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56회

등록 2006.10.24 08:27수정 2006.10.24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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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네. 자네가 내일 일찍 이곳에 있는 자들을 은밀하게 조사해 봐. 그 정도의 고수라면 이곳에서도 손가락 안에 드는 인물일 게야."

사실 운중보의 식구만 해도 사오백 명이 훨씬 넘는다. 또 보주의 회갑연으로 인해 찾아온 손님 역시 삼백여 명이 넘을 정도였다. 이곳이 밖이라면 몰라도 운중보 안에서 동창의 위세를 부리며 일일이 조사할 수 없음은 이미 신태감도 알고 있을 터. 그래서 신태감은 자신의 부상소식을 알리지 말고 은밀히 조사하라고 한 것이다.


"상처가 너무 깊으오."

"가져온 금창약으로 지혈시키고 속명단(速命丹) 한 알을 주게. 그리고 내일 중의(仲醫)께서 오시니 그때 치료를 부탁해도 될 게야."

신태감은 사람을 믿지 않는 성격이었다. 자신과 같이 이십여 년을 넘게 곁에서 같이 지낸 사람이 아니라면 그는 절대 믿지 않았다. 더구나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 의원이랍시고 나타나 치료 중에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신태감은 그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동정오우 중 한 명인 중의라면 믿을 수 있었다.

경후가 급히 건네 준 속명단을 입에 털어 넣은 신태감의 눈꺼풀이 자꾸 감기고 있었다. 경후는 신태감의 상처에 금창약을 뿌리면서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신태감은 그가 알고 있는 한 대단한 고수였다. 수십 차례의 동림파 자객들의 기습에서도 손끝 하나 다치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고수였다. 헌데 그가 이토록 처참하게 당한 것이다.

"태감…!"


"혹시나 했는데 역시 뭔 일이 터지고 있어. 누구 짓인지는 곧 밝혀지게 될 게야. 하지만 조심해야 해. 이제 운중보는 한시도 경계를 늦출 수 없는 용담호혈이 되었어. 이 거처도 위험해."

서당두가 청룡각 내에서 살해당한 일을 떠올렸을 것이다.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중상을 입은 몸이다. 자신이 이리도 처참하게 당한 상황에서 누가 자신의 안위를 지켜줄 것인가?


신태감의 목소리가 점차 가라앉고 있었다. 경후 역시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이 보주의 후계자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후계자 문제가 이러한 사건의 배경에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후계자 문제로 치부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추산관 태감은 유일하게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신태감을 운중보로 급히 파견한 것이고, 그것도 모자라 두 가지 사안을 은근히 강조하고 지시하며 자신까지 운중보로 가라고 했던 것이다.

물론 후계자로 추산관 태감의 아들인 추교학을 만드는 일도 매우 중요한 임무였다. 황제보다 더 큰 권력을 쥐고 있는 위충현 태부의 권세가 영원히 지속하려면 무엇보다 운중보를 완벽하게 장악하는 것이 매우 필요했다.

허나 다섯 제자들에게는 막강한 배경이 있었다. 하나같이 내로라하는 배경이었다. 아무리 중원을 한 손에 쥐고 흔드는 권력을 가진 위충현 태부의 오른팔인 추산관 태감이라 해도 정당한 경쟁 속에서 추교학을 무조건 운중보의 주인으로 만드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운중보주는 그 내심을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또 그동안 아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왔던 것은 사실이지만 추산관 태감의 노골적인 요구라 해도 반드시 들어줄 것인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내일 아침 일찍 거처를 상만천 부호 쪽으로 옮겨야겠어."

"여기가 위험하다면 거기라 안전하다고 할 수 있겠…?"

"아니야… 으 음… 자네가 상부호를 확실히 몰라서 하는 소리야. 그라면 철저한 대비책을 세워놓고 이곳에 들어왔을 테니까 본관의 몸을 추스르는 잠시 동안만이라도 그곳에 의탁하는 것이 괜찮을 것 같아."

