세의 스승님으로부터 지금도 애정어린 '지도편달'을 받고 계시는 박 선생님이 말입니다.

"선생은 많아도 스승은 없다"는 이 시대에 아름답고 본받고 싶은 사제간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져 저도 모르게 제 가슴까지 따뜻해집니다.

a 10여 년 전의 박철규 선생님

10여 년 전의 박철규 선생님 ⓒ 박도

박철규 선생님은 강건하신지요? 또 사람을 만나 얘기를 나누는 것도 가능하신지요? 만일 그렇다면 박철규 선생님을 만나 뵙고 살아오신 내력, 제자들 이야기, 그리고 참다운 사제관계 등에 대해 말씀을 한번 듣고 싶습니다.

박철규 선생님께 연락을 드리고 싶은데 무슨 방법이 없겠습니까? 연락처를 알려주시거나 박도 선생님께서 한 번 연결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는 <월간중앙> 기자입니다. 올해로 만 18년째 같은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 사회를 따뜻하게 만드는 기사를 많이 쓰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도와주십시오.

윤석진 拜上


나는 메일을 읽은 뒤, 여수에 계시는 박 선생님에게 전화로 취재 승낙 여부를 여쭙자, 우리 두 사람의 인연이 이 사회에 한 미담이 된다면 기꺼이 응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마침 나도 이참에 선생님을 뵙고 싶은 마음이 일어서 메일로 답신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윤 기자님!

먼저 제 글을 읽어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은 오래 전에 서울을 떠나 전남 여수 아드님댁에 계십니다. 윤 기자님 전화를 받고 선생님에게 전화로 취지를 말씀드리자 우리들의 이야기가 이 사회에 한 미담이 된다면 취재해도 좋다고 허락하셨습니다. 만일 취재하신다면 저도 동행하여 오랜만에 선생님 뵙고 인사도 올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박도 올림


취재일이 9월 6일로 결정되었다. 서울과 여수는 워낙 먼 거리라서 시간단축을 위해 가는 길목인 경부고속도로 오산 나들목에서 만나기로 했다.

선생님을 뵈러가는 날 새벽 4시에 잠이 깼다. 안흥마을에서 첫 차를 타고 원주로 가서, 다시 평택 가는 시외버스로 갈아타고 오산에서 내렸다. 내가 사는 안흥 고장의 명품은 찐빵과 한우와 더덕인데, 찐빵은 이미 택배로 보내드린 바 있고, 한우는 날씨 탓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어서 횡성에 아는 더덕가게에다가 부탁했더니, 가게 주인이 더덕선물상자를 분홍빛 보자기에 싸서 횡성 정류장으로 들고 나와 건네받았다.

약속시간 오산 톨게이트에 나타난 <월간중앙>의 윤 기자와 권태균 사진부장은 그 보자기를 들고 서 있는 내가 영락없이 친정부모를 찾아가는 딸의 모습 같다고 했다. 그랬다. 모습만이 아니라 내 마음도 첫 친정나들이를 하는 새댁처럼 한껏 들떠 있었다.

핸들을 잡은 권 부장이 시속 100㎞로 계속 가속페달을 밟았으나 오후 2시를 넘겨서야 여수 율촌면에 닿았다. 10년 전, 선생님을 찾았더니 굳이 순천까지 나오셔서 댁으로 방문은 초행길이었다. 선생님은 우리 일행이 궁벽한 시골길에서 헤맬까 마을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뾰족탑이 높은 교회에서 기다리셨다. 늦은 점심으로 허기를 면한 뒤 바닷가로 갔다.

인연

내가 선생님을 처음 뵌 날은 1961년 봄, 중동고교 입학시험장에서다. 첫 시간 국어시험 답안지를 다 메우고 난 뒤 시간이 남아서 감독교사를 바라보자 훤칠한 키에 감색 양복을 입은 곱슬머리의 미남 선생님이 교단 위에서 지키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만일 이 학교에 입학하게 되면 저 분을 따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a 선생님이 보내준 두루마리 편지를 선생님 댁 마루에서 다시 펴보다

선생님이 보내준 두루마리 편지를 선생님 댁 마루에서 다시 펴보다 ⓒ 권태균

입학 후 첫 시간 그분은 국어시간에 들어오시고, 이하윤의 '메모광'이라는 글을 읽게 한 뒤 학생들에게 독후감을 발표케 하였다. 대여섯 명이 발표한 뒤 희망자가 없자 선생님은 출석부에서 내 이름을 부르면서 발표를 시켰다. 그날 발표자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았다고 내 이름을 기억해 주셨다.

그로부터 인연이 이어졌다. 선생님이 주관하였던 교내 문예현상모집에 시 부문, 소설 부문에 내 졸작이 입선 및 당선되고 교지편집반 지도교사와 편집기자로, 졸업 후에는 교장과 교사로 인연이 이어졌다.

선생님의 퇴임으로 배은망덕하게 한동안 소식이 끊겼다가 10여 년 전, 선생님의 전화와 편지로 다시 인연이 이어졌다. 드문드문 날아오는 선생님의 편지와 전화는 용케도 내가 심한 좌절감에 빠져있을 때였다.

