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회는 즐거워!!주경심
그때 엄마들 줄다리기가 열렸고, 남편의 응원을 등에 업은 나 역시 출전을 했지만 아깝게 지고 말았다. 아이는 자기 팀이 진 것이 못내 아쉬운지 푹푹 한숨만 토해냈다.
다음은 아빠들의 줄다리기, 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에 떠밀려 나가긴 했지만 남편 역시 오랜만에 해보는 줄다리기가 영 싫지만은 않은 표정이었다. 그런데 아빠 팀 역시 또 지고 말았다.
이런 낭패가! 그 많은 게임 다 몸 사리고 있다가 처음으로 출전한 게임에서 보기 좋게 져버렸으니 아이는 속상한 마음 금할 길이 없는지 금세 눈물바람이 되었다. 물론, 다음 게임에 또 나가면 된다. 하지만, 다음 게임 종목을 말하는 순간 난 얼른 쥐구멍을 찾아야만 했다.
달리기에 대한 안 좋은 추억
본능이라고 해야 할까? 초등학교시절부터 달리기라면 맡아놓은 꼴찌였던 나에게는 운동회날이 1년 중 유일하게 아버지에게 매타작을 당하는 날이었다. 생전 자식들 공부에는 관심도 없던 아버지도 운동회 날만은 그물 일을 접으신 채 구경을 오시곤 했다.
남의 자식은 달리기에서 공책도 받고, 연필도 타는데, 우리 3형제는 누굴 닮았는지(태풍이 불어와도 팔자걸음으로 걸어오시는 아버지만 닮았지만 본인은 절대 아니라고 하심)달리기에는 영 재능이 없었다.
운동회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아버지는 거나하게 취기가 오른 목소리로 "어찌된 것이 넘의 자식들 꽁무니만 쫓아 댕기는지... 밥값도 못허는 것들!"이라고 하셨다. "그래도 나가 공부는 쟈들보다 낫은디요!"라는 얘기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동네 사람 다 보는데서 달리기 잘하는 것이 부모님 이름을 알리는 길이지, 시험 보고 매 한대 덜 맞는 것이 부모님 이름을 알리는 길이냐 하시면서 역정을 내시곤 하셨다. 그 아버지 때문에 난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운동회 날이면 학교 뒤 야산으로 도망가서 점심때만 고개를 내미는 홍길동 같은 학생이 되었다.
그런 나였는데, 달리기라니. 그것도 바통을 이어받는 계주! 죽인대도 못 한다, 아니 안 한다고 두세 번 다짐을 하는 순간, 선수 어머니를 뽑고 다니시는 아이의 선생님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선생님의 부르심에 벌떡 일어나 라인에 서다
'저 시선에서 얼른 벗어나야 하는데···.' 한번 나의 시선을 잡아챈 선생님은 놔주질 않으셨다. 최면에라도 걸린 듯 일어섰다. 그리고 나갔다. 두 팀에서 한 반에 한 명씩의 엄마들이 나와 있었다.
한 사람이 한 바퀴씩 도는 계주였고, 내 번호는 마지막 7번이었다. 내 비록 달리기는 못해도 들은 풍월은 지구를 두 바퀴 반은 돌고 남을 것이다. 마지막 주자의 막중한 임무를 알기에 얼른 앞자리 엄마와 자리교체를 했다.
달리기가 시작되었다. 처음부터 약간 밀리기 시작한 달리기는 두 번째 주자가 넘어지면서 차이가 벌어졌고, 내 차례까지 왔을 때는 칼 루이스가 온대도 만회할 수 없을 만큼 벌어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00m 달리기 기록이 30초인 내가 뛴다 해도 표정관리만 잘하면 진 것에 대한 책임을 조금은 회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드디어 내 차례. 바통을 이어받는 순간 다리가 휘청하니 꺾여왔다. 바통의 무게가 30kg 역기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다면 그 누가 믿겠느냐마는 최소한 내 손에 전해오는 무게는 그 이상이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뛰었다. 각오는 일장기를 달고 달려야 했던 손기정 선수였고, 표정은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황영조 선수 못지 않았다. 마지막 주자에게 바통을 넘겨주는 그 순간까지 난 누가 뭐래도 그곳에 모인 가족과 아이들 가운데 최고의 비호였다.
그런데 마지막 주자가 또 넘어지고 말았다. 아까웠다. 다 이긴 게임이었는데. 이왕 진 게임인지라 내 마음대로 아쉬움을 달래볼 수 있었다. 경기가 끝나고 상대팀이 승리의 환호를 지를 때 우리는 최선을 다한 것에 대한 박수를 보냈다.
비록 졌지만, 마음만은 황영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