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소리 성지에서 소리청 옛모습 찾다

[나라음악큰잔치] 귀명창들의 판소리 유적지 순례-2

등록 2006.10.23 12:08수정 2006.10.24 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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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보성소리의 성지. 정응민, 정권진 명창의 생가 전경

보성소리의 성지. 정응민, 정권진 명창의 생가 전경 ⓒ 김기

판소리는 대단히 독특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보통은 지배계층의 문화가 피지배 문화로 강요되거나 답습되는 경향이 근대 이전의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반해, 판소리만은 피지배 계층에서 발로되어 지배계층의 열렬한 지원으로 확산된 특이한 경우이다. 그런 판소리 300년 역사를 통해 수많은 명창이 등장했고, 당대 명창들에 의해 새로운 바디와 유파가 생겨났다.

보성소리는 현재 가장 많은 명창을 배출한 유파라 볼 수 있다. 보성소리 창시자인 박유전이 흥선대원군의 '강산제일의 소리다'라는 칭찬을 들어 강산제로도 불리는 보성소리는 동편소리와 서편소리의 장점으로 무장한 사통팔달의 바디를 구성했다. 박유전의 소리를 받은 정응민에게 사사한 제자들로 계보가 이어지는데, 그 면면이 화려하다 못해 눈이 부실 정도이다.


그 이름을 거론하자면 김연수, 정광수, 조상현, 성우향, 성창순, 안향련 등이다. 물론 정응민의 아들 정권진을 빠뜨릴 수 없다. 요절한 천재 여류명창 안향현은 아직도 판소리 애호가들이 사무치는 그리움을 버리지 못하고 있으며, 창극의 아버지 동초 김연수는 자신만의 유파를 굳혀 이를 동초제라 부르고 있다. 조상현, 성우향, 성창순 등은 현재도 왕성하게 활동하며 보성소리의 진가를 높여왔다.

a 정회석의 부인이자 해금 명인 정수년의 해금산조로 정씨명가 귀명창 방문 생가 소리청이 열렸다

정회석의 부인이자 해금 명인 정수년의 해금산조로 정씨명가 귀명창 방문 생가 소리청이 열렸다 ⓒ 김기

보성소리의 특징 중 하나로 간과할 수 없는 점이 있다. 정응민, 정권진 그리고 정회석(국립국악원)으로 이어지는 판소리 가계를 이어오고 있다. 정응민이 활동하던 시절에도 걸출한 명창들이 없지 않았으나, 그 소리가 제자에게 이어지거나 혹은 절손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쑥대머리의 대명사 임방울 명창을 들 수 있다. 일제 강점기를 노래 하나로 견뎌내게 했던 당대 최고의 명창이지만 그의 소리를 받은 후손이나 제자가 없는 점이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다.

일본의 경우 전통예술은 가계를 중심으로 전승되어 오늘날에는 명가(名家)로 칭송되고 있다. 동양 중세와 근대의 예술이란 보통 그렇게 가계 전승이 기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선의 민중예술 역시 가계로 이어져 왔다. 가야금산조 창시자 김창조와 손녀 김죽파, 신무용의 아버지 한성준과 딸 한영숙 등도 3대를 잇지 못한 경우이다.

그러나 보성소리 계보가 현재까지도 그 후손에 이어져 판소리 명가의 명색을 지키고 있다는 점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같은 스승의 같은 소리를 받는다 해도 가계 전승은 도제 전승과 조금은 다른 일면을 가지고 있다. 제자와는 달리 핏줄로 이어지는 또 다른 이면을 가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보성소리를 받은 제자가 자신의 유파를 만들어 분파할 수 있으나 적어도 후손인 정회석은 잘하건 못하건 보성소리의 법통을 이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a 정회천 교수는 가야금 산조와 고수에 가계에 대한 설명까지 겯들였다.

정회천 교수는 가야금 산조와 고수에 가계에 대한 설명까지 겯들였다. ⓒ 김기

나라음악큰잔치(위원장 한명희)가 마련한 귀명창들의 순례 '판소리 명창의 발자취를 찾아서' 두 번째 발길이 닿은 곳은 보성소리 명가의 현장이었다. 21일 새벽 서울을 출발한 귀명창들은 보성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마침 보성소리축제가 열리는 때라서 보성은 차향기과 판소리로 가득했다. 보성 공설운동장 광장에 펼쳐진 소리축제의 현장을 둘러본 일행들은 정응민, 정권진 명창의 소리터로 향하였다.


보성군 회천면에 소재한 정응민, 정권진 명창 생가는 잘 가꿔져 있었다. 2002년 보성군에서 건립한 정씨 생가는 널찍한 마당을 품고 생가와 묘소를 모셨다. 늦은 시간이라 묘소 참배는 다음날로 미루고 귀명창들을 위한 정씨 후손들의 소리청을 곧바로 열었다. 판소리 계보로야 정회석이 잇고 있지만, 정권진 명창의 아들 모두가 국악계에 몸담고 있다.

