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령도 지휘관 잘못 만나면 지옥 같은데...

[내 젊음을 바친 군대 17] 즐거움과 괴로움이 교차한 2군사령부 시절

등록 2006.10.19 18:16수정 2006.10.19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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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군사령부에서 정훈 참모로 근무하는 동안 군사령관이 네 사람이나 바뀌었다. 처음 부임했을 때 있던 A 사령관은 간부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영관 장교 이상의 고급간부들은 매일 점심시간이 끝나면 10분 교육을 받게 했다.


사령관도 끝까지 강의를 듣고 있으니 다른 간부들은 꼼짝할 수 없어 교육 참여율이 아주 높았다.

그전까지는 동기생 황원탁 대령(후에 소장 진급, '국민의 정부' 때 주독일대사와 청와대 안보특보 역임)이 영어회화 교육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전입해 온 후 그 교육은 10분 정신교육으로 바뀌었고 강의를 내가 맡게 됐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a <간부의 도> 표지.

<간부의 도> 표지.

처음 강의를 시작했을 때는 참 많이 긴장했다. 강의할 땐 점심을 어떻게 먹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허둥댔고, 강의가 끝나면 분필 가루가 노상 옷에 묻어 있었다. 하도 부담스러워서 입 안이 다 헐 정도였다.


그런데도 주위 사람들은 남의 속도 모르고 "정훈 참모니까 당연히 잘 하는 것 아니냐"고들 했다. 그러나 난 매일 밤낮 남모르게 노력했고, 실수 없이 잘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소화불량증에 걸릴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대개 일주일 분 강의할 제목을 정한 다음, 각 강의의 핵심 내용이 생각날 때마다 기록해뒀다. 그러고 나서 강의 시작 이틀 전까지 내용을 확정한 뒤 반복해서 연습했다. 출근길에 사무실까지 걸어가면서 난 늘 중얼거렸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드릴 말씀의 제목은 000입니다."


이렇게 중얼중얼 연습하고 나면 한결 자신감이 생겼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가장 인상적인 강의는 '적자존(適者存)'이라는 제목으로 한 강의다. 당시 육군본부에 가 보면, 강당의 넓은 회색 외벽 높은 곳에 '强者存'(강자존)이라는 한문 구호가 쓰여 있었다. 너무 크게 써 놔서 균형에 어긋나 보이던 그 구호를 만든 건 당시 군을 장악하고 있던 신군부 인사였다.

그 구호가 참으로 못마땅했지만 정면으로 반박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난 그들이 말하는 것과 반대되는 내용으로 10분 정신교육을 해서 마음속의 불쾌함을 해소하고자 했다. 그들의 주장에 맞서기 위해 아예 제목까지 같은 세 글자인 '적자존'으로 정했다.

"세상에는 물리적인 힘이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 정글의 법칙도 마찬가지다. 맹수들은 배가 고프지 않으면 약한 짐승을 함부로 잡아먹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먹이사슬에 불균형이 발생하고 생태계의 생존 질서가 파괴되기 때문이다.

진정한 힘은 자연과 환경, 다른 개체와 조화를 이루고 적응하는 능력에서 나온다. 동물세계의 질서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의 사회생활에도 적용된다. 진정으로 강한 힘은 지배력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끌고 사로잡을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기에 이타적인 사랑의 힘이 가장 강한 힘이라 하지 않는가? 힘센 자만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적자생존의 우격다짐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는 논리 아닌가.

하나의 강자가 만들어지기까지 이름 모를 약자들의 수많은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겸허함이 있어야 한다. 강한 강철은 부러지기 쉽다. 물리적인 폭력은 언젠가 반드시 그보다 강한 힘에 의해 망한다. 이는 역사의 법칙이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사무실에 돌아오니 군 사령관께서 날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자주 있는 일이라 별 부담 없이 사령관실로 올라갔다. A사령관께서는 찬바람이 감돌 정도로 엄격해 사람들이 꺼려하기도 했는데, 강의 시간엔 과묵하게 주로 듣기만 했다.

사령관께서는 내 주장을 신선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전에도 강의가 끝난 뒤 날 불러 격려해줬던 사령관께서는 이날은 평소보다 더 기분 좋은 표정으로 칭찬해주셨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던가. 사령관의 거듭되는 칭찬에 난 날마다 즐거운 마음으로 자신 있게 강의했다. 그 후 강의내용을 모아 <간부의 도(幹部의 道)>라는 소책자를 만들어 2군사령부에 속한 모든 영관급 간부들에게 읽게 했다.

대령도 도망가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럼 병사들은?

그러나 세 번째로 맞은 군사령관은 작심한 듯 드러내놓고 나를 미워했다. 이 분은 내가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겁 없이 발언했다가 3군단으로 쫓겨날 때 인사운영감을 했던 분이다.

이 분은 나를 '가까이 하면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는 요주의 인물'이라고 보신 건지, 도무지 내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무조건 나를 싫어했다. 참모회의 때마다 아무 이유 없이 "정훈 참모! 일 똑바로 해! 형편없는 놈! 나한테는 안 통해!"라며 날 모욕했다. 사령관이 구체적으로 잘못을 지적하는 것도 아니고 막연하게 인격적으로 모욕하니, 난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대령 계급을 달고 있는 참모에게 업무에 관해 질책하는 게 아니라 인신공격을 퍼붓는 것은 아마 이 지구상의 어떤 군대에도 있을 수 없는, 지극히 비정상적인 모습일 것이다.

군사령관의 태도는 다른 사람 눈에도 정상으로 비치지 않았던 것 같다. 내 처지가 딱해보였던지 한 번은 참모장이던 K 소장이 날 불러서 위로했다.

