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영동으로 떠난 '가을 여행'

[여행] 박연의 고향 영동을 다녀와서

등록 2006.10.04 20:31수정 2006.10.07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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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10월 1일)엔 문화유적답사를 갔다. 이번 학기의 테마가 '우리 소리'여서, 소리를 찾아 떠난 답사였다. '난계 박연'의 고향 충북 영동으로 가서 난계국악 박물관과 영국사 그리고 송호리 송림을 둘러봤다.

난계라는 호는 바위틈에서 자라난 고고한 난초라는 뜻으로, 박연이 폭포 근처에서 대금을 불면 새들과 산짐승들이 한데 모여 춤을 출 정도로 대금소리가 아름다웠다고 한다.

난계 박연(1378~1458)은 조선 세종 때 사람으로 우리나라 3대 악성 중 한 명이다. 그는 하급 관리였던 박천석의 아들로 태어나 향교에서 공부를 하였다. 잠시도 피리를 손에서 놓지 않을 정도로 피리를 불었다. 그는 열한 살 때 모친이 돌아가셨는데, 모친을 잃은 슬픔을 이기기 위해 피리에 심취했는지도 모른다,

난계국악박물관 내부 모습

박연은 28세 되던 해에 초시에 합격했다. 다시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한양에 올라간 그는 현재의 국립국악원인 장악원에 찾아가 유명한 악공에게 가르침을 청하여 특별교습을 받았다. 그는 음악에 대한 공훈을 인정받아 집현전에 들어갔으며 세자 서강원의 강사로도 선임되었다. 이 시기에 훗날에 세종으로 왕위에 오른 충녕대군 이도를 만나게 되었다. 젊은 세자는 박연의 명연주에 크게 감동하여 음악에 관한 문제라면 모두 그를 크게 신임하며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난계국악박물관 내에 전시되어 잇는 편종과 편경

세종이 왕위에 오르자 박연은 음악관련 문헌과 뿔뿔이 흩어진 악기를 모으는 작업에 착수하여 문헌 수집을 위해 중국을 다녀오기까지 했다. 난계의 건의로 악기도감이라는 국립악기제작소가 설립되었고 각지에서 모인 공인들이 우리나라 전래의 악기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는 또 전통음악인 향악, 중국풍의 음악인 당악, 관청음악의 전통을 지닌 아악의 음률에 대한 조사결과와 악기 분석도 및 그 악보들을 정리하여 종합적인 음악책을 편찬하기로 계획하였다.

그의 부단한 노력으로 62종의 악기가 개조되어 고려말 사라진 대부분의 악기가 부활되었다. 그리고 국가적인 의식에서 고려말부터 내려온 향악을 폐지하고 새로 제작한 아악기로 새로 작곡한 아악곡 연주를 주장하게 되었다. 드디어 1431년(세종 13년) 정월 초하룻날 경복궁 근정전에서 열린 신년 하례에서 장엄하고 근사한 새 아악이 연주되었다.

'박'을 치며 국악기에 대해 설명을 해주시는 박물관장님

난계국악박물관은 부지 710평에 건면적 230평의 2층 규모로 지난 2000년 9월 20일 완공됐으며 영상실과 난계실, 국악실, 정보검색코너, 체험실 등으로 꾸며져 있다. 영상실은 난계 박연 선생의 일대기를 상영하는 장소이며 난계실은 난계 박연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비롯해 국악 연표, 연주모습, 국악기 제작과정 등 국악관련 자료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전시했고, 국악실은 국악기들을 관악기와 현악기, 타악기별로 모아 놓았다.

우리 국악기가 매우 다양한데, 정말 모르고 살았다는 느낌을 받았고, 기회가 되면 연수를 받아보고 싶었다.

난계국악 박물관에서 나와 바로 옆에 있는 난계사에 들렀다. 난계사는 박연 선생을 배향하기 위해 지난 1973년에 세워진 심천면 고당리에 있는 사우이다. 건물의 구조는 석조계단위에 목조기와지붕으로 정면 측면 2칸의 맞배집으로 솟을삼문과 담장이 둘러져 있다.

