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인문학' 생활에서 살린다

학문의 위기 대중 속에서 풀어야

등록 2006.10.16 14:42수정 2006.10.16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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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신문
[박윤수 기자] 대학가를 중심으로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그러나 인문학 계열 지원자가 줄어든다 거나 졸업생들의 취업률이 낮다는 등의 수치들만이 인문학의 위기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인문학’에 거부감을 느끼고 멀리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바꾸고 실천적 학문으로 거듭나는 일이다. 전문가들은 인문학을 어려운 학문으로 여기지 말고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길을 가르쳐 주는 생활의 지혜로서 가까이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철학아카데미’의 이정우 원장은 “인문학이란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주는 학문이므로 위기란 있을 수 없다”면서 “올 여름 철학아카데미에 사상 최대 인원이 등록한 것을 보더라도 인문학을 배우려는 사람은 많이 있다”고 역설했다. 그는 또한 “인문학자들이 전통적인 내용에 집착하지 말고 현실 문제에 대해 활발히 논의하며 대중에게 길을 제시하는 등 새로운 담론들을 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문학 부흥운동을 주도한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인문학이 길러주는 ‘공감’의 능력이 바로 글로벌 시대에 타인에 대한 관용과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를 키워주는 힘”이라며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각종 부정이 터지면서 MBA 출신들을 더 이상 우대하지 않게 된 미국 기업들이나 9·11 테러 이튿날 밤 예일대의 유대계 미국인 학생들과 무슬림 외국인 유학생들이 함께 철야기도를 했던 사건 등은 사람들이 인문학을 배워야 하는 이유를 일깨워준다는 것이다.

# 2006년 10월 1일 오후 5시, 서강대 강의실

“바타유는 에로티즘을 금기의 위반이며 인간적인 행위라고 얘기하고 있어요. 동물적 성행위와는 다른 내적 체험이라는 것이죠.”(21세 여성, 학생)
“그런데 그의 주장에는 여성의 관점에서 볼 때 마음에 걸리는 구절들이 있어요. ‘여자는 남자의 욕망을 건드려 욕망의 표적이 되려 한다’라고?”(33세 여성, 프리랜서)
“그건 여성 비하적 발언이라기보다 당시의 시대상과 연결시켜 인류학적 관점에서 봐야 할 문제가 아닐까요?”(33세 남성, 학원 강사)

철학 전공자들의 토론 풍경이 아니다. 프랑스 철학자 조르주 바타유의 저서 ‘에로티즘’에 대한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는 주인공은 철학공부 모임 ‘장미와 주판’의 회원들. 전국적으로 100여 명의 회원이 활동 중이라는 ‘장미와 주판’은 지역별로 철학강독과 토론 모임을 열고 3∼4일 동안 마라톤 토론을 벌이는 ‘독서여행’ 등을 통해 철학을 깊게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대학들이 인문학의 위기를 외치고 있는 한편 대학 밖에서는 인문학을 배우고 싶어하는 일반인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현재 대안적인 인문학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단체·기관은 10여 개. 본격적인 교육기관에서부터 카페를 거점으로 한 자유로운 소모임까지 다양하다.


대안 배움터의 효시로 여겨지는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문예아카데미’는 92년 문을 연 이래 2만여 명의 수강생을 배출했으며, 2000년 8개 과목 60여 명의 수강생으로 시작한 ‘철학아카데미’도 현재 30여 개 과목에 400∼500여 명이 몰릴 만큼 규모가 커졌다. 왜 이들은 자격증이 나오거나 기술을 배우는 것도 아닌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일까.

학원 강사로 일하면서 2004년부터 ‘장미와 주판’의 철학공부 모임에 참여해 온 정지영(33)씨는 “인문학 공부는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는가’라는 삶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 준다”고 말했다. 국문학과 4학년생인 이창규(25)씨는 “대학에서 제공하는 천편일률적인 수업들로는 충족되지 않는 욕구가 있었다”면서 “밀도 높은 인문학 강의를 원하는 학생들이 의외로 많다”고 얘기했다.


‘풀로 엮은 집’ 설립 초기부터 2년간 서양미술사, 현대미학, 한국철학, 교육론 등 다양한 분야를 섭렵했다는 강문식(37·청원고 사회과 교사)씨가 느끼는 효과는 좀 더 현실적이다. 그는 “해가 갈수록 가치관의 차이가 벌어지는 학생들과 소통의 어려움을 겪던 차에 인문학 공부를 한 뒤 다양한 관점을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면서 “이제는 학생들의 눈높이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다”고 고백했다.

‘풀로 엮은 집’의 정윤수 사무국장은 “학점과 리포트를 위한 백화점 식 강의가 아닌 밀도 높은 인문학 강의를 원하는 대중의 수요가 꾸준히 있더라”면서 “교수들이 학생들의 존재론적인 문제를 의미 있는 의제로 설정하고 같이 의논하는 자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클레멘트 코스 ‘성 프란시스 대학’

한국에도 노숙자를 위한 인문학 과정이 있다. 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가 2005년에 개설한 ‘성 프란시스 대학’이 ‘한국형 클레멘트 코스’의 최초 사례.

