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면 싸우지 말아야 할 텐데..."

[해외리포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학생들, 한국에서 평화선언문 합의

등록 2006.09.28 09:06수정 2006.09.28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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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선언문 낭독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남한과 북한의 새터민 학생 등이 평화와 공존을 위한 평화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다. 좌로부터 모하메드(팔레스타인), 아밋(이스라엘), 박일환(북한), 나재희(한국). ⓒ 이강근

지난 23일 새벽 5시, 경기도 파주 금산리 산골에 자리한 민속민요보존회관에 밤새 잠겼던 방문이 드디어 열렸다.

전날 밤 9시부터 시작해 장장 8시간의 밤샘 마라톤 회의 끝에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학생대표들이 평화와 공존을 위한 합의문을 완성한 것이다. 초가을 금산리의 새벽공기는 상쾌했고 밤새 못잔 피곤함에도 양측 학생들의 표정은 밝았다.

경기도 세계평화축전의 코파이스(KO.PA.IS), 즉 평화와 공존을 위한 남-북한 및 팔레스타인-이스라엘 학생대표들이 일주일간의 일정으로 방한해 나흘째 되는 날 평화선언문에 합의한 것이다.

수 차례의 휴회와 정회를 거듭했고, 한때 의견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각각의 입장만을 표명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기도 했었다.

그러나 국경문제나 예루살렘 지위 등 난제는 뒤로 하고, 우선적으로 비폭력 및 협상을 통한 평화와 공존이라는 원칙적인 합의를 도출한 것이다. 양측 학생들은 "폭력종식" "팔레스타인의 국가건설" "67년 국경 회복" "팔레스타인 영토 내 이스라엘 정착촌 철수"라는 굵직한 주제에 합의를 했다. 마치 2003년 오슬로협정을 연상케 했다.

이 모임에 참석한 학생대표들은 우연히도 93년 오슬로 평화협정 파트너의 같은 계보들이다.

오슬로협정에서 2001년 로드맵에 이르기까지 팔레스타인 측 협상을 진두 지휘한 협상수석대표 싸에브에라카드 박사가 보낸 팔레스타인 대표단과 당시 팔레스타인과 평화협상을 주도한 노동당의 현 학생위원장 텔아비브 총학생회장을 비롯해 메레츠 당 및 평화운동 학생대표들이 이스라엘 쪽에 포함되어 있다.

1993년 오슬로평화협정은 세 명의 노벨평화상을 탄생시킨 중동평화의 전환기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수반과 이스라엘 이츠하크 라빈 수상과 외무장관 시몬 페레스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협정 자체가 시대를 너무 앞선 탓에 이스라엘 라빈 수상은 평화협상의 대가로 극우파에 의해 저격 암살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평화는 다시 오리무중으로 빠져들어갔다.

그러나 14년이 지난 지금 그 후예들이 한국의 경기도 파주 땅 산골마을 금산리에서 오히려 오슬로 보다 한층 발전된 결과를 만들어 냈다. 당시 오슬로에서 결정된 팔레스타인 국가는 자치정부 수립 과정을 지난 후 몇 단계에 걸쳐 건국에 이른다는 조건이 있었다.

물론 이들 양측 학생대표들이 비공식적이며, 위임 받은 권한도 합의의 효력을 지닐 수 없다. 그러나 이들 양측 학생지도자들은 미래에 평화와 공존을 이끌어낼 가능성이 있는 인재들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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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합의문 작성 장소 경기도 파주시 금산리 산골에 자리잡은 민속동요보존회 건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그리고 한국 학생들이 평화 합의문을 작성하며 숙박했다. ⓒ 이강근

전쟁 중에 적국 학생들을 만난다?

이들이 한국 땅을 밟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애초 행사는 남북학생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행사를 한 달 남짓 앞두고 레바논 전쟁이 벌어졌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학생들을 한국에 초청하기로 계획을 바꾸었다. 그러나 초청이 더 쉬울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레바논 전쟁과 가자 공격으로 인해 악화된 팔레스타인 정서가 참여를 가로 막았다.

베들레헴 대학과 라말라 비르젯 대학은 물론 나블루스 나자르대학이 약속이나 한 듯 초청에 거부의사를 나타냈다. 레바논 전쟁 직후 이스라엘 학생들과 어울리는 행사를 학교이름으로 지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싸워도 만나야 문제 해결의 길이 있다는 몇몇 정치인들의 도움으로 성사될 수 있었다. 여기에는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이-팔 평화협상 수석대표인 사에브에라카트 박사의 도움도 컸다. 그러나 출발 나흘을 앞두고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 군의 군사작전이 벌어졌다. 그동안 뜸했던 총격소리가 심야를 진동시켰다. 그리고 이스라엘군을 향해 돌 던지던 13세 소년이 고무탄을 맞고 숨졌고 여러 명이 다쳤다.

"이스라엘 군이 쏜 총탄이 베란다에서 기도하던 아내를 30cm 비켜갔다. 이 상황에서 이스라엘 학생들과 함께 어울리러 간다는 것에 마음이 열리지 않는다. 그러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가기는 간다."

우사마 베들레헴 청년대표의 말이다.

