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냐 명분이냐'...조선의 선택은?

고산이 살던 명·청 교체기의 조선중기

등록 2006.10.11 08:32수정 2006.10.11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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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고산의 영정사진

고산의 영정사진 ⓒ 정윤섭

요즘 우리나라의 국내외 상황을 보면 '역사는 반복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되새기게 한다. 이라크 파병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논란이나 '작통권'을 놓고 벌어지는 소위 집권당과 야당의 갈등 내지는 싸움이 조선시대 역사에도 그대로 벌어졌기 때문이다.

주변 강대국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철저한 실리외교가 필요한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지만 그것은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으며, 이 같은 현실을 무시한 채 지나친 명분론을 쫓다 나라가 존망의 기로에 서야했던 때가 있기도 하였다.


16C 사림정치 시기 이후 조선 정국은 이상적인 유교정치인 왕도정치(王道政治)를 내세우면서 명분론을 앞세우는 사림(士林)파와 부국강병의 현실주의 노선을 지지하면서 기득권을 지키려는 훈구파의 갈등과 충돌이 일어나는 때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갈등이 서로 지향하는 이념과 노선에 따라 사색당파로 나누어지는 붕당정치를 이루게 되는데, 어느 당파가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 국가의 노선이 정해지는 것을 보면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조선중기 명·청의 교체기에 상징적인 사건 두 가지가 일어난다. 하나는 광해군 때에 명나라가 요청한 구원병문제였다. 이라크의 파병요청을 연상시키는 이 사건은 물론 각 당파 간에 큰 논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립외교를 표방한 광해군과 대북파들이 정권을 잡고 있던 때라 명나라의 원병요구에 강홍립으로 하여금 병력을 이끌고 가게는 하지만 투항을 하게하여 본의 아니게 싸움에 참여하게 됨을 알림으로써 전란에 휘말리지 않게 된다.

그런데 곧이어 인조반정으로 임금이 바뀌면서 성리학적 명분론을 앞세운 정권이 들어서자 이들은 다 쓰러져 가는 명나라를 섬기려 하는데, 그 결과는 청(금)나라에 치욕적인 항복을 하게 되는 결과만 남긴다. 이 두 상황을 놓고 보면 집권당의 노선이나 판단이 어떠하냐에 따라 나라의 존망까지도 결정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 윤선도

a 서울 연화방의 고산의 출생지 푯말

서울 연화방의 고산의 출생지 푯말 ⓒ 정윤섭

고산 윤선도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선조대에 태어나 광해군과 정묘호란이 일어난 인조대, 그리고 효종과 현종에 이르기까지 다섯 임금을 거친 인물로 고산의 생을 보면 당시 조선중기의 역사가 한눈에 펼쳐진다.


당시 조선시대 사람들의 평균연령이 50세를 전후해 살았던 것을 감안하면 85세까지 장수하면서 그 세월만큼이나 굴곡진 역사의 현장에서 살았던 사람이 고산 윤선도다.

특히 광해군과 인조대에는 고산의 나이 30대와 40대의 가장 활발한 정치활동기로 대외적으로는 기울어가는 명나라와 새로운 신흥강국인 청(금)나라 사이에서 새로운 세계질서가 펼쳐지는 시기여서 당시의 국제질서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사대부(관료)들의 삶이 대체로 비슷했으리라 생각하지만 고산 윤선도의 삶 또한 자신의 일생을 통해 출사와 낙향 유배와 은둔의 과정을 반복하면서 조선 땅의 전국을 누비며 살다 간다.

고산이 살았던 곳을 나누어 보면 서울에서 39년, 유배지인 함경도 경원·삼수, 경상북도 영덕, 경상도 기장, 전라도 광양등지에서 14년, 그리고 양주·수원에서 1년, 성산(현감)에서 2년을 보냈으며, 은둔지인 금쇄동에서 9년, 보길도에서 12년을 보냈는데, 정작 종택인 녹우당에서는 6년여의 시간만 머무른 것을 알 수 있다. 종손이었지만 실제로 종택인 녹우당에는 오래 살지 않았던 것이다.