노숙자들에게 철학과 문학, 작문 등을 가르치는 성 프란시스 대학은 2005년 9월부터 2006년 4월까지 1기 과정을 운영했다. 20명의 입학생 중 16명이 수료했고 그 중 3명이 취업에 성공했다.

총 2학기로 운영된 수업 중 절반이 지나자 변화가 나타났다. 수강생 전원이 쪽방이나 고시원, 월세방, 센터에 들어가면서 거리 생활에서 벗어났으며 무료 급식소에 다니기보다 스스로 식사를 해결하기 시작했다. 한글 맞춤법도 제대로 모르던 사람들이 원고지에 비교적 정리된 문법으로 정리된 글로 작문 과제를 제출하는 능력도 갖게 됐다.

"이 과정을 마친 후 이제 난 세상에 가까이 갈 수 있는 희망을 찾았다"는 한 수강생의 소감처럼 대부분의 수강생들이 자신이 소중하다는 느낌을 갖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된 것은 무엇보다 큰 성과다.

노숙인을 구하는 것은 빵이 아닌 책
극빈자 대상 인문학 무료 과정 ‘클레멘트 코스’

95년 노숙자, 약물중독자 등 극빈층 남녀 31명이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로베르토 클레멘트 가정상담센터’에 모였다. ‘클레멘트 코스’가 제공하는 인문학 과정을 수강한 이들 중 17명이 1년 과정을 마치고 수료증을 받았다. 그들 중 2명은 치과의사가, 1명은 간호사가 됐고 영문학이나 철학 박사과정을 공부 중인 사람도 있으며 패션기술학교에 진학해 새로운 꿈을 키우기도 했다. 특별한 기술을 가르친 것이 아니었지만 나머지 사람들도 대부분 일자리를 얻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인문학은 과연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노숙자들에게 빵 대신 책을 줬던 ‘클레멘트 코스’는 그 해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작가이자 교육실천가인 얼 쇼리스는 자신이 공부하던 시카고 대학 주변의 극빈층을 보면서 가난에 대한 책을 쓰기로 결심하고 미국 전역에 퍼져 있는 가난한 사람들 800가정을 직접 방문해 면담을 했다.

이 여행을 통해 가난이 단지 경제적인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며 그들이 서로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무력’(force)의 장벽 안에 갇혀 있음을 깨닫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철학과 문학, 역사, 예술, 윤리학, 논리학과 같은 인문학 강좌를 무료로 실시하는 클레멘트 코스를 시작했다.

수업은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이 아닌 소크라테스 식 ‘문답법’으로 진행됐다. 각자 과제물을 읽어온 학생들이 교수와 함께 둥근 탁자에 둘러앉아 자신이 이해한 바를 이야기하는 방식이었다. 교수의 역할은 학생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스스로 깨닫도록 하고 질문을 통해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이었다. 사회 밑바닥에서 갖은 경험을 한 사람들은 평범한 삶을 살아온 일반 학생들보다 뛰어난 이해력을 보여줬다.

처음 시작할 때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니다. 빈민들에게 대학 수준의 인문학을 가르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라며 얼 쇼리스를 비웃었지만 11년이 흐른 지금 클레멘트 코스는 미국을 벗어나 호주, 캐나다 등으로 확대돼 현재 3개 대륙, 5개 나라에서 53개 코스가 진행 중이다. 올해 말이면 4000명이 넘는 학생이 클레멘트 코스를 졸업하게 된다.

클레멘트 코스는 서구 문명만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멕시코 마야족을 대상으로 할 때는 스페인어와 마야어로, 알래스카에선 원주민 언어로 수업을 하고 부족의 고대 문화를 과정에 포함시킴으로써 그들이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왔다.

지난 1월 국내를 방문하기도 했던 얼 쇼리스는 "인문학은 틀에 박힌 사고에 갇힌 사람들을 해방시킨다"면서 "인문학을 배움으로써 자기 자신을 존중하게 되고 사물을 새롭게 바라보는 법과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법, 시를 음미하는 법, 교향곡을 즐기는 법을 배울 수 있다"고 밝혔다.

사회적 일자리나 빈민을 위한 소액대출, 노숙자를 위한 무료 급식소 등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제도는 많다. 그러나 그런 제도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일어설 의지를 키워주는 것이라고 클레멘트 코스는 입증한다. 얼 쇼리스는 "인문학이야말로 가난한 사람들을 근본적으로 개선시키고 진정한 시민으로 탈바꿈시키는 도구"라고 강조한다.

기업, 인문학 인재에 목마르다
채용 때 전공 구분 안 해…창의력·인성 중시

‘인문계 졸업생은 취업하기가 어렵다?’ 요즘 기업들의 채용 트렌드를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채용 시 실용적 학문과 인문학 전공자를 차별하지 않는 기업이 늘고 있다.