국립창극단장을 역임한 정회천 전북대 교수는 고수 및 가야금을, 정회완씨는 대금주자로 활동 중이다. 아들 셋의 부인들도 역시 국악연주자로서 국악 일가를 이루고 있다. 특히 정회석의 아내 정수년은 해금에 관한 한 최고의 자리에 올라 있기도 하다. 정수년의 해금산조로 문을 연 생가 공연은 정회천의 가야금 산조 그리고 정회석을 통해 보성소리의 진가를 경험하는 순서로 이어졌다.


a 소리꾼을 튀는 침을 맞아야 제대로 소리를 듣는다는 옛 소리청 그대로를 재현한 생가 소리판 모습. 추임새가 미칠 듯이 터져나와 대청마루를 뒤덮었다

소리꾼을 튀는 침을 맞아야 제대로 소리를 듣는다는 옛 소리청 그대로를 재현한 생가 소리판 모습. 추임새가 미칠 듯이 터져나와 대청마루를 뒤덮었다 ⓒ 김기

옛날 초가집 그대로인 만정의 생가와는 달리 정씨 생가는 조금 넓게 개조해서 대청마루 공연이 가능했다. 물론 소식을 듣고 찾아온 동네 주민들과 보성군 직원들까지 모두 마루에 들 수는 없어 반 정도는 대청 바깥에 의자를 펴고 앉아야 했지만, 서울서 내려간 귀명창들은 대부분 대청을 차지했다. 예로부터 소리꾼의 침을 맞을 거리에서 듣는 소리가 진짜라고 했다.

아니라 다를까, 연주자와 청중의 거리는 불과 1미터 남짓. 그 지척간의 공연이 주는 감흥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가늠 못할 것이 있다. 확성장치라고는 없으니 연주는 전라도 말로 '꾀 벗고'하는 것이기에 과장도, 눈속임도 있을 수 없다. 있는 공력대로만 보일 따름인 이 대청마루 공연에 귀명창들은 그야말로 매료되었다.

축제 폭죽이 터지듯이 추임새가 연발하였고, 정회석은 계획보다 더 긴 소리를 불렀다. 이에 질세라 정회완과 동료가 가세한 즉석 시나위와 민요 연주에 흥이 오를 데로 오른 생가 공연은 예전 소리청 모습 그대로였다. 마침 판소리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내려온 판소리 대론가 이보형 선생은 감회에 젖어 예전 소리청의 모습과 보성소리에 대해 구수한 회고를 전해주어 귀명창들에게 즐거움을 더해주었다.

a 그림만 그리기로 하고 생가를 찾은 윤진철. 그 역시 보성소리를 받은 제자임을 잘 아는 귀명창들의 채근에 평상복 그대로 부채를 들고 적벽가 한 대목을 불러야 했다

그림만 그리기로 하고 생가를 찾은 윤진철. 그 역시 보성소리를 받은 제자임을 잘 아는 귀명창들의 채근에 평상복 그대로 부채를 들고 적벽가 한 대목을 불러야 했다 ⓒ 김기

그럴 즈음 보성군수와 대구군수 등이 뒤늦게 합류하여 흥을 돋웠다. 그렇듯 흥이 오르니 원래는 소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소리청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자리했던 윤진철 또한 붓을 놓고 마루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정회석이 수궁가와 심청가 대목을 불렀고, 윤진철은 적벽가 한 대목을 불러 다시 한번 생가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메구(풍물)나 치러 왔다는 동네주민들과 서울 귀명창들 그리고 보성군청 직원들이 한 데 어울려 어깨춤을 추며 민요를 불러 젖히면서 보성의 밤은 깊어갔고, 저녁 7시에 시작해 판을 정리한 시간은 예정보다 두 배가 길어진 밤 10시였다. 흥이 거나해진 일행은 숙소로 돌아가 회천면장이 선물한 동동주를 한 순배 돌리며 조금 전 소리청의 감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날 아침 정응민, 정권진 명창 묘소 참배를 위해 짐을 꾸릴 때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다시 생가를 찾아 두 명창의 묘소에 헌화하고 머리를 조아린 귀명창들은 내리는 비에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이어 보성소리 창시자 박유전 예적비 등을 돌아보고 도저히 발길을 떨어지지 않는 지, 생가 대청에 다시 올라 판소리 한 대목씩을 돌아가며 불렀다. 더러는 어설픈 소리도 있었지만 개중에는 본격적으로 소리판에 나서도 손색없는 목을 가진 이도 있어 동석한 전문가들을 깜짝 놀라게도 하였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먼 길을 남긴 일행들은 아쉬운 발길을 돌려 빗길을 뚫고 서울로 향하였다. 물론 버스 안에서도 판소리와 민요가 이어졌다. 명창의 생가를 찾아 그 후손들로부터 가계의 소리를 듣는 일은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일로 참가자들은 대단히 흡족해 하는 모습들이었다.

a 서울서 내려간 귀명창에 동네 주민들 그리고 군청직원들까지 몰려 들어 넓지 않은 생가 마당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서울서 내려간 귀명창에 동네 주민들 그리고 군청직원들까지 몰려 들어 넓지 않은 생가 마당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 김기


a 귀명창들이 묘소 참배를 하기 위해 다시 찾은 일요일 아침은 간만에 달콤한 가을비가 내렸다

귀명창들이 묘소 참배를 하기 위해 다시 찾은 일요일 아침은 간만에 달콤한 가을비가 내렸다 ⓒ 김기


a 귀명창들은 서울로 떠나기 전 생가 대청에서 각자 익혀온 판소리 한 대목씩을 뽐내었다.

귀명창들은 서울로 떠나기 전 생가 대청에서 각자 익혀온 판소리 한 대목씩을 뽐내었다. ⓒ 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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