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중은행 창구(자료사진)오마이뉴스 김연기
울보, 겁보, 느림보, 떼보. 요즘 아이들도 이런 말을 쓰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어릴 때는 이런 정도가 상대를 놀려주는 말이었다. 사전을 찾아보니 '보'는 체언이나 어간의 끝에 붙어 사람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한다.
그럼 바보의 '바'는 어떤 말일까? '밥+보'에서 'ㅂ'이 떨어진 것이라고 한다. 밥을 많이 먹는 사람이란 뜻이다. 어! 밥을 많이 먹는 사람을 왜 멍청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까? 어른들은 늘 밥 많이 먹으라고 강조하는데 말이다.
한마디로 밥값을 못해서 그랬을 것이다. 목숨과도 같은 밥을 많이 먹으면서 일은 제대로 안 하는 사람이 얼마나 미웠겠는가? 그러니 멍청하고 어리석다고 욕할 수밖에. 그럼 어떤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일까? 개인 일이 아니라 집단 전체의 일이다.
부자집 아들이 밥(고급음식) 많이 먹고 살 많이 쪘다고 욕하지는 않을 것이다. 공무원이나 공사 임원이 일은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공금으로 고급요리만 즐겨 살이 쪘다면 멍청하다고 비난해야 하지 않을까? 개인 일과 집단의 일이 다르기 때문이다.
정리정돈, 가정재무에서도 중요한 기본
옛 어른들이 생각하는 일 가운데 정리정돈은 매우 중요한 항목이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나 가정에서 가장 많이 들은 단어 가운데 하나도 정리정돈이다. 지금은 개인주의가 많이 진전되고 개인의 특이한 아이디어가 생산성에 크게 이바지하는 바가 있어서인지 정리정돈의 중요성이 많이 떨어졌다. 그렇지만 우리 생활의 저변을 잘 살펴보면 정리정돈의 중요성은 아직도 결코 가볍게 볼 문제가 아니다.
가정재무를 잘 설계할 때도 기본 중 하나는 정리정돈이다.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어야 흐름을 파악할 수 있고, 흐름을 파악하고 있어야 지출통제가 가능하다. 특히 개인사업자들은 사업수지와 가계수지가 명확히 구분되어 있지 않아 재무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사업수지와 가계수지 구분이 먼저다.
동대문에서 자영업을 하는 이준우씨(37·가명) 부부는 슬하에 유치원생 아들 하나를 둔 안정된 가정이다. 10년 이상 이 업계에서 일해 제법 자리를 잡았다. 밀레오레식 매장 2개를 합쳐 사용하는데, 1개는 지난해 2억원에 매입했다. 월 매출액이 1억에서 1억8000만원 정도라고 한다.
수익도 1500만원 내외다. 문제는 이런 수치들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대출도 많아 많이 버는 만큼 많이 나가는데, 이렇게 계속 가면 어떻게 될지 감을 잡을 수 없어 상담을 신청했다.
먼저 사업지출과 가계지출을 정리정돈해 보았다. 항목을 살펴보는데 대출상환이 가계지출로만 잡혀 있었다. 상가매입 때 발생한 대출은 사업지출로 봐야 하기 때문에 사업지출로 옮겼다. 또 마이너스통장도 사업자금으로 쓰고 있는 것이기에 역시 사업지출로 옮겼다.
월 수익이 1500만원이라고는 하지만...
다른 특이 항목은 계돈 750만원이다. 날마다 현금이 들어오기 때문에 이를 처리할 겸 사업자금을 쌓아둘 목적으로 일수계(30만원씩 월 25회)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16.5%대 마이너스 통장으로 2500만원을 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수계는 적합하지 않다. 11월에 기간이 끝나면 다음부터는 일수계는 하지 않기로 했다.
계돈 3000만원은 6억원의 대출조건 변경 때 원금 일부상환에 쓰고, 이후로는 여윳돈을 단위농협 저율과세 저축상품에 가입하기로 했다.(여윳돈이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하려면 적어도 3개월은 사업수지를 적어봐야 한다.) 단위농협과 새마을금고의 저율과세 상품은 세율이 1.4%다. 일반과세 15.4%, 세금우대 9.5%에 비하면 매우 유리한 세율이다.
또 부가세를 포함한 세금은 정확히 계산해 내지 못했다. 매출과 그에 따른 수익도 달마다 다르지만, 아직 정확히 계산된 적이 없다. 가장 시급한 것은 가계에서 지출파악을 위해 지출항목을 책정하고 가계부를 써서 비교해 봐야 하는 것처럼, 사업수지를 몇 달간 정리해 보는 것이다.
