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뚝뚝한 '경상도 싸나이'의 순정

우리 가족 5년만의 극장 나들이, 그리고 아버지의 문자 메시지

등록 2006.10.12 10:03수정 2006.10.12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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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오랜만에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 오니 좋지?”
“응, 좋긴 한데.”
“근데 뭐?”
“이 스테이크 하나면 제육덮밥이 몇 그릇인데.”
“오빠 정말 분위기 못 맞춘다. 말만 좋게 하면 참 좋을텐데.”



나는 이렇게 분위기를 참 못 맞춘다. 여자 친구는 나를 ‘무룩이’ 라고 부른다. 항상 시무룩한 표정에 무뚝뚝하게 얘기한다고 붙여준 별명이다. 사실 나도 무뚝뚝하다는 소릴 듣지 않기 위해 무던한 노력을 해왔다. 하지만 고쳤다 해도 긴장을 늦추는 순간 다시 난 무뚝뚝해진다. 본성은 무의식중에 반드시 나오기 마련.

그렇다. 나의 무뚝뚝함은 본성이다. 그리고 그 본성은 바로 ‘유전’이 된 것이다. 경상도 출신의 아버지 덕에 나까지 무뚝뚝해졌다. 이건 정말 ‘유전’ 맞다. 어머니가 아버지께 하는 소릴 내가 여자 친구에게서 똑같이 들으니 말이다.

어머니와 여자 친구의 이구동성, “말 좀 예쁘게 해!”

가장 최근에 찍은 우리 가족 사진. 좋은 인상과는 달리 아버지께서는 참 무뚝뚝하시다.
가장 최근에 찍은 우리 가족 사진. 좋은 인상과는 달리 아버지께서는 참 무뚝뚝하시다.김귀현
아버지의 고향은 경상북도 청도군이다. 지금은 소싸움으로 이름이 알려졌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던 시골 중의 시골이다.

경상도 남자들과 결혼하면 ‘밥도’, ‘아는’, ‘자자’. 세 가지 말만 들을 수 있다는 흘러간 개그가 있다. 하지만 나에게 이건 개그가 아닌 현실이었다. 회사에 다녀오신 아버지는 정말 말씀이 없으셨고, 지속적으로 아버지께 말을 거시는 어머니에게서 돌아오는 건 단답형 2음절 이하의 대답뿐이었다.


가끔 하시는 말씀도 정말 ‘뼈’가 있었다. 그런데 그 뼈는 흔히 얘기하는 ‘예사로운 말속의 깊은 뜻’이라는 ‘말 속의 뼈’가 아닌 ‘가시가 돋힌 뼈’ 였다. 그 가시 돋힌 뼈로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도 적지 않았다.

매우 기쁜 상황이 닥쳐도 “뭐 이런 거 가지고 좋아하나”, 어머니가 맛있게 만드신 음식을 맛보시고는 “어저께 더 낫다” 항상 이런 패턴이다. 물론 20년 넘게 같이 살고 있는 우리는 아버지께서 반어법을 주로 사용하신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기에 이제 큰 상처는 받지 않는다. 그래도 가끔은 어머니께서 “말 좀 예쁘게 하면 안돼?”하며 반박하신다.


난 아버지를 보며 ‘난 절대로 여자 친구가 생기면 아버지처럼 무뚝뚝하게 하지 말아야지’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여자 친구에게는 반드시 애교 넘치는 언변으로 여자 친구를 기쁘게 해줄 것이라 굳건히 다짐했다.

마침 여자 친구가 생겼고, 시간이 조금씩 흐르자, 나의 감춰졌던 무뚝뚝한 본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역시 환경이란 건 무섭다. 내가 자라며 본 것이 ‘어머니에게 무뚝뚝한 아버지의 모습’이었기에 난 무의식중에 그대로 아버지처럼 여자 친구를 대하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여자 친구에게서, 어머니가 아버지께 하던 소리를 똑같이 듣고 말았다.

“오빠! 말 좀 예쁘게 하면 안돼?"

부모님과 함께 본 <타짜>, '김혜수의 전라 노출?'

5년만에 우리 가족이 극장에 갔다. 함께 본 영화는 <타짜>.
5년만에 우리 가족이 극장에 갔다. 함께 본 영화는 <타짜>.싸이더스 FNH
지난 10일, 아버지께서 갑자기 극장으로 가족 나들이를 가자고 제안하셨다. 우리 가족이 영화를 본 것은 2001년 < 공동경비구역 JSA >가 마지막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꽃놀이(화투)에 관심이 많으신 아버지께서 영화를 개봉 전부터 무척 보고 싶어 하셨다고 한다.

마침 아르바이트비도 받았고 해서 내가 영화를 보여드린다고 하고 부모님을 모시고 극장으로 갔다. 극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얼마 전 읽었던 신문기사가 불현듯 떠올랐다.