개국초 정권에서 소외된 사림들이 지방에서 서원을 중심으로 실력을 양성하고 인물들을 키워 결국 16C에는 정권을 잡아 이들은 지속적으로 관직에 진출한다. 이후 붕당정치 속에서 사화라는 비극적 현상이 나타나지만 서울(관직)로의 진출을 통해 한 집안의 명맥을 이어감을 알 수 있다. 해남윤씨가 또한 조선중기까지는 탄탄하게 관직에 진출하고 있다.

고산은 어찌 보면 서울내기라고 할 수 있다. 고산은 서울의 연화방(종로 연지동)에서 태어났다. 고산 윤선도는 아버지인 윤유심(惟深)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8세에 큰 아버지인 윤유기(唯幾)에 입양되어 종가의 대를 잇는다. 그런데 윤유기 또한 윤홍중에 입양되어 대를 이은 인물이다. 이러한 해남윤씨가의 입양은 이후 줄곧 이어지는데 이는 해남윤씨가의 가업과 계보가 확실하게 이어질 수 있는 안전장치이기도 하였다.

그는 서울의 명동(명례방)에서 살았다. 고산은 17세에 남원윤씨와 결혼하였는데 결혼 후에도 한참 후까지 서울에서 살았다. 고산은 25세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고향인 녹우당(해남)에 내려간 것을 보면 그의 생활이 주로 서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전의 귀향에 대한 기록이 발견되고 있지 않아서인지는 몰라도 고산은 25세에 처음으로 고향에 내려가는데 '남귀기행(南歸記行)'에 보면 월출산을 거쳐 내려오면서 느낀 감회가 담겨있다.

아버지의 관직 생활 때문에 자연히 서울이 생활근거지가 되기도 했겠지만 고산의 생애를 통해 40년 가까이가 서울에서 이루어진 것을 보면 고산이 살던 조선중기 또한 정치와 학문, 관직 생활이 서울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a 고산의 영덕 유배지

고산의 영덕 유배지 ⓒ 정윤섭

명·청 교체기 광해군의 선택

고산이 태어난 것은 1587년(선조20년)이다. 고산의 성장기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일어난 시기로 조선사회로서는 격변의 시기였다. 조선사회를 임란을 기점으로 하여 전후기로 양분하듯이 큰 변혁의 시기에 고산은 성장기를 보냈다고 할 수 있다.

40여년간의 긴 재위기간을 보낸 인조가 1608년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한 해는 고산의 나이 23세 때다. 당초 선조의 서자인 광해는 오랫동안 직계손이 없게 되자 세자로 책봉된다. 그러나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낳음으로서 상황은 묘하게 전개 된다. 선조가 광해군 대신 적자인 영창대군으로 세자를 바꾸려 하자 광해를 지지하던 대북파 이이첨, 정인홍, 이경전 등이 반대하게 되며 선조는 이들을 강계로 귀양 보내려한다.

그러나 이들이 유배지로 떠나가 전 선조가 갑자기 서거함에 따라 광해가 즉위하게 되고 이들 대북파가 정권을 잡게 되는 것이다. 이로 인해 광해군 때는 이들 대북파가 득세하게 된다. 광해군은 임란후의 전후복구를 위한 여러 민생안정대책을 실시하고 중립외교를 통해 강대국속에서 나라를 유지시키지만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영창대군을 살해하는 등 법가의 패도를 빌린 까닭에 성리학의 명분론에 어긋나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중기를 놓고 볼 때 각 당파의 이념적 성향이 지금의 보수나 진보처럼 크게는 성리학적 명분론을 중시하는 사림파와 자주적이고 현실적 노선의 훈구파로 나뉠 수 있는데, 대북파는 광해군의 중립노선을 지지해 전란의 참화는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고산은 광해군 때 인생의 중요한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등 사색당파의 '붕당정치'시기에 고산은 남인에 속해 있었다. 이때 고산은 자신의 생애에 있어 커다란 변화의 계기가 생기는데 그것은 고산의 나이 30세인 광해군 8년에 이루어진 '병진소(丙辰疎)' 때문이다. 고산은 이때 집권파인 이이첨 일파의 난정(亂政)을 탄핵 상소하여 일대 파란을 일으킨다.