상부호의 조심성을 몰라서 반문한 것은 아니었다. 피아를 구분할 수 없는 이런 상황에서는 함부로 움직이는 것이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경후 역시 나름대로 운중보의 대소사에 대해 조사를 완벽하게 끝낸 상태에서 이곳에 들어왔다. 분명 모든 암투의 발단은 후계자 결정 문제였다. 보주의 제자 간 눈에 보이지 않는 암투를 벌이기 시작한 것은 이미 석 달 전부터였다.

보주의 회갑연을 크고 성대하게 치르겠다고 제자들이 나섰을 때 보주는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이번 회갑연을 끝으로 무림에서 물러나겠다고 했고, 뒤를 이을 후계자를 정한다고 공표했다. 그 말을 시작으로 후계자가 되기 위한 암투는 시작되었다.

그런 와중에서 혼란의 소용돌이로 몰고 간 결정적인 사건은 바로 철담의 죽음이었다. 철담은 운중보의 후계자를 정하는 데 있어 운중보주 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할 인물이었다. 지금까지 운중보의 대소사를 처리했던 인물이었다. 그런 연유로 운중보주는 대부분 철담의 의견을 무시하거나 처리에 대해 책망을 한 적이 없었다.

이번 역시 후계자를 정하는 문제는 운중보주 자신뿐 아니라 철담, 그리고 나머지 세 명의 친구까지 의논해서 결정했을 터였다. 물론 다른 인물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었겠지만 명색이 운중보주의 후계였으니만큼 운중보주의 의견이 우선이었을 것이고, 철담이 보주의 의견에 동조한다면 그것으로 그만일 터였다.

헌데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느낀 것은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감이었다. 알 수 없는 긴장감과 왠지 모를 음습함이 그의 본능에 경고를 하고 있었다. 단순히 후계를 잇기 위한 필사적인 암투만은 아닌 것 같았다. 동창의 이인자라 할 수 있는 자신에게마저 전후 내막을 감추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고, 이번 추산관 태감의 은밀한 두 가지 지시 역시 분명히 그런 느낌을 들게 하였다.

점차 그의 머리가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분명 신태감은 무언가 알고 있는 눈치였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라는 말은 이미 뭔가 예상하고 있었던 의혹이 확신으로 변하고 있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했다. 경후는 뭔가 묻기 위해 신태감을 바라보았다.

"………!"

신태감은 이미 잠이 든 것 같았다. 아니 혼절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왜 신태감을 암습했을까? 그것도 보주와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암습을 가했던 것은 무슨 까닭일까? 단지 동창에서 밀고 있는 보주의 다섯 번째 제자의 배경을 약화시키려 신태감을 노린 것일까?

더구나 신태감의 말을 들어보면 누군가가 그를 유인했고, 죽이려 한 것 같았다. 헌데 왜 상만천이 머물고 있는 연무장 쪽으로 유인을 했을까? 상만천이 데리고 들어온 인물들일까? 그럼에도 신태감이 이곳보다 더 안전할 것이라 생각하는 곳이 상만천이 머무는 곳이다. 그건 또 어찌된 영문일까? 자신 외에는 믿지 않는다는 신태감이 그래도 상만천은 믿을 수 있다는 의미일까?

'정말 알 수 없는 일이군.'

경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 분명히 있었다. 신태감, 아니 그 위의 추산관 태감이나 위태부까지…. 운중보주를 비롯한 동정오우는 물론이고 상만천까지도 그저 표면에 나타난 적당한 협력 관계가 아닌 자신이 모르는 깊숙한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

갑자기 경후의 뇌리에 의혹이 스쳐 지나갔다. 분명 그들 간에는 표면에 나타난 것 이상의 끈끈한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러한 감추어진 관계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아니 벌어진 것이다. 결정적인 근거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철담이 살해당한 일이다.

경후의 예리한 두뇌가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언제 어떤 연유로 그들 간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한 것일까? 더구나 서교민은 왜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살해당한 것일까? 그를 살해할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일까?

더구나 서교민의 죽음에 이은 신태감까지 기습해 중상을 입힌 것은 동창에 대한 정면도전이나 마찬가지였다. 유독 동창의 인물들만 노리는 것이 아닐까? 혹시 동림당의 잔당이 스며든 것일까? 하지만 동림당의 잔당들 중에는 신태감을 부상시킬만한 인물들이 남아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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