IT업계의 선두주자인 LG-CNS가 대표적인 경우. LG-CNS는 특별히 문·이과 구분을 두지 않는 ‘열린 채용’을 실시하고 있다. 이공계, 상경계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취업률이 낮은 인문·사회분야 전공자에게도 똑같은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전공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조직은 더 큰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 최근 한국산업기술진흥회가 국내 302개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58.6%의 기업이 문과적 소양과 이과적 기술을 동시에 갖춘 인재를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들이 원하는 인재상도 변화하고 있다. 일에 대한 전문성 못지 않게 창의력, 인성, 커뮤니케이션 능력 등 인문적 소양을 갖추는 것이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취업포털 커리어다음(www.careerdaum.com) 신길자 홍보팀장은 "지원자들의 어학, 학점 등은 이미 상향 평준화되어 있는 상태다. 대신 요즘에는 창의성과 인성을 많이 본다"면서 "삼성이 실시하는 프레젠테이션 면접, 토론면접과 봉사활동에 대해 면접 시 가산점을 부여하는 기업이 늘고 있는 것이 그런 예"라고 말했다.

정혜련 숙명여대 취업경력개발팀 부장은 "학점, 토익, 인턴경험 등 아무리 스펙이 좋아도 조직 적응력, 인화력 등 인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기업들이 반기지 않는다"면서 "인성교육을 위해 전 학생이 봉사학점을 필수 이수토록 했다. 또 현재 학교에서 실시하는 멘토링 프로그램을 적극 권하고 싶다. 취업 스킬뿐만 아니라 능력과 인품을 갖춘 멘토로부터 삶을 대하는 자세나 태도 등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읽는 것이 얻는 것 ‘책’에서 답 찾아라
인문학적 소양 어떻게 키우나…

‘고전’... 인류 최고의 지성 만나는 가장 쉬운 방법

대중인문서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그린비)의 저자이자 고전평론가로 잘 알려진 고미숙씨는 "청소년들에게 ‘책읽기’가 진부하다는 오해를 받고 있어 답답하다"고 토로한다. 그는 "지식 습득의 핵심인 독서야말로 평생의 자산이 되기 때문에 ‘책’을 대신할 만한 것은 없다"고 딱 잘라 말한다.

고전평론가인 그에게서 듣는 당연한 얘기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는 수많은 인문서적 중에서도 사고의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고전’이 제격이라고 강조한다. 인류 최고의 지성들이 만들어낸 ‘고전’이야말로 시대마다 서로 다른 의미를 만들어내는 전위적 텍스트이고, 그런 점에서 진정한 ‘미래적인 것’이라고.

그는 고전을 만날 준비가 됐다면 ‘고전은 어렵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라고 주문한다. 또 ‘대학’이나 ‘열하일기’ 같은 고전을 재밌게 읽기 위해선 여러 사람과 함께 ‘암송’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조언한다.

암기와 달리 암송은 두뇌가 아닌 몸으로 익히는 방법이기 때문에, 운율에 맞춰 큰 소리로 읽으면 읽을수록 고전의 참 맛을 체득할 수 있다. 한 단계 더 나아가 고전 텍스트에 대한 감상을 정확한 어법과 목소리로 전달해보자. 이러한 ‘구술’은 타인과의 소통과 글쓰기에도 큰 효과가 있다.

고전에 재미를 붙였다면 다른 종류의 책으로 관심의 폭을 넓히는 것도 좋을 듯. 처세술, 재테크, 자기계발 등 실용서보다는 인문학적 감수성을 키울 수 있는 문학·예술·역사·철학 등의 분야에 도전해 보자.

세상을 보는 눈...‘독서토론’으로 키울 것

"같은 책을 읽은 친구들과 진지한 토론을 나눠봤으면 해요. 내 생각도 정리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는 것에 저 스스로도 놀랐어요."

지난 8월 창간한 청소년 인문교양지 ‘인디고잉’(인디고서원)의 학생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부산 대연고등학교 2학년인 이인재군. 빡빡한 학업 시간을 쪼개서라도 학생기자로 참여하는 것이 즐겁단다.

이 군은 청소년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야말로 ‘책’과 ‘토론’을 통해서라고 당차게 말한다. 학교공부 시간을 빼앗길까봐 걱정했던 부모님도 이제는 든든한 지원군. 사회 이슈 전반에 대해 막힘 없이 술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모습을 보면서 독서토론 활동을 격려해 주신다고.

‘인디고잉’의 천소희 편집장도 "실제로 독서 토론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울 수 있다"고 강조한다.
전문가들은 토론에 대한 연습이 충분치 않다고 해도 쉬운 책부터 읽은 후 생각을 정리해나가면 나도 모르게 의견을 발표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설명한다. 글로 생각을 표현해보는 것도 좋다. 단시간에 승부를 보려하지 말고 처음부터 욕심 내지 않고 꾸준하게 노력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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