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는 제주다울 때 가장 아름답다

[9월에 찾는 한라산 꽃산행 ③] 한라산 노루와 세계자연유산

등록 2006.09.24 19:06수정 2006.09.26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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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윗세오름에서 바라본 한라산 정상

윗세오름에서 바라본 한라산 정상 ⓒ 박정민

노루가 뛰노는 어리목 하산길

잠시 숨을 돌린 후 어리목 코스로 하산합니다. 기분 좋은 고산초원은 앞으로도 한동안 계속됩니다. 등반 내내 오락가락하던 비구름이 말끔히 개어 정상까지가 훤히 드러나는 1600m 고지, 만세동산 즈음에서 반가운 얼굴을 마주합니다.


한라산의 명물, 노루입니다. 요즘 한라산을 등반하면서 노루 구경을 못했다면 운이 없는 편에 속합니다. 워낙 사람 발길이 잦은 탓인지 마주치고도 별로 멀리 달아나지도 않습니다.

a 한라산의 노루

한라산의 노루 ⓒ 박정민

한라산 노루는 KBS <환경스페셜>에서도 다룬 적이 있습니다. 노루가 너무 많아져서 농작물 피해가 막심하다는 한쪽의 주장과, 그것은 과장이며 일부의 피해 역시 결국 인간이 초래한 것이라는 반론이 함께 소개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노루뿐 아니라 꿩이며 멧돼지, 까치, 청설모 등 유해조수로 규정되어버린 모든 동물이 마찬가지가 아닐까 합니다. 애초에 그들의 삶터를 뺏은 것은 인간이 아니었던가요. 그들을 유해조수로 몰고 사냥하는 우리의 모습이란 어쩌면 땅을 빼앗기고 부랑자화된 인디언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미대륙의 '개척자들'과 한 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갑니다.

어리목 코스의 하산길은 대략 영실 코스의 반대 순서입니다. 고산초원에서 구상나무 군락으로, 다시 서어나무와 주목과 참나무가 무성한 교목림으로 바뀌어갑니다. 안 그래도 게으름을 피우며 올랐던 걸음, 내리막길의 경사도 별로 가파르지 않아 마냥 콧노래가 나옵니다. 1400m쯤에서 만나는 사제비약수의 물맛도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일품입니다.

a 오이풀. 잎에서 오이 냄새가 난다고 해서 얻은 이름입니다.

오이풀. 잎에서 오이 냄새가 난다고 해서 얻은 이름입니다. ⓒ 박정민

a 산박하

산박하 ⓒ 박정민

이윽고 어리목 휴게소까지 다다르면 한라산 꽃산행길은 끝이 납니다. 지각 하산자를 기다렸다는 듯 기이한 모습의 영석(靈石)이 지키고 서있습니다. 과거의 화산폭발 때 퍼져 나간 화산탄의 하나라는데, 마치 핼러윈 축제 때 쓰는 호박귀신 같은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걸어가면 주차장이고, 다시 1100도로를 지나는 버스를 탈 수 있습니다.(버스 시간표는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a 어리목 입구의 영석

어리목 입구의 영석 ⓒ 박정민

유네스코 자연유산으로 등재되기 위하여


요즘 제주도에 가면 곳곳에서 서명을 권유받게 됩니다.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시키기 위한 범국민서명운동으로, 지난 8월 중순 발족식을 거행하고 한창 진행 중이라고 하는군요. 올해 10월 전문가들의 현지실사를 거쳐 내년 6월에 결정이 된다고 합니다.

만약 성사된다면 한국 최초의 유네스코 자연유산이 되므로 경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관광산업을 위해서도 매우 유리할 것이고, 등재된 후에는 까다로운 관리가 필수이므로(제대로 관리·보전되지 않으면 언제라도 등재가 취소될 수 있습니다) 환경보전을 주장하는 쪽에서 봐도 반길 일인 듯합니다.

그러나 단지 서명을 많이 받는다고 유네스코가 인정을 해주는 것을 아닐 터입니다. 자연경관 자체가 얼마나 빼어나고 특이한지만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정적인 변수는 난개발 여부입니다. 보전의지가 확고해도 등재가 될까 말까 한 판에 난개발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면 일이 될 리 만무합니다.

이미 제주도 전역은 관광산업 부흥 목적 난개발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에 관광단지와 테마파크, 골프장, 숙박시설이 들어서고 있으며, 진통 끝에 잠정유보되었다고는 하지만 한라산 케이블카와 모노레일 설치를 추진하는 세력이 아마도 완전히 뜻을 꺾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한탄강댐처럼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겠지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제주 남서쪽 화순항에 해군기지를 조성하겠다는 계획까지 발표가 되어 해당지역 주민들은 결사반대 플래카드를 내거는 등 뒤숭숭한 분위기입니다.

a 산방산 인근의 해안마을에 걸린 해군기지 반대 플래카드. 한켠으로 잠수함 관광 안내문이 보입니다. 한눈에 보기에도 양립하기 어려운 관계 같습니다.

산방산 인근의 해안마을에 걸린 해군기지 반대 플래카드. 한켠으로 잠수함 관광 안내문이 보입니다. 한눈에 보기에도 양립하기 어려운 관계 같습니다. ⓒ 박정민

외지인이 무슨 자격으로 간섭이냐는 반박이 뒤따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외지인의 시각만은 아닌 듯합니다. 예컨대 윤용택 제주대 교수의 <제주일보> 9월 2일자 기고문([제주시론] '세계자연유산에서 본 개발과 보전')을 보더라도 제주도민들 역시 이러한 문제를 분명히 인지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몇 해 만에 찾은 제주는 역시 누구라도 가만 놔두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운 섬이었습니다.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육성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그 내용과 방향이 아닐까 합니다.

이른바 '국민관광단지'로 지정·육성해서 완전히 망가트려 버린 곳곳의 사례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20세기 중반 풍의 싸구려 행락단지를 만들어놓고 관광객이 몰려오기를 기대하는 것일까요.

케이블카와 모노레일이 붕붕거리는 한라산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골프장과 위락시설은 수도권에도 넘쳐나게 많습니다. 개인적 견해를 밝히자면, 한라산에 그런 시설이 들어선다면 다시는 그곳을 찾지 않게 될 것 같습니다. 이번 꽃산행의 아름다운 기억이 깨어질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찾고 싶어하는 제주와 유네스코가 지정하고 싶어하는 세계자연유산의 모습이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산은 산다울 때, 제주는 제주다울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a 흰진범(흰진교)

흰진범(흰진교) ⓒ 박정민

덧붙이는 글 | 9월 9일과 10일 한라산에 올랐습니다 
---------
이 기사는 'SBS 유포터'에도 송고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9월 9일과 10일 한라산에 올랐습니다 
---------
이 기사는 'SBS 유포터'에도 송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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