"정훈 참모! 새로 오신 사령관님이 왜 저러시는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오! 아마 정훈감을 다른 사람에게 시키고 싶어 저러시는 것 같은데, 너무 기죽지 마시오! 나쁜 때가 있으면 또 좋은 때가 있는 법이오!"

사실 당시 난 정훈감이 되는 문제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대령 계급장 달고 국방부에서 근무하다가, 중령이 근무하던 3군단 참모 자리로 쫓겨날 때 이미 장군 진급이 되지 않도록 사실상 결정됐다고 보던 내게 무슨 미련이 있었겠는가? 군을 개혁해야 한다는 일념뿐이던 내가 그런 사령관의 참모 노릇을 하며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는 게 너무나 분하고 지겨웠다.

고급 간부이던 내 처지가 이럴진대, 그렇지 않아도 숨 막히는 분위기에서 병영 생활을 해야 하는 병사들이 상관마저 잘못 만나면 그야말로 죽지 못해 견디는 지옥살이를 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간부들은 퇴근이라도 할 수 있지만 병사들은 그렇지 않다. 이 또한 군을 민주적으로 개혁하는 일이 시급한 이유 중 하나다.

사령관한테 이유 없이 미움받아 욕만 먹으니 부대 내에 머물러 있기가 죽기보다 싫어졌다. 매일 오후5시에 일과시간 종료를 알리는 나팔이 울리면, 난 지긋지긋한 부대를 무작정 떠나고 싶었다.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서울로 외출 나왔다가 일요일에 다시 대구로 내려가는 생활을 계속했다.

괴롭히는 사령관을 피해 신학교를 찾다

a 대구신학교를 졸업하며.

대구신학교를 졸업하며.

한 번은 고속버스 옆 자리에 앉아 있던 분이 중국어 성경을 들추고 있었다. '중국어를 그렇게 잘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분은 '한문이니까 그냥 어림짐작으로 보고 있다'고 했다.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쳐갔다. "나는 큰 어려움 없이 중국어를 말하고 읽을 수 있지 않나. 아하! 바로 이거로구나! 나를 중국선교사로 보내 쓰시려고 귀양살이 같은 고난을 주셨구나!"

그날 저녁 대구 만촌동 관사에 도착하자마자 대구에 있는 화교 교회에 전화를 걸었다.

우선 중국 교회에 나가 교회에서 사용하는 중국어를 익히고 중국어 성경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전화를 받은 사람에게, 중국어를 어지간히 아는 사람인데 중국 선교를 위해 중국교회에 다닐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분은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신학을 공부해 목회자 자격을 구비해야 하는데, 그 첫 단계로 신학대학을 졸업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자기도 대구 신학교에 다니는 화교인데, 4년제 대학 학력이 인정되는 야간부도 있다고 안내해줬다.

다음날 일과가 끝나기가 무섭게 대구신학교로 달려갔다. 교무과장과 교장님께서 쾌히 승낙해 주셨다. 그 다음날 소정의 절차를 마친 난 졸지에,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신학생이 되었다.

신학교 공부는 대부분 성경을 진리로 삼으며 목회자 자격을 갖추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도 공부했다. 성경이 쓰인 2천여년 전과 비교해, 사회상이나 문화가 워낙 많이 변했기 때문에 성경을 쓴 사람의 본래 의도를 그대로 살려 번역하기 위해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공부했다. 그러나 이 두 언어는 아무리 공부해도 따라가기 어려웠다. 그래도 이 언어들을 공부한 건 당시 사회상을 이해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나는 왜 예수를 믿는가,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를 잘 설명해 주는 교회론과 성령론 같은 조직신학 과목이 제일 재미있었다. 교회 다닌 지 얼마 되지 않던 내겐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졌다.

야간부에서 함께 공부한 급우들은 대부분 직장이 있는 분들이었고 나이 차이도 많이 났다. 그 분들은 대부분 성경 구절을 잘 암송하고 기도를 막힘없이 줄줄 쏟아냈으며, 교회 법도에 대해 통달해 목회자로서 부족함이 없을 것 같았다. 현역 대령인데다 중국 선교를 목적으로 공부한다는 밝혀서인지, 교수님들은 내게 각별하게 관심을 보이며 잘 대해주셨다.

신학교 과정이 다 끝나고 졸업식만 남았던 1984년 크리스마스 전날, 88고속도로에서 대형 교통사고를 당해 온 가족이 몰살당할 뻔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 7월 4일, 누구에게 물어도 '절대 불가능할 것'이라고 답하던 장군 진급이 현실이 됐다.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인생길이 바뀌고 5년이라는 긴 귀양살이를 한 난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나 세상에 나오니 5공 독재가 완전히 뿌리를 내린 상태였다.

생각하면 부임한 후부터 계속 날 그토록 미워하던 세 번째 군사령관의 충격이 없었다면, 난 신학을 공부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의 인연이란 게 당시엔 괴롭고 쓰라린 악연이었더라도, 지나고 보면 모두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리라.

그래서 그 세 번째 사령관을 용서하려 노력했지만, 내 속이 너무 좁아서인지 그분에 대해서만큼은 좀처럼 그렇게 되지 않는다, 두 번 다시 생각하기조차 싫은 걸 어찌하랴!

a 대구신학교 졸업식 사진.

대구신학교 졸업식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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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군을 부하인권존중의 ‘민주군대’, 평화통일을 뒷받침 하는 ‘통일군대’로 개혁할 할 것을 평생 주장하며 그 구체적 대안들을 제시해왔음. 만84세에 귀촌하여 자연인으로 살면서 인생을 마무리 해 가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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