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 철학자 박이문 선생이 17년 만에 펴낸 시집

[서평] 박이문 시집 <아침 산책>

등록 2006.10.24 15:28수정 2006.10.24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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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아침 산책>

<아침 산책> ⓒ 민음사

철학자 박이문(본명 朴仁熙) 선생이 지난 5월 <아침 산책>을 출간했다. 영시집 < Broken worlds >(1999) 이후 7년만이고, <울림의 공백>을 기준으로 하면 17년 만에 펴내는 시집이다.

개정되기 전 고등학교 국어(상) 교과서 첫 단원에 선생의 산문 '나의 길, 나의 삶'이 수록돼 많은 이들이 철학자 박이문 선생은 잘 알고 있을 터이다. 이 글에서 선생이 다음과 같이 한 말은 시를 쓰는 내게 깊이 각인되어 있다.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면서 하나하나의 시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보석처럼 생각되었다. 나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내가 시인이 된다면 당장 죽어도 한이 없을 것처럼 생각되었다."

박이문 선생은 1930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했다. 그리고 곧장 프랑스로 건너가 소르본느 대학 불문학 박사가 된 뒤, 다시 미국으로 가서 남캘리포니아대학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화여대와 외국의 여러 대학에서 불문학과 철학을 가르치다 포항공대에서 철학 교수로 정년을 마쳤다.

선생이 그동안 펴낸 문학과 종교, 철학의 여러 저서를 다 언급할 수는 없다. <박이문 선집1-문학과 연어의 꿈>, <박이문 선집2-이카루스의 날개와 예술>, <행복한 허무주의자의 열정>, <과학의 도전 철학의 응전>, <사유의 열쇠 철학>, <당신에겐 철학이 있습니까?> 등이 최근에 선생께서 펴낸 책들이다.

올해로 희수(喜壽)를 맞은 선생은 현재 시몬즈 대학 명예교수이자 연세대학교 특별초빙교수로 활동하고 있으며, 일산 자택에서 왕성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백발의 사색에는
아직도
텅 빈 어둠이 차 있는데


시골 돌담 너머 매달린
감 몇 개 익고 있는 날

가을 하늘은 아무리 봐도
크고 무한히 곱다
한없이 충만하다
('가을 하늘' 전문)


<아침 산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가 '귀향'이고 2부가 '광란'이다. 이는 시집에 담긴 내용의 두 향방을 단적으로 언표하고 있다. 시인이 외국(미국)에 체류하고 있을 때는 고국을, 국내 객지(일산)에 있을 때는 고향을 그린다. 어머니, 아버지, 유년 시절이 시적 화자가 돌아가고자 하는 고향이다. 귀향 의식은 인간 본연의 의지이자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인용한 시 '가을 하늘'은 우리나라의 가을 하늘처럼 맑고 곱다. 그리고 독자에게 가슴 저미는 슬픔을 조용히 불러일으키게 한다. 3연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시의 내용도 세 개의 의미 단락이 모여 전체 내용을 이루고 있다.

'백발의 텅 빈 어둠/시골 돌담의 감/한없이 충만한 가을 하늘'이 그것이다. 백발의 사색에 아직도 텅 빈 어둠만 차 있다고 절망하는 시적 화자와, 시골 돌담의 붉은 감 위 높푸른 가을 하늘의 충만함이 시각적 이미지와 함께 내용의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무한적 존재인 자연의 스스로 그러함, 무한함 앞에 유한적 존재인 인간의 한계에 절망하는 노시인의 음성을 듣는 독자의 가슴은 서늘하다.

똑똑히 보자/우주의 광기, 인간의 발광을/문명의 카오스, 존재의 소용돌이를/지구가 갈라지고 휴앙지 푸켓을 쓰나미가 덮치고,/성난 허리케인이 뉴올리언스 시를 물바다로 만들고/깨진 바다에서 물이 섬들을 삼키고/성난 화산에서/붉게 끓는 바위들이 산꼭대기로 솟는다

분명히 알자/사회의 불의, 사유의 혼동,/헛소리, 거짓말, 사기,/강도, 강간, 살인,/폭주, 폭언, 폭격, 폭동,/데모, 테러, 죽음을

이제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절대적 어둠/이제 그 아무것도 안전할 수 없는/존재의 미친 요동

그렇다면 오늘날/시인은 이 모든 것들이 벌어진 치열한 전선에서/그것들 향해 총을 겨냥하는/
지원병이 아니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광란한 시대의 광란의 시' 부분)

인용한 시는 2부 '광란'에 수록된 대표시다. "광란의 시대", "문명의 황무지"가 되어버린 우리 시대에 대해 시인이자 사상가인 박이문 선생이 엄중하게 전하는 시적 경고의 메시지다. 사람살이는 물론 지구 생명 그 자체가 무너지고 있는 우리 시대를 바라보고 있는 시인은 시의 말미에서 "오늘날 분노로 폭발하지 않은 시인은 사기꾼이다"라고 외치고 있다.

시집 맨 끝에 실린 '아직 쓰여지지 않은 시를 위해서'를 읽으며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선생께서 포항에 계실 때 각별하게 가졌던 교분 때문만은 아니다.

"어느덧 나의 시간은 다 되어가는데/내가 만들어본 낱말들은/아직도 아무 뜻도 없는 침묵일 뿐이다./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그래서 나는 뜻이 없고 말이 되지 않지만/쉬지 않고 언어를 실험하고 시를 습작한다"

이 짧은 시적 전언에는 박이문 선생이 걸어온 삶의 이력과 자세가 다 들어가 있다. 돌아가야 할 가을 하늘을 떠올리며, 그래도 온전히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언어의 실험을 멈춤 없이 계속하겠다는 노시인의 말씀이 나를 울린다.

선생께서 포항 생활을 끝내고 이삿짐을 꾸려 떠나는 날 아침, 포항공대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선생과 사모님을 떠나보내던 몇 해 전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더욱 건강하셔서 선생께서 못하신 말씀을 언어로 다 보여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바란다.

a 박이문 선생께서 필자에게 보내준 시집 사인

박이문 선생께서 필자에게 보내준 시집 사인 ⓒ 이종암

덧붙이는 글 | 경북매일신문 '이종암의 책 이야기'에도 곧 송고할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경북매일신문 '이종암의 책 이야기'에도 곧 송고할 것입니다.

아침 산책

박이문 지음,
민음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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