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여, 점점 더 깊어져라

[서평] 조재학 시집 <굴참나무의 사랑 이야기>

등록 2006.10.16 16:02수정 2006.10.16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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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조재학 시집 - [굴참나무의 사랑 이야기](도서출판마을)

조재학 시집 - [굴참나무의 사랑 이야기](도서출판마을) ⓒ 마을

지난 8월 경북의 소도시인 상주에서는 아주 의미 있는 문학 행사가 열렸다. 상주시에서 후원하고 상주문협에서 주최한 제5회 낙강시제(洛江詩祭)가 바로 그것이다. 낙강시제는 경천대와 도남서원 등 상주의 낙동강 주변 아름다운 자연 경관 속에서 시인 묵객들이 서로 시향(詩香)을 나누며 즐긴 문학 잔치다. 이 낙강시제는 1196년(고려 명종26년) 백운 이규보로부터 1862년(조선 철종 13년) 계당 류주목에 이르기까지 666년간 51회에 걸쳐 이루어진 전통 있는 시회(詩會)이다.

선배 시인들의 뜻을 이어받아 상주문협(회장 정복태)에서 이 문학 잔치 마당을 새롭게 벌인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다. 경상도라는 지명(地名)이 경주(慶州)와 상주(尙州)에서 비롯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상주는 경주와 함께 문화적 전통이 뿌리 깊은 도시이다. 이 낙강시제 행사장에서 나는 한 여성 시인을 만났다. 상주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시를 쓰고 있다는 상주문협 소속 조재학 시인이 바로 그다.


그는 낙강시제 때 박찬선 시인(국제펜클럽경북회장)의 연작시 '낙동강10'을 맑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낭송하면서 낙강시제의 첫 문(門)을 멋지게 열어 보였다. 낙강시제가 끝난 지 한 달이 좀 지난 어느 날, 조재학 시인이 그의 첫 시집 <굴참나무의 사랑 이야기>(도서출판 마을)를 보내왔다.

문단에서 처음 인사를 나눈 후 그 시인으로부터 시집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렇게 인사를 처음 나눈 시인이 애써 보내준 시집을 읽는 재미는 각별하다. 그가 어떤 마음의 무늬를 가슴에 내장하고 있는지, 첫인상이나 느낌과 어느 만큼 같고 다른 지를 생각하며 시집을 읽을 수 있어서이다.

조재학 시인의 첫 시집 <굴참나무의 사랑 이야기>는 내가 받은 그의 첫인상과 꼭 그대로 합치가 되고 있다. 낙동강이 흐르면서 부려놓은 상주들판의 “이 커다란 생명의 잔치” 마당과 굴참나무 숲에서 번져오는 맑은 사랑 이야기, “남몰래 피고 지는 들꽃”들을 호명(呼名)하면서 일궈내는 그리움이 시집 <굴참나무의 사랑 이야기>에 담겨져 있는 내용물이다.

이름을 안다는 것이 그런 것인지
안다는 것은 참 신비한 일입니다
마른 낙엽 사이로 샐쪽샐쪽
웃고 있는 보랏빛 현호색에
산길은 더 환해지고 밝아집니다
앵초, 복수초, 양지꽃, 노루귀
불러주면 꽃들도 몸을 흔듭니다

겨울의 흔적이 남아 있는 산길이
이렇게 정답기는 처음입니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빛깔을 안다는 것이고
그 생명을 안다는 것이고
그리고 그리움을 안다는 것일 겁니다
('안다는 것은' 부분)



조재학 시인은 '내 무안함'이라는 시편에서, 이름을 몰라 너무 예뻐 맘대로 지어 불러보다 곁에 있던 제비꽃과 조팝꽃이 킥킥거리고 황소마저도 고개를 돌린다고 생각한 나머지 무안해져 노을 뒤로 달려가 숨고 싶었다고 쓰고 있다. 그렇다. 상대의 이름을 안다는 것,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상대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는,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김춘수 시인의 '꽃'과 생택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보듯 이 관계 맺음이 바로 사랑인 것이다. 조재학 시인도 “이름을 안다는 것은/ 빛깔을 안다는 것이고/ 그 생명을 안다는 것이고/ 그리고 그리움을 안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시인의 역할이 바로 세상 사람들과 사물들에게 합당한 이름을 불러주는 일이 아닌가 싶다. 조재학 시인에게 시작(詩作) 행위는 바로 “믿음의 촛불을 켜” “어둠의 빈 자리 밝혀가”는 일인 것이다.


