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2002년 8월 13일 촬영한 북한 영변 핵시설 위성사진.연합뉴스
플루토늄탄은 원자로에서 사용하고 난 핵연료봉을 재처리해서 추출하는 플루토늄을 원료로 만든다. 보통 사용 후 연료봉에 플루토늄탄의 원료가 되는 'Pu239'는 1% 정도만이 존재하는데, 이를 90%로 농축해야 하기 때문에 대규모 화학공정이 따른다.
이에 비해 우라늄탄은 자연 상태의 우라늄에 약 0.75% 함유돼있는 'U235'를 90% 이상으로 농축해서 만든다. 농축과정에는 '원심분리법'이 많이 사용되는데 수천개의 원심분리기를 1년 내내 돌려야 겨우 폭탄 1개 정도 제조가 가능하다.
그러나 소규모로 분산 은닉이 가능하고, 방사능 누출 위험이 없으며, 전력 문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비밀리에 핵개발을 추진하는 나라들이 이 방법을 즐겨 사용해왔다. 과거 리비아가 이 방식으로 핵무기를 개발하려다 결국 포기했고, 지금은 이란과 북한이 이를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북한의 고농축우라늄(HEU) 핵개발 의혹은 2002년 10월 당시 제임스 켈리 미 국무차관보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 돌연 부상했다. 켈리 차관보는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과의 회담에서 HEU 의혹을 제기하면서 "북미합의와 남북한 비핵화공동선언 위반"이라고 따졌다.
다음날 회담장에 나온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은 "미국의 적대정책이 핵무기보다 더한 것도 갖게 했다"며 대결자세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켈리 차관보는 귀국하고 나서 이를 근거로 북한이 HEU 계획을 인정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북한은 그 후 '근거 없는 얘기'라며 부정하는 자세로 돌아섰고, 6자 회담에서도 일관되게 HEU 계획을 부정하고 있다.
[1차 북핵위기] IAEA 사찰 거부... 사찰해보니 플루토늄 양 달라
본래 '북한 핵 의혹'은 플루토늄에서 출발했다. 북한이 처음으로 손에 넣은 플루토늄은 93년 이른바 '제1차 북핵위기' 이전 평안북도 영변의 실험용 원자로에서 꺼낸 사용 후 핵연료봉을 재처리해서 얻은 것으로 추정된다. 영변 실험용 원자로는 소련으로부터 기술지원을 받은 5000㎾급 흑연 감속로이다.
북한은 1985년 당시 소련으로부터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위한 지원을 얻기 위해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했다. NPT 체약국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안전협정을 체결하고 사찰을 받을 의무가 있으나. 북한은 이를 계속 거부했다.
1989년에는 흑연감속로를 70일간 정지시킨 일이 있었다. 이 사이에 핵연료봉을 꺼내 재처리했다는 의혹이 부상했다.
92년에 겨우 안전협정을 체결하고 사찰을 받아들였으나 북한이 추출했다고 신고한 플루토늄의 양과 사찰결과가 맞아 떨어지지 않았다. 이것이 '1차 북핵위기'의 시작이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93년 2월 의회 보고에서 "북한이 IAEA 몰래 핵무기 1개를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을 제조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이것이 북한이 처음으로 확보한 핵무기 재료이다.
'북폭위기'까지 간 핵연료봉 추출... '제네바합의' 했으나
IAEA는 93년 2월 북한이 신고한 플루토늄 양과 사찰결과의 차이를 규명하기 위한 특별사찰 실시를 결의했다. 그러나 북한은 이를 거부하고 그 해 3월 NPT 탈퇴를 선언했다. 이어 94년 5월부터 영변 흑연감속로에서 사용 후 핵연료를 꺼내기 시작했고, 6월에는 IAEA 탈퇴를 위협했다.
이렇게 북핵 위기가 단계적으로 고조되는 가운데 미국이 영변 핵시설에 대한 공중폭격 검토에 들어갔다는 보도가 잇달았다. 남쪽에서는 사재기 바람이 불고, 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이 때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전격적인 북한 방문이 이뤄지면서 상황은 급반전된다. 당시 김일성 주석은 카터 대통령에게 IAEA 사찰관의 체류를 받아들이고, 남북 정상회담에도 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정세는 급속히 대화국면으로 이행, 그 해 10월 북·미간 제네바합의가 체결됐다.
이 합의에 따라 북한이 흑연감속로에서 추출한 사용후 핵연료봉은 알루미늄 용기에 밀봉해 영변의 수조 저장시설에 보관했다.
제네바합의는 북한이 과거 추출했을지도 모를 플루토늄의 처리는 일단 뒤로 미룬 채 현재와 미래의 북한 핵 프로그램을 동결시키는 합의였다. 이 합의는 미국의 정권교체 등 내외 환경의 변화 속에서 위태롭게 생명력을 이어가다가 2002년 켈리 차관보의 방북을 계기로 결렬 국면을 맞는다.
[2차 북핵위기] 깨어진 합의... "핵연료봉 8천개 재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