현재 있는 상태의 정확한 파악,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런 정리정돈 바탕 위에서 계획과 목표가 가능한 것이다. 정부에서 인구와 산업생산 등 기초통계를 바탕으로 예산을 세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적금과 적립식펀드로 차량할부금과 마이너스통장 해소
다음으로 가계지출을 살펴보았는데 제일 큰 항목은 대출이자다. 지난해 강남의 30평대 아파트를 사면서 아파트를 담보로 6억원을 대출받았다. 연리 6.8%인데, 원금은 갚을 생각도 못하고 이자만 달마다 340만원씩 내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이 아파트는 투자목적이다. 1년만 살고 현재는 전세로 내주고 다른 곳에서 전세를 살고 있다. 지난해 봄에 9억원에 샀는데 현재 시세는 11억원이 넘는다고 한다. 이런 시세차익 때문에 수도권 주요지역의 아파트 값이 계속 오른 감이 있다. 또 값이 오르니까 무리해서 투자하는 수요도 느는 악순환이 거듭됐다고 봐야 한다.
앞으로도 그런 상승세가 계속 유지될 것인지도 의문이지만, 과연 실제 수익률이 얼마인지도 따져볼 일이다. 3년 이상 보유해야 하고 2년 이상 실제 거주해야 하는 양도세 중과세 면제요건을 어렵게 다 지키는 조건으로 따져 봐도 실제 수익률은 11%를 넘지 않는다. 실제 들어갔거나 들어갈 비용만 계산한 것이다.
9억원이라는 막대한 돈을 투자하기까지 들어간 정신노동과 시간손실, 돈이 묶일 수 있는 위험부담, 액수는 그에 훨씬 못 미치기는 하지만 16%대의 대출이자 등도 고려해야 한다. 적게는 이자 340만원에 대한 기회비용도 고려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이씨 부부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의류사업에 시간과 돈을 집중해 사업을 더 탄탄하게 하는 게 더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의식은 고객과 충분히 합의된 바는 아니다. 고객의 판단을 더 어렵게 하는 것은 그 지역이 앞으로 재개발 가능성이 있다는 소문이다. 큰 돈과 높은 수익성이 오가고, 변화를 확신할 수 없어 쉽사리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다. 재무상담사로서는 가보지 않은 길을 포함한 두 가지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저축과 대출을 정리해 보았다. 실적배당이 좋지 않은 적립식펀드와 만기 정기예금은 이자율이 높은 차량할부대출금과 마이너스통장을 해소하는데 활용하기로 했다. 500만원 정도 남는 금액은 CMA계좌에 넣어두기로 했다. 월납이자 여유분 97만원은 장기저축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금융기관 갈땐 재무상담사와 함께
투자용 아파트를 팔아 대출금을 해소하기로 결정한다 해도 양도소득세를 감안하면 적어도 2년 정도는 더 시간이 필요하다. 그 전에 대출금 6억원의 상환조건을 변경하기로 했다. 조건은 원금 5%인 3000만원 상환(계돈 탓을 때), 10년납 원리금균등분할상환, 이자율은 현재보다 조금 낮은 5.9%다. 이렇게 하면 달마다 원리금으로 630만원을 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10년 후 원금을 다 갚아 대출부담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만약 현 조건을 10년 동안 그대로 유지한다면, 10년 후 원금은 그대로 남으면서 총납입이자도 2억2천만원 이상을 더 내게 된다. 이 대목에서 고객이 간절히 부탁한다. "농협 갈 때 같이 가주세요" 재무상담사가 따라간다고 해서 주장할 내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협상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마치 변호사가 의뢰인을 대신해서 법률사항을 검토해 주는 것과 같다.
이처럼 대출조건 변경만으로도 엄청난 이익을 보는 첫걸음은 수익과 지출에 대한 정리정돈이다. 정리정돈을 통해 가정재무의 정확한 현상을 파악하고, 목표를 세우고 개선할 의지가 생기면 얼마든지 그 방법은 있다. 누구나 맘을 단단히 먹으면 가능한 일이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면 좀 더 쉽게 할 수 있다. 가정경제의 큰 흐름을 올바로 잡는 기본은 이런 정도로도 충분히 시작할 수 있는 일이다.
덧붙이는 글 | <뉴스메이커>에도 기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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