a 시인 조재학

시인 조재학 ⓒ 이종암

표제 시 <굴참나무의 사랑 이야기>는 16편의 연작시이다. 굴참나무는 상주대학교에서 임학을 가르치고 있는 부군 이동섭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라고 한다. 조재학 시인은 이 16편의 연작시를 통해 우리 사회에 굴참나무가 ‘참나무’인 것처럼 ‘참사랑’이 자리하기를 “기도처럼 간절하게 그렇게 간절하게”(「말」) 노래하고 있다.

그의 <굴참나무의 사랑 이야기>는 현실에 근거가 없는 허공 속의 허황된 사랑타령이 아니다. 그 사랑 속에는 마디 굵어지신 어머니의 손과 그 손길아래서 곱게 커오는 세 아이들 그리고 20년 세월을 함께 지내온 지아비가 자리를 잡고 있다. “바늘 하나 꽂을 여유/ 없는 세상에/ 사는 얘기 풀어놓고/ 손잡고 강 건널 사람”과의 사랑 이야기이다. 이러한 <굴참나무의 사랑 이야기>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더 많이 쏟아져 나와야 한다.

그리고 조재학의 어투를 빌면 “시인이란 꼭” “사랑하지 못해 절망하며/ 사랑하지 못해 가슴에 등불 하나 품고/ 쿵쿵 땅을 울리며 밤마다/ 하늘을 달려가는 철길”('사랑하지 못해서')을 가는 사람이다. 그 길은 달리 말하면 “본래 그대로”의 “하늘길”('도산문')이다. 그 길에 이르기는 쉽지 않으리라. 시인은 불완전한 언어를 붙들고 길 위에서 절망하고 또 절망하리라.

말을 피운 꽃은 아름답다
꽃을 피운 말은 더 곱다
별이 빛나는 밤에는 말이
별빛을 타고 내려와
박꽃이 된다
박꽃 피는 밤에는 귀뚜리도
능소화 꽃잎을 먹어
꽃잎에 취하고
어둠에 취하여
밤새도록 붉은 피 토하고
별빛 박힌 말은 꽃이 된다

하얀 그리움이 된다.
('꽃' 전문)


인용한 시 '꽃'은 조재학 시인의 시론(詩論)을 대변하는 시가 아닌가 싶다. ‘말을 피운 꽃’과 ‘꽃을 피운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나는 그것을 완성된 작품으로 읽는다. 그걸 위해서 시인은 “꽃잎에 취하고/ 어둠에 취하여/ 밤새도록 붉은 피 토하”는 지난(至難)한 “쓰린 상처”의 길을 가야만 한다.

그 길을 다 걸어간 후에야 참된 ‘꽃’과 ‘말’이 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조재학 시인에게는 “삶의 배경 되신 하느님”이 계셔서 많은 도움을 얻을 터이지만 쓰고 또 쓰는, 걸어가고 또 걸어가는 일은 천형(天刑)을 타고난 시인의 운명이다. 그러니까 시인에게 시집(詩集)이라는 것은 “쓰린 상처”의 길을 걸어가는 고투(苦鬪)의 흔적이다.

조만간 조재학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 나온다고 하니 그 고투(苦鬪)의 흔적은 또 어떻게 펼쳐져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시인이 두 번째 징검돌 위로 어떻게 건너 간 것인지 확인하는 일이 기다려진다. 가을이 점점 깊어져간다. 조재학을 비롯한 이 땅의 서정 시인들은 오래, 많이 힘들어할 것 같다. 그 힘듦과 외로움 속에서 시는 탄생되고 우리 독자들은 그걸 읽으며 삶의 위안을 얻을 지니 가을이여, 점점 더 깊어져라.

덧붙이는 글 | 경북매일신문 '이종암의 책 이야기'에도 송고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경북매일신문 '이종암의 책 이야기'에도 송고했습니다.

굴참나무의 사랑 이야기

조재학 지음,
마을,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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