‘김혜수 파격 전라 노출’ 아무리 내가 성인이지만 그래도 노출 수위가 심한 것은 부모님과 함께 보기 민망하다. 즉각 대비를 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 <타짜>를 봤다고 자랑하던 후배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타짜> 부모님과 함께 보는데 어때? 노출 수위?’

둘에게 보냈는데 의견이 분분했다. ‘십분 정도 민망한 장면만 빼고는 괜찮을 듯’ 과 ‘오빠 안돼!’ 라는 두 가지 의견. 잠깐 고민을 하다가 결국 보기로 했다. 시간대도 맞는 게 없을 뿐더러 멀티플렉스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타짜> 이외의 다른 영화는 드물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아들의 생각, ‘<타짜>의 노출 장면이 나올 때, 어떻게 담담하게 대처해야 하는가, 또한 시선처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생각뿐이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아버지의 생각, “난 '고스톱(GoStop)'인 줄 알았는데, '섰다'네. 에이 '섰다'는 모르는데. 김 샜다”라고 영화를 보는 동안 나에게 슬쩍 언질를 해주셨다.

영화를 보는 동안 어머니의 생각, “어머!” “어쩜!” 하시며 손으로 눈을 가리기 일쑤였다. 손 자르고 도끼로 손 찍는 거 정도는 요즘 나오는 잔혹한 영화들에 비하면 소프트한 수준이지만, 그래도 드라마만 주로 보시는 어머니에게 이 정도의 잔인함은 보시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

드디어 우려해 마다않던 노출신이 나왔지만, 김혜수의 뒷모습만 잠깐 나오는 등 생각보다 약했고 빠른 시간에 끝났기에 별다른 마찰(?)과 민망한 상황은 연출되지 않았다. 하지만 본격적인 마찰은 영화가 끝나면서부터 시작 되었다.

우려했던 김혜수의 노출신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아버지의 말에서 비롯되었다.
우려했던 김혜수의 노출신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아버지의 말에서 비롯되었다.싸이더스 FNH

말 한마디로 한 냥 빚도 못 갚을 아버지의 망언,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영화의 소감을 물으셨다.

“당신 영화 재밌었어?”
“…”
“영화 재밌었냐고!”
“이게 요즘 제일 인기 있는 영화다.”
“아니 영화가 재밌었냐고!”
“제일 인기 있는 영화라카이.”


아버지께서 갑자기 특유의 경상도 억양을 섞어 말씀하셨다. 억양이 들어가니 왠지 화난 목소리였다.

“재밌었냐고 물어보는데 왜 화를 내고 그래.”

어머니께서는 단단히 삐지셨다. 5년만의 ‘우리 가족 극장 나들이’는 <타짜>가 요즘 제일 있기 있는 영화라서 그렇게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집에 가는 길에 아버지께서는 사무실에 잠깐 볼일이 있다고 하시고, 어머니께서는 스트레스 받아 찜질방에라도 간다고 하셨다. 쓸쓸이 홀로 집에 들어왔는데, 어디선가 문자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어머니의 핸드폰에서 나는 소리였다. 영화 보신다고 핸드폰을 두고 가셨나 보다. 문자 확인을 안 하면 계속 울리게 되어 있는지 문자 소리는 계속 울려댔다. 결국 내가 문자 확인을 하였고, 그 문자를 보는 순간 난 정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함께 영화를 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소. 영화를 보는 내내 당신만 보느라 영화를 잘 못 봤소. 앞으로 자주 봅시다.’

어머니께 보낸 아버지의 문자. 멋진 반전이었다.
어머니께 보낸 아버지의 문자. 멋진 반전이었다.김귀현
발신인은 아버지로 되어 있었다. 순간 나는 20여년 간의 아버지의 무뚝뚝한 일련의 행동이 모두 진실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에서 용의자로 지목되었던 장애인이 혐의를 벗고 마지막 장면에서 똑바로 걸어 나오는 것과 같은 충격의 반전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어머니 옆에 앉아 마음이 설레셨을 아버지를 생각하면 내 마음마저 훈훈해졌다. 어머니와 함께 얼마나 영화를 보고 싶으셨을까? 그리고 그 마음을 아버지라는 체면 때문에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것이 얼마나 안타까우셨을까?

오래 전에 들은 얘기라 어렴풋이 생각나지만,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반한 건 바로 ‘연애편지’ 때문이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군대시절 펜팔을 했던 것이 인연이 되어 결혼까지 하셨다고 한다. 무뚝뚝한 아버지께 이젠 그 기술을 전수받을 생각이다.

영화도 참 재미있지만, 바로 인생이 영화다. 5년만에 가족과 함께 영화를 본 날 뜻밖에 아버지의 새로운 면을 볼 수 있었다. 앞으로 한 달에 한 번은 꼭 가족과 함께 영화를 봐야겠다. 물론 영화가 끝나면 눈치 있게 빠져주는 건 센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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