충북 영동지방은 금강 상류로 차창 밖으로 보이는 금강의 물살이 깨끗해 보였고, 한가로이 다슬기를 잡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점심식사는 금강에서 잡히는 다슬기로 만든 올갱이죽을 먹었다. 처음 먹어본 맛이라 얼른 적응이 되지는 않았지만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영국사 삼단폭포

충북의 설악이라고 불리는 천태산 영국사(寧國寺)에 가기 위해 30여분 정도 산을 올랐다. 오르던 중에 만난 삼단폭포는 물이 흐르지 않아 물이 많이 흐를 때의 아름다움을 가늠하긴 어려웠지만, 초록의 숲 속에 있다는 자체만으로 아름다웠다. 가을이지만 산에 오르니 땀이 줄줄 흘렀다.

영국사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223호로 충북 영동군 양산면 영국사 앞에 있다. 이 나무는 높이가 31m이며, 가슴 높이의 둘레는 11m이다. 대략 1000년 쯤 이곳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가지는 2m 높이에서 갈라졌으며, 동서방향으로 25m, 남북 방향으로 22m 정도 퍼져 있다. 서쪽 가지 중 하나는 밑으로 자라서 끝이 땅에 닿았는데, 여기서 자라난 새로운 나뭇가지는 높이가 5m 이상이나 되고, 가슴 높이의 지름이 0.2m가 넘는다.

이 은행나무는 국가에 큰 난이 있을 때는 소리를 내어 운다고 하며, 이 나무 바로 앞에는 계곡물이 흐르고 있어 충분한 수분을 공급받고 있다. 가을에는 이 은행나무와 주변의 경관이 하나로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며, 격년마다 많은 양의 은행이 열린다. 은행이 주렁주렁 열려서 풍성해 보였다. 은행은 보기 좋게 익어 있었다.

영국사 대웅전

원래 절의 이름이 국청사였는데,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이 침입하여 개경이 포위되자 왕이 이 절로 피난을 와서 국태민안을 기원하였다고. 이후 근위병들이 홍건적을 무찌르고 개경을 수복하게 되자 공민왕이 부처님의 덕으로 평군민안이 되었으니, 영국사로 바꾸도록 한 뒤 현판을 써주고 떠났다고 한다. 그 후 영국사가 되었다고.

2년 전 천태산에 큰 불이 나서 대웅전까지 위험했었다고 한다. 대웅전 안에 걸려 있는 탱화도 도난을 당했는데, 최근에 다시 찾았다고 한다. 문화재가 화재로 소실되는 일이 없도록 노력을 해야 할 것 같다.

영국사 원각국사비

원각국사비로 비몸돌은 점판암 한 장으로 되어 있으며, 비문은 총알을 맞아 손상된 곳이 많아 내용을 알아보기 어렵다.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에 비몸돌이 꽂혀 있고, 이수는 땅에 떨어져 있었다.

영국사 부도
신라와 고려에서 많이 조성되었던 8각 원당형의 부도이고, 재료는 화강암이다.

주변에 있는 소나무를 둘러보고 2년 전 화재가 크게 난 것을 알았다. 새까맣게 탄 부분도 많았다. 부도는 물을 뿌려서 다행히 불에 타지 않았다고 한다. 나무뿐 아니라 돌도 불에 약하다고 한다.

양산 팔경중의 하나인 용암

영국사에서 내려와 송호리 송림을 들러서 소나무와 금강이 어우러진 길을 걸었다. 선견지명이 있어서 송림을 만들어 놓으니 후손들에게 얼마나 값진 선물인가?

송호리 송림

처음 가본 충청북도 영동 지방은 국악박물관과 난계사, 국악기 제작촌이 있고, 국태민안을 기원하였던 영국사가 있고, 양산팔경과 금강이 있어 소박하지만 다시 가고 싶은 곳이다. 금강 상류에서 다슬기를 잡던 사람들이 부러워 물 속으로 들어가 같이 잡고 싶은걸 억지로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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