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손녀가 여자 대표로 차례 지낸 사연

큰어머님들, 이제 용기내서 차례 같이 지내면 안 될까요?

등록 2006.10.07 18:05수정 2006.10.08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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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추석 차례상. 이 앞에서 절해본 지도 10년이 넘었다.
올 추석 차례상. 이 앞에서 절해본 지도 10년이 넘었다.정연경
올 추석, 매년 차례상 앞에서 절하는 사람은 남자들뿐이었던 우리 집안에 변화가 생겼다. 10년 만에 여자가 차례상 앞에서 절을 한 것이다. 그것도 조부모님의 증손녀인 조카 혼자서 말이다.


때는 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릴 적부터 제사라면 빠지지 않고 들어가 넙죽 절하고 제수 음식을 맛보던 내가 귀여움을 받기에는 애매한 나이,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설날 차례를 지내려고 방에 들어가 있던 내게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이제부터 너하고 OO이(유일한 '여자' 사촌동생)는 나가 있어라."

그 뒤로 지난 설날까지도 차례상 앞에 여자가 선 적이 없었다. 그런데 드디어 올 추석, 그 판도가 깨진 것이다. 말하자면 사연은 길다. 물꼬가 터진 것은 작년 추석쯤이었을 것이다. 가족회의에서 막내인 우리 아버지께서 "남자만 제사를 지내던 관습을 깨고 여자도 함께 하자"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올해 설부터는 그렇게 하자"고 입을 모았다는데, 설날 차 고장으로 지방에서 올라오시지 못한 우리 부모님이 없으니 아무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예전 그대로 남자들끼리만 차례를 지냈다.


차례 지내는 방에는 남자 밖에 없다.
차례 지내는 방에는 남자 밖에 없다.정연경
그리고 이번 추석, 또다시 이야기가 나왔다.

아버지 "여자들도 이제 같이 와서 (차례) 지내지 그래요?"
할머니 "반소매 입고 차례 지내는 거 아니여."


여자가 제사 지내는 것을 본 적 없는 할머니에게는 일한다고 편하게 옷 입고 있는 며느리들이 차례상 앞에 선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당사자인 큰어머님들과 어머니 반응도 비슷하다. "옷을 이렇게 입어서…." 그런데 큰어머님들이 안 하시겠다니 '올해부터는 차례 지낼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해서 옷 잘 차려입고 온 내가 민망해진다.

"왜 안 지내세요?"
큰어머니1 "옷도 이렇게 입고…."
어머니 "나는 잘 몰라, 귀찮고 어려워…."

이 때 차례 지내던 큰아버지 한 분의 말씀이 멀리서 들린다.

"이러니까 여자들한테 돈을 못 주는 거야."

남자들이 나서서 차례 같이 지내자 하는데도 여자들이 소극적으로만 나오니 답답해서 하신 말씀이겠지만, 막상 그런 소리 들으니 화가 난다.

여자들은 편한 옷을 입고 아침 준비를 했다.
여자들은 편한 옷을 입고 아침 준비를 했다.정연경
"옷 때문에 못 지낸다는 건 핑계죠. 여자라고 안 하는 세상이 아니잖아요."
큰어머니2 "그래 나는 지내고 싶은데, 혼자 갈 수가 없어서…. 다음번엔 나랑 같이 가서 지내자."

결국 큰어머님들은 안 하실 생각인 것 같았다. 남은 여자조카를 데리고 차례 지내는 방 앞을 서성거렸다.

큰어머니3 "너희 둘(나와 조카)이 여자 대표로 차례 지내면 되겠네."
큰어머니4 "그래, 옷도 잘 입었겠다. 너희 둘이 지내면 되는 거야."

여자 대표는 뭐고, 또 뭐가 된다는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다. 나 역시 차례 지내는 것이 좋다기보다는 가족이 다 함께 하는 명절, 남자는 하고 여자는 안 하는 게 있다는 것이 싫을 뿐이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4살 조카가 엄마한테 가서 조르기 시작한다.

"엄마~ 나랑 같이 가서 절하자. 응?"

집안에서 제일 막내 위치에 있는 손자며느리는 시어머니도 안 하시는 차례를 하자고 딸이 조르니 난처한가 보다.

"안돼, 엄마는 하면 안 되는 거야."

어린 조카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랑 같이 절하고 싶은데 혼자만 하라고 하니 겁도 나고 싫었던 모양이다.

우는 조카를 달래는 엄마와 큰어머니.
우는 조카를 달래는 엄마와 큰어머니.정연경
조카가 울자 어머님들이 나서서 달래기 시작하셨다. 한복을 입고 있는 조카만이 차례상 앞에 설 수 있다며 여기서도 '옷 핑계'를 대신다. 조카는 금방 울음을 그치고 내 귀에 귓속말을 한다.

"언니(실제 촌수로는 내가 5촌 당숙 아줌마다), 우리 같이 절하자, 응?"

그러나 나는 할 수 없었다. 절을 하라고 조카를 달래는 사이 이미 내가 들어갔어야 할 순서는 지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조카는 혼자 들어가서 사뿐히 절을 올렸다. "옳지, 잘~ 한다"란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여자대표로(?) 차례 지내는 4살 조카
여자대표로(?) 차례 지내는 4살 조카정연경
그런 조카를 보고 있으니 제사에서 빠지게 된 초등학교 5학년 때가 떠올랐다. 아침 일찍 일어나 여러 번 절을 해야 하는 것이 귀찮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막상 나보다 어린 남동생들도 되는데 나는 안 된다고 하니 심통이 잔뜩 나 혼자 씩씩 거렸었다.

"에이 귀찮은데 안 해도 돼 좋다."

집안의 며느리들도 옛날부터 안 하는 것이 당연하다보니 '귀찮은데 안 해도 돼 좋다'고 그냥 합리화해 버린 것이 아닐까. 큰어머님들, 이제 번거롭다 생각 마시고, 쑥스러워 마시고 용기내서 같이 차례 지내면 안 될까요?

차례뿐만 아니라 이제는 집안 행사와 일, 모두 다같이 했으면 좋겠다. 음식 준비도 설거지도 커피 타는 것도 다같이 돌아가면서 할 수 있을 텐데. 여하튼 이제 조카가 첫 테이프를 끊었으니 내년 설날에는 여자도 함께 차례 지내기를 기원해본다. 명절은 가족 모두가 함께 하는 날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정연경 기자는 오마이뉴스 인턴기자입니다.

덧붙이는 글 정연경 기자는 오마이뉴스 인턴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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