외국여행의 설레임속에서도 양측 학생들 곳곳에서 예민한 반응을 드러냈다. 팔레스타인 학생들은 행사를 위해 나눠준 티셔츠에 불만을 드러냈다. 흰색바탕에 파란색 글씨가 그것이다. 이스라엘 국기를 국기란 말 대신 '라반 베샤홀', 즉 흰색과 파랑이라고 부르는데, 왜 흰색과 파랑색이냐는 것이다. 다행히 흰색에 녹색글씨의 티셔츠로 바꾸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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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웠던 평화토론회 9월 23일, 임진각 평화센터에서 열린 평화토론회. 토론회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학생대표 및 한국 학생과 북측을 대표해 새터민 대학생 2명도 함께 했다. 이날 북측 대학생 박일환군은 남북 분단 외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에 관한 토론을 듣고 한반도를 넘어 세계 평화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고 술회했다. ⓒ 이강근

"이스라엘이 미래 앗아가" - "우리도 피해자"... 일촉즉발의 토론장

그러나 시간은 양측 학생대표들의 마음을 열어갔다. 어울림의 시간과 함께 민감한 토론도 간간이 일어났다. 사실 너무나도 잘 알려진 양측의 입장과 지난 역사는 어쩌면 꺼내지 않는 것이 더 나은 경우도 있다. 일단 꺼내면 수습하기 어려운 상황이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이 아니더라도 자신들끼리도 쉽지 않은 주제를 놓고 토론을 벌일 때는 일촉즉발의 위기와 긴장이 있었다.

"이스라엘로 인해 우리는 많은 희생을 당해왔습니다. 땅과 삶이 황폐해졌습니다. 미래가 없습니다."

한 팔레스타인 학생이 던진 이 말 한마디는 토론장을 차갑게 만들었다. 이스라엘 학생들이 어떻게 대응할 지 주목되었다.

텔아비브대학 총학생회장 보아즈가 또박또박 한 마디를 했다.

"우리는 며칠 동안 이스라엘에서는 할 수 없는 좋은 시간을 팔레스타인 친구들과 함께 했습니다.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돌아가면 지속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우리 역시 우정을 나눌 수 없는 희생자이다."

사실 이곳에 참석한 이스라엘 학생 야리브는 다음주부터 예비군에 동원된다고 한다. 나블루스 검문소가 근무지다. 여리고에 살면서 나블루스 나자르 대학에 다니는 하딜이 여리고와 나블루스를 오가는 검문소에 근무할 예정이다. 다음주부터는 이스라엘 병사로서 검문소를 지나는 팔레스타인 학생들을 검문해야 하는 처지가 될지도 모른다. 이것이 이들의 현실이다.

짧은 일주일은 너무도 빨리 지나갔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학생들과 함께 어울린 한국 학생들의 세심한 배려와 친밀감에 모두는 하나가 되기 시작했다. 젊음은 빠르게 전염되어 갔다.

상대편 학생들의 재롱과 농담에도 귀엽게 받아들이고 함께 웃을 수 있다는 것은 이들이 이미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서울시내와 민속촌 관광은 수학여행을 하듯 아무 스스럼없이 치고 받고 수다를 떨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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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리본 달기 임진각 돌아오지 않는 다리에서 팔레스타인 마를렌이 평화기원 리본을 달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학생들은 남북한 분단의 아픔을 체험하는 기회가 되었다고 한다. ⓒ 이강근

"여러분들을 위해 속죄의 기도를 드릴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학생들이 전날 먼저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갔다. 배웅을 나가는 이스라엘 학생들은 어느새 팔레스타인 학생들 옆에 앉아 있었다. 히브리어 노래와 아랍어 노래가 번갈아 선창되었다. 공항에 다다를 즈음 이스라엘 학생 아밋이 마이크를 잡았다.

"우리는 돌아가면 다음주부터 유대절기 대속죄일을 맞이합니다. 우리는 여러분들에게 가했던 잘못을 놓고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할 것입니다." 감동이었다.

"우리는 한국에서의 일주일 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나라에서 이스라엘 친구들과 어울렸습니다. 우리 땅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지요." 팔레스타인 여리고에서 온 모하메드의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 9월 24일, 팔레스타인 소규모 무장단체는 이스라엘을 인정하는 단체든 개인이든 심지어 정부일지라도 테러를 가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팔레스타인 정부를 상대로 테러를 가하겠다는 위협은 처음 있는 일로 이-팔의 불안은 나날이 더욱 고조되고 있다.

하나도 놓치지 않고 끝까지 찾아내어 암살과 보복공격을 가하는 이스라엘이나 그렇게 두들겨 맞아도 굽히거나 물러섬이 없는 팔레스타인이나 모두 분쟁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기에 두 민족간에 평화는 더욱 절실한 현실이다.

언젠가 이 젊은 청년대학생들이 두 나라의 주도적인 지도자로 거듭나는 날, 우리는 이들에게 금산리협정을 되새겨줄 것이다. 우정의 외교다. 그리고 금산리 정신이 되살아나는 날 대한민국이 아시아를 넘어 세계 정치사의 핵인 중동평화 정착에 큰 주춧돌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제 그 첫 작업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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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포옹? 팔레스타인의 모하메드와 이스라엘의 아밋이 마지막 포옹을 하고 있다. 이들은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 만날 수가 없다. ⓒ 이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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