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파요, 우리도 좀 먹고 살아요!"

수능시험을 앞둔 큰 아들의 메모를 읽고...

등록 2006.10.18 14:53수정 2006.10.19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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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새벽 4시경, 알람 소리에 일어났는데, 나보다 먼저 일어난 아내가 갑자기 박장대소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꼭두새벽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자 무슨 박장대소를 할만한 일이 있겠습니까. '저 여자가 실성을 했나?'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는 내게 아내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했습니다.

"당신, 이리 와서 이것 좀 보세요."
"꼭두새벽부터 웃고 난리야? 어젯밤에 뭘 잘못 먹었소?"
"아니 그게 아니고 이것 좀 보라니까요."


아내가 손으로 가리키는 것을 '화이트 보드'였습니다. 내가 건망증이 하도 심해서 만날 종이와 연필을 찾는 걸 보다 못한 아내가 전화기 옆에 놔둔 것입니다. 잠이 덜 깨서 눈을 비비며 안경을 쓰고 보니 기가 막힐 메모가 적혀있었습니다.

수능시험을 앞두고 밤 늦게 들어와 아들이 남겨놓은 메모.
수능시험을 앞두고 밤 늦게 들어와 아들이 남겨놓은 메모.박철
"배고파요.
우리도 좀 먹고 살아요.
냉장고에 아무 것도 없음"


우리 집 큰 아들 녀석이 남겨놓은 메모였습니다. 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마치고 올해 수능시험을 앞두고 있는 녀석입니다. 정규학교를 안 다녀서 실력이 모자란 탓에 죽기 살기로 학원에 다니며 공부하고 있습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아내가 싸준 도시락 두 개를 들고 마치 전쟁터에 나가듯이 학원에 갑니다.

요즘 수능시험이 코앞에 닥쳤다고 밤 12시가 되어야 집에 돌아옵니다. 그러니 아들 녀석의 얼굴 보기가 어렵습니다. 아침에는 내가 산행을 하기에 못 보고, 저녁에는 밤 9시만 조금 넘으면 일찍 잠자리에 들기 때문에 볼 수가 없습니다. 아들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날은 일요일밖에 없습니다.


아들 녀석이 써놓은 글을 읽고 아내처럼 박장대소를 하지는 않았지만 웃음이 나왔습니다.

아들이 남긴 메모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그런 메모를 남겼을까?' 이 녀석은 체구도 크고 먹성도 좋습니다. 집에만 돌아오면 습관적으로 냉장고 문을 엽니다. 가끔 잠결에 한밤중 집에 돌아온 아들 녀석이 냉장고 문을 열고 닫는 소리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땐 마음이 짠하지요.

새벽기도회를 다녀와서 옷을 갈아입고 아침 산행에 나섰습니다. 아침 산이 뿌연 안개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성큼성큼 산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런데 얼마큼 가다가 갑자기 명치끝부터 울컥하더니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큰아들 녀석에 투정 삼아 써놓은 메모가 못난 아비의 가슴을 후려치는 것이었습니다.

먹어도 먹어도 뒤만 돌아서면 배가 고픈 나이에 젊음을 학원에 저당 잡히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면서 먹고 싶은 것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기껏 아침밥은 먹는 시늉만 하고 달랑 도시락 두 개로 점심과 저녁을 때워야 하는 아들 녀석의 처지가 참으로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처음에는 교대에 가려고 준비를 했었는데, 성적이 그만큼 되지 않자 자신이 남보다 뒤처졌다는 상실감이, 그리고 자신의 불확실한 미래가 아들 녀석을 더 허기지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아들하고 대화를 나눈 적이 요즈음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 그랬습니다.'

박아딧줄. 올 봄, 축구를 하다 팔을 다치고.
박아딧줄. 올 봄, 축구를 하다 팔을 다치고.박철
아들 녀석이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10여 리가 넘는 길을 걸어다녔습니다. 비가 오는 날 차를 가지고 데리러 가면 교실에서 나온 아들 녀석이 나를 발견하고 좋아서 겅중겅중 뛰던 모습이 선명하게 생각납니다.

그땐 얘기를 참 많이 나누었습니다. 내가 어딜 가던지 이 녀석을 데리고 다녔습니다. 영화관에도, 산에도, 망월동 묘지에도….

그런데 지금은 아들 녀석과 속 깊은 얘기를 나눈 적이 너무 오래된 것 같습니다.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내가 좀 더 다정다감한 아버지가 되지 못했을까? 그런 자괴감에 마음이 아려집니다.

밤 12시가 넘어 학원에서 돌아온 아들 녀석이 모든 식구들이 잠든 것을 보고 깨우진 못하고 "배가 고파요!" 그렇게 자신의 삶을 푸념하는 메모를 남긴 것입니다. 배도 고팠겠지만, 그것보다 부모의 따뜻한 사랑에 더 굶주린 것은 아니었을까요?

뚜벅뚜벅 산을 오르는데 자꾸 눈물이 납니다. 오십이 넘은 아비의 아들에 대한 회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눈물이 멈추자 이번에는 아들 녀석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밀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아비의 마음이 다 이런 것이겠지요?

오늘은 내 지갑에 들어있는 용돈을 다 털어서라도 냉장고에 먹을 것으로, 아들 녀석이 좋아하는 것으로 가득 채워 넣어야 하겠습니다. 더 깊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주어야 하겠습니다. 아내한테 부탁해서 손전화 문자라도 보내야 하겠습니다.

"이번 일요일, 고기 뷔페에 가서 실컷 먹자. 엄마 아빠는 너를 하늘만큼 사랑한다. 힘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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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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