당시 집권당의 횡포내지는 프리미엄이 가미된 상황이었겠지만 이 병진소는 고산의 꼿꼿한 성격과 앞으로 파란 많은 일생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목숨을 걸고 한 상소였던 만큼 고산은 집권파에 의해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당하며 일종의 연좌제에 의해 양부인 윤유기 또한 관직에서 삭탈 당한다.

a 고산 윤선도의 14대 종손인 윤형식씨

고산 윤선도의 14대 종손인 윤형식씨 ⓒ 정윤섭

명분론자들의 득세

1623년 다시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정권이 바뀌면서 서인파가 정권을 잡게 된다. 이때 고산의 나이 37세로 정권이 바뀌면 대 사면령이 내리듯이 고산도 경상도 기장의 유배지에서 8년 만에 풀려나 고향 해남으로 내려간다.

25세에 잠깐 귀향하여 선현들께 참배한 이래 실제로는 가장 완전한 귀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산은 이때 녹우당에서 유배생활의 흐트러진 심신을 다스렸을 것이며, 종손으로서의 면모를 다졌을 것으로 보인다.

고산의 생애를 보면 인조의 재위기간이 가장 화려한 시기이자 또 다른 시련기이기도 하였다. 집권파의 이념이 대의명분을 중요시하였으니 다 쓰러져 가는 명나라를 섬기기 위해 이름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고산의 나이 41세인 1627년(인조 5년) 청(금)나라가 침입해오는데 다행히 조선은 어렵게 화의를 통해 전란을 수습한다.

고산에게는 42세부터 정치적으로 탄탄한 길이 열린다. 42세에 별시문과초시에 장원급제하고 이로 인해 이조판서 장유의 천거로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로 임명된다. 이때부터 여러 관직이 제수되는 등 화려한 시기를 보낸 때가 40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격변의 대외정세 속에서 의리만 따지고 앉아 있는 조정에 평화가 지켜질 리가 없었다. 1637년(인조15) 병자호란으로 인해 인조가 청태종에게 치욕적인 항복을 하게 된다. 어찌 보면 우리나라 외교사의 가장 치욕적인 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명분론과 현실론사이에서 어떤 균형 외교가 필요한지를 말해주는 사건이다.

고산의 삶 또한 격랑 속으로 빠져 고산은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를 구하기 위해 고향의 가복수백을 거느리고 가지만 이미 전쟁은 끝난 상황이어 그대로 돌아오고 만다. 그러나 이때 임금을 배알하지 않고 왔다는 반대파들의 모함으로 고산은 다시 경상도 영덕으로 유배를 떠나야 했다.

인조가 죽고 자신이 사부였던 효종이 등극한 것은 고산의 나이 64세였다. 효종의 사부였던 고산은 효종의 붕당연합적 정책으로 한때 등용되기도 하였지만 정적들의 정치적 견제 속에서 그리 큰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현종 1년인 74세에는 함경도 삼수로 유배되는 등 말년까지도 고난을 당한다. 그는 74세의 늘그막에 유배길을 떠나 다시 전남 광양으로 이배된 후 81세에 해배될 때까지 7년간을 유배지에서 보낸다.

고산이 숨을 거둔 것은 보길도에서 그의 나이 85세(현종 12년, 1671년)였다. 그의 생애를 통해 선조, 광해군, 인조, 효종, 현종 등 다섯 임금이 거쳐 가는 동안 조선의 역사는 우리 앞에 많은 교훈을 남겨 놓았다.

덧붙이는 글 | 해남윤씨가의 5백년 역사여행

덧붙이는 글 해남윤씨가의 5백년 역사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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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를 중심으로 지역의 다양한 소재들을 통해 인문학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특히 해양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16세기 해남윤씨가의 서남해안 간척과 도서개발>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바 있으며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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