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국의 입장에서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를 무대로 식민통치 피해배상을 받아내겠다던 한국의 전략은 미국의 대일 전략 때문에 수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이 일본을 패전국이 아닌 동맹국으로 대우하는 쪽으로 선회함에 따라, 미국은 전승국들의 대일 배상 요구에 제동을 걸기 시작하였고, 이 과정에서 한국은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서 배제되고 말았다.
미국은 한국이 일본을 상대로 너무 많은 배상금을 청구하지 않기를 희망했다. 미국은 또 한·일 양국이 상호 '대등한' 지위에서 이 문제를 조속히 처리하기를 희망했다. 이는 일본을 전범국가·패전국가의 멍에로부터 구출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한국은 할 수 없이 한일회담을 통해 식민통치 배상문제를 매듭짓는 쪽으로 전환하고 말았다. <기자 주>
미국의 대일정책이 수정됨에 따라 식민통치 배상문제는 한일회담에서 처리될 수밖에 없었다. 위 주(註)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한일회담은 애초 한국이 의도했던 형식이 아니었다. 한국은 전승국의 입장에 서서 패전국 일본에서 배상을 받아내려 하였지만, 그 누구보다도 미국이 그것을 원치 않았다.
무인도(권력 공백의 동북아)에서 여자 '탈옥수'(일본)를 체포한 보안관(미국)은 그 여자 탈옥수에게 흑심을 품은 나머지, 다른 보안관(한국)이 그 탈옥수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는 것을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그 다른 보안관에게서 권총(전승국의 지위)마저 빼앗아 버렸다. 그리고는 그 '여자'를 데리고 어디론가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미국이 한국의 대일 배상청구를 방해한 뒤인 1951년 10월에 미국의 주선에 의해 한일회담 예비회담이 개최되었다. 한국전쟁 중인 한국으로서는 최선을 다할 수 없는 시기였다.
결국 회담은 양국의 견해 차이만 드러낸 채 끝나고 말았다. 한국은 대일 청구권 문제, 어업 문제, 재일한국인 문제의 일괄타결을 주장했다. 반면, 일본은 재일한국인 문제를 우선 처리하는 분리타결을 주장했다.
4개월 후인 1952년 2월 15일에 제1차 한일회담이 시작되었다. 한국이 먼저 선공을 시작했다. 2월 21일 한국은 <한·일 간 재산 및 청구권 협정 요강>을 제출했다. 한국 측이 요구한 배상금은 총 22억 달러였다.
이원덕은 <한일 과거사 처리의 원점-일본의 전후처리 외교와 한일회담>이라는 책에서, 이러한 한국 측 요구는 배상 요구가 아니라 원상회복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럼, 이러한 요구에 대해 일본 측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한국이 요구한 배상금액이 너무 많으니 좀 깎아달라고 했을까? 일본은 그러한 차원을 뛰어넘어 아예 한국을 상대로 일본인 재산의 반환청구를 제기하는 뻔뻔스러움을 보였다.
일본의 뻔뻔스러움
2월 21일자 한국의 선공에 대한 일본의 반격은 3월 6일에 나왔다. 일본이 3월 6일 제출한 <재산청구권 처리에 관한 일·한 간 협정의 기본요강>에 따르면, 일본은 패전 당시인 1945년 8월 15일 현재 자신들이 한국에서 702억5600만 엔의 재산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일본 측은 그 금액을 한국에 청구했다.
국사편찬위원회 박진희 연구원은 제1편에 소개된 논문에서 이 금액을 당시 달러로 환산하면 46억8300만 달러에 상당한다고 말하였다.
위에서 한국이 일본 측에 요구한 배상금은 22억 달러였다. 그러므로 일본이 요구한 46억 8300만 달러는 한국측 요구 금액보다 2배 이상 많은 것이다. 일본의 식민통치로 일대 수난을 겪은 피해자 한국보다도 가해자 일본이 더 많은 배상금액을 요구한 것이다.
박진희 연구원은 "이러한 일본 측의 '황당한 요구'는 꼭 배상금을 받아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한국의 대일 청구권을 상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한국의 식민통치 배상 요구를 무마시키기 위하여 일본도 일본인 재산 반환을 청구한 것이다. 채권자의 어안을 벙벙하게 만들어 채권자를 돌려보내자는 계산인 것이다.
이로 인해 한일회담은 한국의 대일(對日) 청구권을 논의하는 자리라기보다는 일본의 대한(對韓) 청구권을 논의하는 자리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주객전도(主客顚倒)인 셈이다.
일본의 대한 청구권과 관련하여 한·일 양국 간에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4조 (b)의 해석이 쟁점이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52년 3월 25일 양유찬 한일회담 한국 측 수석대표(주미대사 겸직)가 미국의 공식 해석을 요청하였다.
그럼, 일본의 대한 청구권 문제와 관련하여 미국은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당시 중재자의 입장에 있었던 미국은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았다. 일본의 황당한 요구에 대해 명확하게 "No!"라고 답변하지 않은 것이다.
"일본의 대한 청구권 문제는 한·일 양국이 적절히 처리하라"고만 권고했을 뿐이다. 이같은 미국의 모호한 태도 때문에 한·일 간의 분쟁은 한층 더 고조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의 모호한 태도가 문제를 더욱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는 상황 속에서, 일본은 한 술 더 떠서 미국을 상대로 좀 더 대담한 요구사항을 내걸었다. 일본은 미국에 대해 심지어 다음과 같은 요구 사항까지 제시했다.
첫째, 미국은 '한일협상에서 제기된 모든 현안은 한·일 양국 간에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시종일관 견지할 것. 둘째, 미국은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제4조에 의거하여 한일협상과 관련하여 (미국이 한국 편을 들고 있다는) 편견을 줄 어떤 행동도 취하지 말 것. 셋째, 미국은 '조만간 만족한 결과에 도달하기를 희망한다'는 선에서 공식 입장 표명을 자제할 것.
패전국 일본은 이처럼 미국에 구체적인 행동까지 주문하면서, 미국이 한일관계에서 한국 편을 들지 않도록 촉구하였다. 당시 한국이 한국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미국이 한국 편만 들지 않는다면 한국과의 단독 협상에서 얼마든지 승산을 기대할 수 있다는 속내를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배상요구에 한 술 더 떠서 일본이 한국보다 2배의 금액을 요구하는 가운데, 제1차 한일회담은 난항을 거듭하였다. 한국의 대일 청구권보다도 일본의 대한 청구권이 오히려 '이슈'로 떠 올랐기 때문에 문제가 더욱더 복잡해지고 만 것이다.
결국 1952년 4월 25일 일본 측 수석대표인 마쓰모토가 김용식 후임 수석대표에게 교섭 불가를 통보함으로써 제1차 한일회담은 결렬되고 말았다.
이후 일본은 회담 결렬의 책임을 한국 측에 전가하는 태도를 보였다. 1952년 5월 14일 및 16일 중·참 양원 외무위원회에 각각 출석한 오카자키 일본 외무대신은 "한국이 마치 전승국처럼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을 해석하고 일본의 한국 지배를 불법이라고 전제했기 때문에 한일회담이 결렬되었다"는 망언을 일삼았다.
이처럼 제1차 한일회담은 미국의 모호한 태도와 일본의 적반하장격인 태도로 인해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회담에서는 한국의 대일 청구권보다도 일본의 대한 청구권이 더욱더 주목을 받았다.
그럼, 이후의 한일회담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덧붙이는 글 | 이후 과정에 대해서는 제3편에서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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