"박군, 족적을 남겨라."
"자연 속에서 창작에만 몰두하는 태도는 그야말로 생의 극치일세."
"명작은 끝없는 사색과 체험, 감동이 있어야겠지. 노작(勞作)을 바라네."


'칭찬과 격려는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더니 노스승의 격려의 편지는 늙고 못난 제자에게도 약발이 있어서 그때마다 슬럼프와 좌절에서 헤어나게 하여 그동안 16권의 책을 펴내게 했다. 올해는 이제까지 세 권을 펴냈는데 연말까지 두 권은 더 나올 듯하다.

조급하게 서두르지 마라

당신 어린 날 동심의 광장이었던 바닷가에서 백수를 이태 앞둔 노스승과 환갑을 지낸 제자는 나이를 초월하여 한바탕 춤사위를 나눈 뒤 선생님댁 마루로 자리를 옮겼다.

"너무 오래 살았어. 집사람도 내 친구도 모두 내 곁을 떠났어."

외롭다고 하셨다. 그 적막한 고독은 때때로 죽음까지도 생각하게 하지만 하늘이 준 생명을 차마 져버릴 수 없어서 그 때마다 생각을 접는다고 하시면서 일흔이 넘은 아들 내외가 효자 효부라고, 특히 며느님을 극찬했다.

20년이 넘게 홀시아버지를 모시는 일흔의 며느님, 보행이 불편한 시아버지의 지팡이가 되고, 온갖 수발을 깍듯이 도맡고 있었다.

"내 며느리는 하늘이 내렸어."

a "선생님, 건강하십시오." "언제 또 만날 수 있을까…."

"선생님, 건강하십시오." "언제 또 만날 수 있을까…." ⓒ 권태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새 하늘의 구름은 금빛으로 물들었다. 내가 하직인사로 큰절을 드렸다.

"언제 또 만날 수 있을까…."

노스승은 말을 흐리면서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조급하게 서두르지 마라. 생전에 이름을 얻는 사람도 있고, 사후에 빛을 보는 사람도 있어. 좋은 작품을 남기면 언젠가는 사람들이 알아주게 마련이야. 오늘 하루 자네 덕분으로 행복했네. 다른 제자 만나면 내 안부 전해 주고…. 어이 잘 가."

노스승은 다시 아편(격려) 한 줌을 주면서 불편한 몸을 며느님과 지팡이에 의지한 채 대문 밖까지 나와 먼 길 떠나는 제자 일행을 배웅했다.

6월의 훈풍을 타고서
연일 뒤 숲에서 산비둘기가 울어댄다
'구루루 쿠쿠 구루루 쿠쿠 ….'

산비탈에는 보리가 누렇게 익어 가는데
사람 얼굴 하나 찾아오는 이 없는
이 극한의 적막 속에
산비둘기 울음에는 피가 맺혔다.

a "어이 잘 가."

"어이 잘 가." ⓒ 권태균

하고 많은 낮과 밤을 지새우면서
그렇게도 그립고 아쉬운 한(恨)을 삭이지 못해
오늘도 하루 종일
'구루루 쿠쿠 구루루 쿠쿠'인가.

내 어린 시절 할머니께서
"서방 죽고 아들딸 죽고 어찌어찌 살라"고 운다는 말씀에
즉석에서 산비둘기는 내 마음속에
둥우리를 틀었다.

꾀꼬리 소리처럼 아름답지 못하고
뻐꾸기 소리처럼 하늘을 찌르지 못하는데
어쩌다 이 노심(老心)은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가.

세월은 흘러 흘러 할머니도 가시고
나 이제 늙어 세월만 헤어보는
이 삼간두옥에
오늘도 산비둘기 소리만 은은하다.

(박철규 '산비둘기 울던 날')

덧붙이는 글 | 그날 만남의 사연과 대화는 <월간중앙> 10월호에 문화기획 아름다운 사제 동행기 "백수의 스승과 이순의 제자 더불어 동심을 꿈꾸다(윤석진 기자)"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그날 만남의 사연과 대화는 <월간중앙> 10월호에 문화기획 아름다운 사제 동행기 "백수의 스승과 이순의 제자 더불어 동심을 꿈꾸다(윤석진 기자)"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AD

AD

AD

인기기사

  1. 1 오빠가 죽었다니... 장례 치를 돈조차 없던 여동생의 선택 오빠가 죽었다니... 장례 치를 돈조차 없던 여동생의 선택
  2. 2 한국 의사들의 수준, 고작 이 정도였나요? 한국 의사들의 수준, 고작 이 정도였나요?
  3. 3 대세 예능 '흑백요리사', 난 '또종원'이 우려스럽다 대세 예능 '흑백요리사', 난 '또종원'이 우려스럽다
  4. 4 윤석열 정부에 저항하는 공직자들 윤석열 정부에 저항하는 공직자들
  5. 5 영부인의 심기 거스를 수 있다? 정체 모를 사람들 등장  영부인의 심기 거스를 수 있다? 정체 모를 사람들 등장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